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와 바울
1.교회의 발생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그르 따르던 제자들은 공포와 실망에 싸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그들은 관원의 눈초리가 무서웠고 한 마디의 반항도 없이 잡혀 죽은 지도자의 죽음에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를 따르던 몇몇의 부녀자들이 사흘째 되던 날 무덤에 갔었다.뜻밖에 무덤은 비었고 죽었다던 예수가 다시 살아서 나타나심을 보게 되었다.그들은 놀라,이 소식을 흩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전하였다.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예수 그길스도 자신이 친히 부활의 몸으로 그들 앞에 나타남으로써 우매한 제자들도 그가 과연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오랬동안 선포하고 고대하던"메시야"즉 만인을 구원할 구세주임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 봄에 어린 싹이 서리를 맞은 것같이 맥없이 늘어진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대로 예수가 고난을 받으신 다음 다시 부활하여야 할 것을 마음으로는 알고 있으나 그것을 널리 전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인자한 예수는 놀랐던 양때를 이해하는 목자와 같이 나무램보다도 위로하며,그드로 하여금 앞으로 강림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역군이 될 것을 부탁하였다.이런 간곡한 부탁을 남겨두고 부활하신 예수는 그들을 떠나 승천하셨다(사도행전1:5)고 한다.
그리스도의 분부대로 약 120명에 달하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한 집회소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모임이 열흘째 되던 오순절 아침,드디어 그들은 강렬한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게 되었다.(행2:1).
때마침 종고적 절기였으므로 각처에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방언으로 한나님의 아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증언하였다.이것을 본 무리들은 서로 놀라 말하기를 저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조소하였다.
그 때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군중에게 이러한 현상은 술취한 것이 아니라,요엘(Joel)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이 말세에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신 성령의 역사라고 하였다.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세워 그의 행하신 권능과 기사의 이적을 통하여,그가 메시야이심을 사람들 앞에 증거하였으니 무리가 그를 믿지 않았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사 영광의 자리로 올리셨으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요,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이라고,이스라엘 종교사를 들며 성군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여 논증하였다.
베드로는"그런즉 이스라엘의 전 족속이 마땅이 알아야 할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목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니......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속죄함을 받으라.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6~38)하고 무리들의 회개와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 증언을 듣고 약 3천 명이나 새로 믿게 되었다.그들은 사도들레게 세례를 받고,성찬을 나누며 성도의 교제를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에 힘썼다.(행2:37~47).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예루살렘의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는 새로운 선교열을 가지고 이방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예루살렘 교회는 "디아스포라"의 개종한 교도들을 위하여 일곱 집사를 선택하였고 바울은 그가 새운 교회에 감독과 장로,그리고 여러 가지의 부서와 직책을 세웠다.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목회로 그 권위가 인정되어 있었다.교회내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교회는 더욱 견고한 조직과 제도를 요하였고 외모로도 거대한 교회로 성장해 나갔다.
2, 바 울
사도 바울은 아직 팔레스틴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독교를 당시 희랍-로마 세계(Greco-Roman World)에 소개한 선교자였다.그는 아마 기원후 32년만에 기독교인을 박해하기 다메섹으로 가던 중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고 180도로 전환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뒤 기원후 64~65년 그가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약 32년 동안 그리스도의 사도로 눔부신 활동을 하였다.기독사에 있어서 바울은 복음의 사자(Messenger of Gospel)로,도한 신학자로 다른 인물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이다.
바울읜 본명은 사울(Saul)인데, 그는 길리기아(Cilicia)의 다소(Tarsus)시에서 출생하였다.그의 부모는 "디아스포라"의 한 사람으로 경건한 유대교 신자였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대교를 신봉하는 경건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종교적인 감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당시 다소시에는스토아 철학 사상이 성행하여 희랍적인 사상에도 계발啓發되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모라 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으로,사울도 로마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이런 점이 후에 그의 선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울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항 시기를 바리새파에 속한 유명한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Gamliel)문하에서 지냈다.가마리엘은 굴지의 율법 학자인 힐렐의 손자였다.
사울은 가말리엘에게서 엄격한 유대교적인 경건과 그리고 율법을 세밀히 습득하였다.그는 경전에 정통하였고 랍비식 해석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 그가 아덴(Athens)의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연설을 보면 스토아 철학과 희랍의 시가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사울은 정통 히브리 종교의 출신으로 유대교 율법 교육과 아울러 희랍 철학에 으하여 배양되었고 식민지의 천민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서 위대한 사도요 신학자요 전도자의 재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1)바울의 개종
사울은 정규의 교육을 마친 후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새 종파의 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그들에게는 예수의 교훈이 신성한 토라(Torah)를 모독하는 것이었고 예수의 추종자들은 이교도와 같이 보였다.그래서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ㅘ고 멸절시키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충성으로 생각하였다.
사울은 민중을 선동하여 기독교인인 스데반(Stephen)을 돌로 쳐죽이는 데 서슴치를 않았다.
이러한 정통한 율법의 지시과 불타는 종교적 열심은 있었지만 사울은 내적인 평화를 얻지 못하였다.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거리가 멀었다.해야 될 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느 데에 인격의 파탄이 왔다.그는 율법의 요구를 명확히 알면 알수록 그것을 행하기에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달았다.
세밀한 율법의 규칙을 지킴으로 내적인 평화를 얻기에는 그의 종교적 통찰이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후에 당시의 내적 투쟁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잇는 죄의 법아레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느느도다.오호라!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7:22-24)고 하였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인격의 파괴가 심각하면 할수록 사울의 종교적 열심은 더욱 더 필사적이었다.그러한 결과는 곧 그리스도인을에게 대한 박해에 나타났다.그는 우대교의 최고 회의 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의 위촉을 받아 부하를 이끌고,다메섹 성내에 피난한 그리스도인을 진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떠났다.그가 다메섹 성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급격한 변화각 그에게 임하였다.그는 의식이 몽롱해져 신비적인 황홀경에 싸여 큰길에 엎드려졌다.여기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을 경험하였다.그는 자기가 박해하고 진멸하려던 그리스도게 도리어 사로잡힌 바 되었다.그는 의식을 회복했을 때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이러한 사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을 "누가"가 잘 묘사해 주고 있다.(행전9:1-9).다메섹 성내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사울이 개종하엿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혹은 자기들의 실정을 알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바나바라는 사람을 보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다음에야 그를 맞아들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경험은 그의 내적 투쟁에 결정적인 해결을 주었다.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서는 될 수 없음을 톤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을 깨달았다.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만으로 의로움을 입게 된다는 신학을 확립하게 되었다.
2) 선교자 바울
사울은 개종한 후 이름을 바울로 고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아라비아로 갔다. 그 이유는 그의 편지 중에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예루살렘의 동료들의 비난과 박해가 두러웠던지 혹은 새로운 신앙에 대한 더 깊은 명상과 기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그가 은둔 시작하던 해(기원후 35년 경0와 수리아의 안다옥 교회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해(기원후 46년경) 사이에 된 일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간 그는 선교 활동에 종사했으리라고 추측이 되나 그 무대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구국하다.안디옥 교회에서 시무하는 바나바에게 초빙을 받아 그는 주로 이방인 신자로 구성된 교회에서 바나바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수리아에서 가까운 키프로스(Cyprus)섬에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다음,북쪽으로 더 가 밤빌리아에 상륙하여 안디옥,이고니움,루스드라를 거쳐 더베(Derbe)까지 이르렀다가 그 길로 되돌아 왔다.(행전15:35).
이것을 일러 제 1차 전도 여행이라 한다.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
얼마 후에 마가(Mark)의 동반 여부로 그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겨 바나바는 마가를 도압ㄴ하고,바울은 실라를 동반하여 안디옥을 거쳐 에베소(Eohesus)에 이르러 병을 얻어서 의사 누가를 데리고 드로아에가지 갔다가 꿈에 마게도니아 사람의 구원을 청하는 환상을 보고 마게도니아의 빌립보(Philipp)로 갔다.거기서 다시 전진하여 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을 거쳐 고린도(Corinth)에 이르었다가 다시 에베소로 건너가 잠시 기류奇留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제 2차 전도 여행이었다.현존한 바울 서신 중에서 최초에 기록된 것은 [데살로니가 전서]이며 그것은 제2차 선교 여행 도중에 고린도에서 써 보낸 편지이다.
바울이 상경한 후에 열린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바울을 안수하여 이방인 교회의 사도로 인정하였다.그는 다시 세 번째의 전도 여행을 떠난다.안디옥에서 직접 에베소에 이르러 빌립보,데살로니가,고린도 교회를 거쳐 에베소에 잠시 머문 후에 그 동안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다니러 갔다.
그 때 팔레스틴 지방은 오랜 흉년으로 시런을 당하고 있었다.이방교회에서 거출한 막대한 헌금을 가지고 얘루살렘에 왔을 때 온 교회는 기쁨이 넘쳤다.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고 바울은 이방인을 유대인 성전 안뜰에까지 안내했다는 이유로 유대교 신자들에게 붑잡혀 고소를 당하여 수감되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케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로 되었다.로마 옥중 생활 기록은 별로 없으나 형사범이 어니어서 자유로이 면회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거기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등의 각 교회에 보내는 공항을 썼고 빌레몬에게 보낸 사신도 썼다.그 이후의 일에 대한 기록은 전혀 기록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석방되어 서반아까지 전도 여행한 후에 다시 잡혀 순교하였다고 한다.
3)바울의 공헌
바울은 최초로 대규모적인 이반 선교를 하였다.그리스도교는 그의 화동을 힙입어 유대교적 범위를 벗어나 팔레스틴 테두리를 넘어 로마 세계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바울이 세운 중요한 교회는 갈라디아의 지방의 여러 교회들,비시ㄱ디아의 안디옥 교회,빌립보 교회,데살로니가 교회,그리고 에베소 교회 등을 들 수 있다.로마에서는 옥중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모든 접촉하는 인사들과 주위의 모든 명사들에게 지대한 감화를 주어 개종하는 무리가 많았다.
바울은 허다한 박해와 고난능 넘어 선교 활동을 하였다.그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도 더 많이 갇히며 매도 수 없이 맞고 ㅇ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우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굶어 죽고 헐벗었노라.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3-28)고 하였다.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염려하였다.
바울은 실천적인 신앙가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신학자였다.유대교의 훈련과 희랍 철학의 소양은 기독교 신앙과 결부되어 바울의 위대한 사상과 저술을 낳게 했다.그는 기독교 신앙을 유대 종교의 유럽적인 기반에 구축하였을 뿐더러 희랍 철학의 논리와 사고를 빌어 서술하였다.그는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한 셈이다.그는 인간 속 깊이 숨어 있는 불안과 모순을 지적하였고,이 죄의 상태에서는 자기만의 힘으로 구우ㅝㄴ을 받을 수 없음을 명시하였다.그는 그러한 심각한 내적 갈등이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되는 체험을 체계 있게 저술하였다.
로마서,갈라디아서,고린도전후서,데살로니가전후서 등 양적으로도 신약 성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질적으로도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이 바울의 신학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왔다.
출저:성서와 기독교에서 발췌
'성경 > 바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 사상과 칼빈 사상의 비교 연구 (0) | 2009.09.04 |
---|---|
[다소 ] (0) | 2009.09.04 |
계시로서의 바울의 복음 (0) | 2009.09.04 |
제2장 계시로서의 바울의 복음 (0) | 2009.09.04 |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 (0) | 2009.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