성극/요셉

오랜 기다림의 사랑.. 윌리엄 다이스의- 야곱과 라헬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18:39

오랜 기다림의 사랑..

윌리엄 다이스의- 야곱과 라헬



황혼이 물들기 시작하고 아무도 없는 황량한 들녘,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의 집이 있는 밧단아람에 도착한 야곱은 여기서 꿈의 여인 라헬과 숙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야곱과 라헬의 만남은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을 보여주며,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예표한다.

영국 런던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가량 가면 앵글리아의 휴양지 서포크가 나온다. 완만한 언덕, 고요한 호수, 느린 강과 작은 시내들, 멀지 않는 곳에 있는 한적한 해변 등 모든 것들이 목가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곳에 노디스홀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인구 수백 명의 이 작은 마을 입구에 고색창연한 예배당이 하나 서 있다. 15세기의 낡은 종탑을 갖고 있는 성 로렌스예배당 안에는 20년 전만해도 유명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설교단 위에 걸려 있던 그림은 지금은 레이스터(Leicester) 미술관으로 이관돼 보관 중인 윌리엄 다이스(William Dyce, 1806~1864)의 <야곱과 라헬>이다. 1948년에 그 교회에 기증된 <야곱과 라헬>은 1980년대에 이르러 교회가 재건축을 하면서 소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매각했는데, 그로 인해 지금 성 로렌스예배당에는 그림에 대한 사진 한 장만 걸려 있을 뿐이다.
창세기 29장에 나오는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과 그들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그런 사랑을 경험해 본 화가 자신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매력적인 것이었고, 한편으로 야곱과 라헬이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되는 교회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신부가 되는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끄는 주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스코틀랜드에 오셨는가?

그림이 있던 서포크 지역과 정반대로 스코틀랜드 북단의 항구 도시 애버딘에서 태어난 윌리엄 다이스는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이라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낸 야곱처럼 마흔네 살이 돼서야 흠모하던 여인 제인 브랜드와 결혼에 성공한다. 그는 아들과 딸을 각기 두 명씩 두고 결혼 후 불과 14년을 더 살고 세상을 떠났는데, 이 작품은 아마 그의 결혼 생활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림에 나타난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의 몸짓과 애절한 눈빛이 매우 실감 있게 다가온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화가인 다이스는 본래 의학을 공부하고, 또 잠시 신학 공부에도 몸을 담아 애버딘대학에서 16세의 나이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고유한 달란트를 따라 그림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에든버러에 있는 왕립 스코틀랜드아카데미에서, 이어 런던 소재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25년 이후로 이탈리아를 수차례 방문하면서 티치아노와 푸생 등의 작품들을 연구하고, 또 그곳에서 프리드리히 오버벡과 같은 ‘나사렛파’라고 불리 우는 독일의 소장파 화가들과 조우했다. 나사렛파의 영향으로 <야곱과 라헬>에서 야곱은 나사렛 예수처럼 긴 머리를 지닌 청년으로 묘사되고 있다.
윌리엄 다이스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1848년 영국에서 일어난 화풍인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화파는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 이전의 화풍으로 돌아가 자연 중심주의, 밝고 환한 장면, 상징주의 기법, 종교적 주제 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냈다.
이런 성향을 보이는 다이스의 대표적인 작품은 <야곱과 라헬>과 1860년에 그린 <슬픔의 사람>(The Man of Sorrow)이다. <슬픔의 사람>은 황량한 고원 지대인 북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의미심장한 그림이다. 나무 한 그루 없고 돌들과 갈대만 있는 황량한 산 정상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그린 이 그림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잘 어우러진 토착화된 성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곳을 방문했다는 전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태복음 4장 3~4절에 나오는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가신 광야가 바로 이곳이고 여기에 나오는 많은 돌들은 마귀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한 그 돌들이라는 것이다.


광야에 핀 사랑

다이스의 그림에는 문학성이 흐르고 음악적 선율이 흐른다. 실제로 이 작가는 음악에도 조예가 있어 여러 곡들을 남겼는데, 그의 시편 송가들은 오늘날에도 옥스퍼드대학이나 케임브리지대학의 예배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야곱과 라헬>에는 한 편의 감미로운 동화 내지 아름다운 사랑의 서정이 흐른다. <슬픔의 사람>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산 정상은 아니더라도 그림의 배경으로 하이랜드의 산들이 보이고 그 아래로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다. <슬픔의 사람>이 주는 고즈넉하고 슬픈 분위기가 사랑을 주제로 하는 그림에 짙게 깔려 있다. 내리깐 라헬의 눈길에는 새침함뿐 아니라 우수의 그늘이 서려 있고, 그녀를 당기고 있는 야곱의 눈빛에는 연모의 애절함뿐 아니라 도망자의 불안감도 읽을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랑에는 즐거움과 유쾌함만이 있는 게 아니라 슬픔과 애절함도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말했던가, ‘슬픔을 노래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가(詩歌)’라고.
황혼이 물들기 시작하고 아무도 없는 황량한 들녘,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이 있는 밧단아람에 도착한 야곱은 거기서 꿈에 그리던 여인 라헬과 숙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야곱은 장자권의 갈취, 형 에서의 분노, 벧엘에서의 꿈 등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뒤로 하고 동방 사람들의 땅에 이른 것이다. 그는 그곳 우물가에서 양을 치던 라헬을 만나게 된다. 야곱은 그녀가 이끌던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그녀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창 29:11)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게 되었다. 야곱이 에서를 피해 집에서 도망해 올 때 아버지 이삭은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했으므로 야곱은 이 만남의 순간에 라헬이 자신의 여자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야곱의 허리춤에는 여행길에 필요한 가죽 물통이 달려 있고 그의 몸에는 짐승 털옷이 걸쳐져 있다. 하지만 그의 피부는 스스로의 말처럼 ‘털사람’ 에서에 비해 ‘매끈매끈한 사람’(창 27:11)이다.
야곱의 적극성에 비해 라헬은 침통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두 사람의 허리춤에 둘린 스카프의 유사성을 통해 이들이 이미 인생길의 동무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라헬의 뒤편으로 멀리 서 있는 종려나무 두 그루도 이들의 사랑에 대한 상징으로 그려진 것이다.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아름다움(아 7:7)과 번영(시 92:12)을 상징한다.
라헬은 야곱과 우물을 사이에 두고 서 있고 그녀의 한 손은 야곱에 붙잡혀 있지만, 다른 한 손은 우물의 가장자리를 잡다. 따라서 라헬이 기존의 삶과 새로운 인생 사이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의 우물들은 야곱의 집안 대대로 내력이 깊다. 조부인 아브라함은 아버지 이삭의 반려자를 구하기 위해 늙은 종 엘리에셀을 이곳으로 보냈는데, 그는 한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야곱도 여기서 라헬을 만나게 되었다. 성경에서 실로 우물은 샘물을 얻는 곳이면서 동시에 극적 만남과 운명적 사랑을 이루는 장소였다. 야곱은 우물가에서 자신이 나중에 14년 동안 연모하면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인 라헬을 만날 수 있었다. 신약 시대에는 사마리아의 죄 많고 한 많은 여인이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영원한 샘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조우할 수 있었다.


만남과 사랑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인생은 만남’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일상은 물론이고 평생을 통해 만남의 파노라마 속에서 이뤄진다. 어떤 만남은 우리에게 별 의미도 없고 또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반면에 어떤 만남은 우리의 인생에 큰 의미를 주는 결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결정적 만남에 대해 우리는 시간과 정력을 쏟기도 하고 인생을 바치거나 목숨까지 던지기도 한다. 그런 만남을 한 번이라도 가져보지 못한 인생은 별 재미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야곱은 결정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 만남으로 인해 야곱은 한 여인에게 14년의 세월을 바치며 온갖 수모와 고생을 감내한다. ‘가까이 있는 그대’를 그리면서 오랜 세월을 하루 같이 보내는 것이다. 라헬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듣게 하는 야곱을 보니 류시화의 시가 생각난다.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예수님과의 가슴 떨리는 조우

야곱과 라헬의 만남은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을 보여주며,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예표한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나무와 가지’, ‘머리와 지체’, ‘신랑과 신부’ 등 다양한 개념들로 나오는데, 그 중에서 ‘신랑과 신부’의 은유는 구원의 은혜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나 아가서에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신적 사랑인 ‘아가페’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세 번이나 고백했듯이 연인 간의 사랑을 뜻하는 ‘필리아’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계명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연모로써 신랑되신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아가페 외에 필리아적 사랑이 요구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필레이’하지 아니 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라고 했다. 하여튼 주님을 예표하는 야곱의 사랑이 확인되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라헬로서 사랑을 고백해야 할 차례다. 비록 이곳이 광야라 할지라도 말이다.


@글쓴이; 전 광 식 고신대학교 교수
* 전 광 식 독일 레겐스부르그대학(Ph.D.)에서 철학 및 신학사상사를 전공.
     現) 고신대학교 교수
출처 : Tong - CLIPPER JM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