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계시로서의 바울의 복음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의 비밀
이 비밀은 바울이 다메섻 도상에서 받은 계시 안에도 함축되어 나타나는바,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직후부터 이 비밀의 내용을 하나하나 깨달아 갔음이 분명하다.만일 그 께시의 목적이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면,과연 하나님의 구원 계흭 안에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무엇이었으며,그것은 유대인들의 위치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1세기의 많은 유대인들은 참된 신지식을 이방인등에게 전하는 것이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믿었고, 그 일을 위해 자신들이 선지자로서이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사43:21).당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로마 제국 내에 펴저 있던 회당과 관계를 맺고 있엇던 사실은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동했엇는지를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라고 하겠다.
많은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도 일찌기 이러한 선교를 그들 사명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비록 성경에는 유난히 사도 바울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기는 하나,바울의 전도 여행 지역과는 다른 방향으로도 복음이 전해졋던 것이 분명하며,그 결과 알렉산드리아나 로마 같은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에도 일찌기 복음이 전해졌다.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 처음에는 그러한 도시들 안에 기존해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 전했고,곧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방인들 사회로 복음 전도의 영역을 넓혀갔다.따라서"첫째는 유대인애개요 도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라는 차서가 복음 전파의 대상분만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차서로 이해되는 것이 당연했다.즉,먼저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을 자기들의 주권이 이방 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회의(행15장)에서 야고보가 암9:11이하의 칠십인역을 인용할 대 지녔던 관점이다.즉 다윗이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하여 주변 국가들에 그의 주권을 펼쳤듯이,이방 선교도 동일한 기점에서 출발하여"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찾도록 인도하고,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방인들을 가입시킬 것이었다.(행15:16).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그러나 광활한 그리이스 로마 세계에서는 회당으로부터 회개하고 나온 자들의 수는 이방 종교로부터 회개하고 나온 자들의 수에 비할 때 매우 미미한 것에 불과햇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20년이 채 못 되어 교회에 가입한 이방인들의 수는 교회 내에 있던 유대인들의 수자를 훨씬 상회하고 잇었다.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그 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무렵에는 세계에 퍼져 있는 교회가 현저한 이방인 공동체였던 바,이것은 참으로 사도 바울의 열정적 사역에 힘입은 결과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으나,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이방 선교 사역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촉진할 것으로 믿었다.바울 자신이 말했듯이,그가 이방인을 향한 사도로서의 사역에 온 힘을 다 기울였던 주요 이유는,동족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누리는 현실을 봄으로서 시기심을 일으켜 이 축복 중 그들 본래의 몫을 요구하게 하려는 소망 때문이었다.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그는 원칙대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이라는 순서에 입각해 복음을 전했으나,실제로 그것을 받는 데 있어서는 "첫째는 헬라인에 의해 또한 유대인에 의해"로 그 순서가 바꿘 것이다.하지만 바울은 이스라엘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일이 분명히 인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흭 중 최종적인 국면이 될 것을 바라보았다.
바울의 관점에서는,장차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모든 이방인 성도들의 수가 하나님 백성의 사귐 안에 들어오게 될 때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스라엘 백성도 지금과 같은 암매를 벗어 버리고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었다.이런 점에서 볼 때,바울 자신의 사역은 직접적으로는 이방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간접적으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의미를 지니는 방식으로 하나님게서 그리스도 안에 두신 구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친히 쓰신 도구였다.그리스도 재림은 바울의 사역과 후손들이 행할 같은 목적의 사역이 마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었다.
이방인들이 메시야 시대의 언약된 축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들보다 앞선다는 사실은 비록 시간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전례가 없고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었던 까닭에 그에 대한 매우 명백한 설명이 필요했다.
바울로서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얻은 경험 자체가 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엇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비밀"을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가르침으로써 훨씬 더 객관적이며 원칙적인 설명을 제시한다.;"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11:25이하).즉,비록 지금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의 대세를 이루고 있으나 장차 새롭게 될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포함하리라는 것이다.물런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러한 구속사 과정을 어느 정도 희미하게나마 예언해 온 곳이 사실이다.그러나 그들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뚜렸이 보여 주기 위해서는 더 분명한 계시-롬11:25의 "비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당시 새로운 공동체 내에서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을지라도 그 소수로서 공동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덩 것이 사실이며,더 나아가 바로 그들이 그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그렇다면 교회 내에서 유대인들이 대다수의 이방인들과 맺고 있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가?
바울은 좀더 상세한 혹은 좀더 충분한 "비밀",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 연합되는 "비밀"을 해석해가는 도중에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한다.
바울은 초기 서신들에서 ,좀더 구체적ㅇ로 말하자면 고전 12:12-27과 롬12:4-8에서,그리스도인들의 유기적인 삶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몸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즉,몸의 여러 지체들이 몸 전체의 건강한 활동을 위해 제각기 자기의 기능을 담당하듯이,각각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건강한 존립을 위해 저마다 자기의 사명을 수행해 간다는 것이다.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안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부른다.(롬12:5).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 몸이요,지체의 각 부분"이라 부른다(고전12:27).
그리고 이 한 몸 안에서 :유대인들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의 구별없이 모두"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난"라고 가르친다(갈3:27 이하).
그러므로 그들 서로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상이점을 은 이제 그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상이점 중에서 바울이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었던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상이점이었는데,종교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었다는 특권을 긍지로 여기고 열정적으로 그 것을 옹호하던 바울이,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사귐에 있어서 이방인들의 동등권을 솔선하여 즈장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원칙적으로 허물어뜨리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엡2:14)을 바울은 그의 사역으로써 누구보다도 더 실직적으로 허물어뜨렸다.
골로새서와 에배소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릿도 안에서 이룬 이 새 연합을 "몸"이란 단어로써 강조한다.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몸이라는 의미에서 지역적인 면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면에서도 이제 그리스도 몸이다. 그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전 세계의 교회와 그 안에 속한 각 지체들에게 부여하시는 생명이다.
바울은 이들 후기 서신들을 쓰기 몇년 전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갈2:20).그러나 이제 그는 이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용어를 몸과 머리의 관계 안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이러한 사상의 씨앗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네가 어찌하여 나를 피박하느냐?"(행9:4)라는 소리가 들릴 때 이미 바울의 마음속에 심기어졌다.그 말씀은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땅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 가해지는 일은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가해지는 일로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었다.물런 이런 사상은,개인을 집단과 결부시켜 이해하던 히브리적 사고 방식으로 인해 보다 자연스럽게 바울에게 다가왔을 것이다.그러나 그 사상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간에 새로운 연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그리고 이러한 터 위에서 바울의 독특한 사역에 관련하여 "비밀"이란 단어가 다시 사용된다.
골1:26이하에서 바울은 주께서 전하라고 명하신 그 메시지를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다가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비밀"로 표현한다.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다.""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지니신 목적은 구약 선지서들의 주요 주제였는데,그들 중 어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아니라 이방인들이 어떻게 이 목적 안에 들어오게 될련지에 대해서도 예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일이 실현될 방법,즉 이방과 유대 신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생명을 누리는 공동체에 동일한 자격으로 연합하게 되는 방법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일이 성취될 시기까지 하나님의 섭리 안에 감취어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 비밀을 비췸받은 바울은,이제 그 독자들에게 그처럼 풍성히 내려주신 은혜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경배할 마음을 이르키도록 그 놀라운 사실을 드러낸다.만일 이 은혜가 오직 유대인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졌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은혜였을 것이나,그처럼 놀라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유대인들은 이미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대상으로 자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이 은혜가 베풀어졌고,게다가 유대인 신자들과 조금도 차별 없이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방인 사도로서 이 "비밀"을 맡은 자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게 그것은 크나큰 기쁨이었다.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비밀을 설명해 가다가 그것을 한마디로"그리스도께서......너희 안에 계신다"고 분명히 선언한다.즉,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심지어 이방인인 너희 안에까지)영광의 소망으로 계신다는 것이다.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의 부활 생명은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날에(롬8:19)그의 찬연한 영광을 입게 되리라는 소망을 갖게 하기에 넉넉했다.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비밀"의 중신이요 둘레가 되신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높이우심으로써 이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긍극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시작해 놓으셨으며,그 안에 연합된 사람들은-지금은 부분적으로,그분의 영광의 재림 때는 충만하게-그 실현에 참여한다.
엡3:1-12에서 바울은 이 비밀을 맡은 일꾼이 되었음을 더욱 상세히 언급한다.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가운데서 자신을 들어"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할 특권을 부여하시고,그로 인해 세워진 교회로 하여금"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본으로 서개 하사 사람들에게만 아니라"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에게도 빛을 비취게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한다.새로운 피조물인 교회는,옛 피조물로서는 조무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이 한 단면을 나타내는 것이다.그 안에서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은혜를 유업으로 받는다.
하나님의 최종적 목적의 비밀
인류 안에 존재하는 어떠한 반목도,바울 선조들의 사고속에 흘러내려온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반목감처럼 근본적인 것은 없었다.만일 이 반목이 그리스도 안에서 불식될 수 있었다면 그 여타의 모든 반목도 불식될 수 있었다.물런 오늘날 인류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거리감보다 훨씬 더 다리 놓기 어렵게 보이는 다른 반목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에배소서는 모든 반목이 그리스도 ㅇ나에서 불식될 수 있고 또 불식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교회 그 자체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 계흭의 최종적인 국명이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최종적 상태에 이르기 전의 예비적 구조라 하는 것이 옳다.이 사실을 다음 말씀 가운데서 살펴볼 수 있다:"그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브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대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하늘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이하)
참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 가운데 세우신 화해의 걸작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 장차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우주의 정형을 인류 앞에 미리 드러내시는 것이다.교회는 바로 이러한 완성을 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다.물런 만일 교회 외부에서 벌어지는 반목이 교회 내부에서 재현된다면 그대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을 중시해야 할 본연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그러니 그 목적이"그리스도 안에서"배태되었기 때문에."그리스도 안에서"반드시 실현될 것이다.바로 이것이 이제 복음 안에서 나타난"그 뜻의 비밀"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바울에게 내려진 복음 안에 담겨 있다.(갈1:12).그가 이러한 세부 지식을 깨닫게 데에 어느 정도의 시일이걸렸는지 확실히 단언할 수느 없으나,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먼저 믿는 자들에게 이러한 지식을 전해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야 하는 그의 사명에 대한 자각과 실행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다시 말해서,그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깨닫게 된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땅에 계실 때 그와 사귐을 가진 일이 없었다.그러나 그가 개종 후 즉시 사귐을 갖게 된 부활하신 그 주님은 역사적 예수와 동일한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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