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
키드누스(Cydnus)강 옆의 길리기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륙으로 약 16km지점에 있다.지중해 연안에 접해 있으며 아다나에서 40km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8만의 소도시이다.로마시대에는 유명한 키케로가 총독으로 지낼만큼 로마의 중요한 도시이자 상당히 큰 문화도시 였다.
소아시아의 동남 길리기아의 수도이며 바울이 태어난 고향이다(행9:11).
바울신학-바울의 성장 참고. 다소에는 바울의 생가로 알려진 장소와 '바울의 우물'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다. 그러나 이곳이 바울의 생가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다소에서(행 11:19-26)
2천년 전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상 길리기아에 속해 있던 다소는 지리적으로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중계 무역도시 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무역도시가 그랬듯이,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다소 역시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BC 41년, 동방의 통치자였던 로마제국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를 불러 그 해 겨울을 함께 동거한 곳이 다소였을 정도로 다소는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자연히 다소 사람들은 그곳 출신이라는 것 자체를 긍지롭게 여겼습니다. 이처럼 교통과 무역과 학문이 흥왕하던 바로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출생하였습니다. 그가 유대인이면서도 남다른 세계관과 높은 학식을 겸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생지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역시 다소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다소는 전혀 다릅니다. 대형선박, 비행기, 자동차가 교통의 주종을 이루는 오늘날의 다소는 입지조건 상, 옛날의 영화를 이미 오래 전에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낡고 퇴락한 도시의 모습은 인간역사의 무상함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곳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했던 위대한 사도 바울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5백년 동안 회교의 지배하에 있는 다소에서 바울은 전혀 무명의 이방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가지의 한 중심에는 옛 성문의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 그 문의 이름은 바울의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클레오파트라의 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옛날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다소에 온 클레오파트라가 그 문을 통해 다소에 입성한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물론 바울의 문이 클레오파트라의 문으로 개명된 것은 그 땅을 정복한 회교도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위대한 바울은 그의 고향에서, 한낱 자기욕망과 욕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한 부도덕한 여인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회교국인 터키의 다소에서 바울은, 그만큼 관심 밖의 존재입니다.
수소문 끝에 바울의 생가였던 곳으로 알려진 장소를 찾아가자, 우물과 집터만 남아있는 그곳에는 바울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조그마한 동판과 아주 서툰 솜씨로 그려진, 역시 자그마한 바울의 초상화 동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터키의 관광당국이 세운 것으로 그 크기와 내용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황량한 현장에 섰을 때, 갑자기 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바울이 그토록 전하려고 애썼던 '영원'이 고스란히 제 가슴에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영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영원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을 뛰어넘을 때에만 영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울의 생가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그곳에 거대한 기념관이나 웅장한 예배당이 세워져 있었더라면,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하려 했던 영원은 오히려 가려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 없기에, 바울의 외침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거대한 북소리처럼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바울의 생가 터에서 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두 번째 이유는, 젊디 젊은 나이에 바로 그곳에서 오래도록 칩거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오직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만 일관했던 바울의 심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일찍이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미래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려는 포부를 실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당대 유대교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제자가 되었던 바울은, 유대교 내에서 촉망 받는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그는 유대교가 말살하려고 했던 기독교의 핍박에 앞장섰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연행해오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무려 230Km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멀다 않고 찾아가던 바울은, 바로 그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부정하던 예수-그분이야말로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메섹에 입성한 열혈 청년 바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한 진리의 실체를 전해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그분이 길리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예전의 자기처럼 전혀 알지 못해 그릇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전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바울을 배신자로 간주한 다메섹의 유대교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신하려 했지만, 그나마 용이치 않았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성문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침 같은 기독교인들이 한밤중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 아래로 달아 내려주었기에, 그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길로 아라비아의 광야로 향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광야에서 3년 동안이나, 그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영성 훈련을 행하였습니다. 그 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과 사귀면서 함께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년 전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가, 이젠 주님의 사람이 되어 되돌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력을 아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그의 개종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한 위장전술로 간주했습니다. 그때 그의 회심이 참된 것임을 보증해 준 사람이 바나바 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인들 역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한 그곳 믿음의 형제들이 젊은 바울을 설득하여 그를, 다른 곳도 아닌 그의 고향 다소로 돌려보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보기에 바울의 고향 다소가 아니고는, 바울의 생명이 보장될 곳이 달리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주님을 전하는 바울은, 유대교인들이 반드시 제거하려는 유대교의 공적 제1호임을 믿음의 형제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큰 지도자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떠났던 고향 다소로 바울이 되돌아 왔을 때, 바울은 이미 유대교와는 절연한 사람이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건만, 그때까지 주님을 위해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메섹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그의 뜻과 계획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고향에서 뚜렷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향으로 귀향한 그는 실패자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나긴 날들을 보내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길고 긴 날들이었는가 하면, 한두 달 혹은 1-2년도 아닌, 무려 13년에 걸친 세월이었습니다.
그 13년 동안 아무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도무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대교와 절연한 그를 고향의 유대교인들 역시 배신자로 간주함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지 같은 고향사람이기에 죽이려 하지만 않을 뿐이었습니다. 마땅히 할 만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13년이나 흘렀습니다. 13년이라면 참으로 장구한 세월입니다. 특히 젊은이에겐, 그것도 타인으로부터 인생의 실패자로 간주되는 젊은이에겐, 13년이란 참혹하게 긴 세월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새날을 맞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13년 동안 결코 절망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인생 실패자로 간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위대한 사도가 될 리도 없었겠지만, 그 13년이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삶을 포기해버렸거나 아니면 폐인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고향의 모든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일없이 귀향한 자신을 가리켜 인생 실패자라 비웃는다 한들, 주님께서 지금 자신을 새로이 빗어주고 계심을 말입니다. 자기영혼의 불순물을 주님께서 제해주시고 정금처럼 정제해주시면서, 매일매일 당신의 뜻을 자신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에 대한 그 한결같은 믿음으로, 그 뜨거운 사랑으로, 바울은 13년에 걸친 그 기나긴 세월을 자기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한 그 눈물겨운 13년의 세월이 없었던들, 그는 결코 우리가 아는 바대로의 원숙한 사도 바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13년을 이겨낸 그의 고향 다소의 집터-바로 그 현장에 섰을 때, 저 역시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한 크리스천으로서 제 눈시울은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주님에 대한 바울의 한결같은 믿음과 뜨거운 사랑은 헛됨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2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1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3년째가 되던 해 어느 날, 뜻밖에도 안디옥교회의 목회자 바나바가 바울, 아니 여전히 젊은 사울을 찾아왔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한번 들러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안디옥교회의 공동 목회자로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려 13년만에 처음으로 받아보는 공식적인 제의였습니다. 그때까지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목회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의 책임자인 바나바가 머나먼 다소까지 찾아와 바울에게 직접 요청한 것이고 보면, 그것은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처럼 믿었던 주님,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께서, 바나바를 도구 삼아 친히 바울에게 내미신 주님의 손길이었습니다. 13년에 걸친 낙향 기간을 통해 바울이 주님께서 신뢰하실 만 한 도구로 성숙해졌을 때, 주님께서 바나바를 보내시사 바울을 직접 안디옥으로 불러내신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조금도 지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곧 바나바를, 아니 주님을 따라 안디옥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는 즉시 바나바와 함께 힘을 모아 1년 동안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힘써 가르쳤습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안디옥교회는 교회역사상 최초의, 이방인을 위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님께서 이방인을 위해 특별히 선택하신 주님의 도구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방인을 위해 친히 세우신 안디옥교회에서, 역시 주님께서 친히 이방인을 위해 준비하신 주님의 도구인 바울이, 주님께서 친히 작정하신 때에 이르러, 주님께서 구원하신 이방인들에게 신명을 다 바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바울의 위대한 신앙 승리 였습니다. 13년에 걸친 낙향의 기간을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치 못했던들 결코 있을 수 없는 바울의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바울의 신앙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오묘하신 섭리였습니다. 주님께서 13년간이나 다소에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그를 새롭게 빚어주신 결과가, 안디옥교회 목회자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다소에서 안디옥 혹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발 2천 미터의, 험하디 험한 아마노스 산을 넘어야만 합니다. 일찍이 바울은 크나큰 자기 웅지를 품고, 예루살렘으로 유학하기 위해 그 산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뒤 도리어 고향 다소로 낙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산을 거꾸로 되넘어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로 향하기 위해, 그는 다시 그 산을 넘어갔습니다.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똑 같은 사람이 똑 같은 산을 넘었지만, 그러나 그 행보의 의미는 모두 달랐습니다.
약 20년 전,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려 예루살렘 유학을 위해 그 산을 넘을 때, 청운의 꿈에 부푼 청년 바울의 발걸음은 보무도 당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자기신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인생행보는 오히려 진리와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 어긋난 행보로 그가 열심을 다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고작 진리를 짓밟고 핍박하는 그릇된 삶이었을 뿐입니다. 13년 전 고향으로 귀향키 위해 그 산을 거꾸로 되넘어올 때, 젊디 젊은 나이에 텅 빈손으로 낙향하는 것 이외의 대안을 갖지 못한 그의 발걸음은 마치 실패자의 행보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손에 의해 주님의 도구로 더욱 성숙해지기 위한 주님의 훈련 속으로 진입하는, 역사적인 대 행군이었습니다. 고향에서의 13년에 걸친 칩거 끝에 다시 그 산을 넘는 바울의 발걸음은, 그것이 예루살렘도 아닌 안디옥의 조그마한 교회의 부름으로 인한 것이었기에, 13년만의 새 출발치고는 보잘 것 없고 어줍잖은 행보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보야말로 세계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는, 위대한 제1보였습니다.
이렇듯 아마노스 산을 넘는 바울 한 사람의 발걸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보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이란 산을 넘는 자란 관점에서 바울과 동일합니다.
사람 중에는 한번도 넘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산을 넘는 자도 있을 수 있고, 이미 넘었던 산을 거꾸로 되넘어오는 자도, 바로 그 산을 다시 한번 더 넘는 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산을 넘는 자도 있을 것이며, 마치 실패자처럼 무거운 발길로 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넘는 자도, 반대로 무산된 자신의 꿈을 접고 낙향키 위해 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산을 넘는 사람들의 모양과 나이, 신분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산을 넘는 사람들의 행보가 외형적으로 어떠하든 상관없이 주님과 동행할 때에만, 그의 행보가 참답고 영원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당당한 발걸음으로 태산을 넘는다 한들 그릇된 자기신념과 욕망을 따라 나선 행보라면, 보나마나 그 인생의 최후 목표지점은 공동묘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대한 비석을 세우고 봉분을 산처럼 높이 쌓는다 할지언정 무덤의 본질은 죽음 이상일 수가 없기에, 그 죽음의 무덤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인생의 산을 넘는 사람은 인간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실패자와 같은 모습으로 인생의 산을 거꾸로 되넘어오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행보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의 행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인생행보는 지금 주님 안에서 주님에 의해 바르게 교정되어지고, 또 성숙해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인생의 산 축에 끼일 수조차도 없을 정도로 조그맣고 볼품없는 언덕을 넘을지언정 그의 발걸음이 주님을 좇고 있다면, 그 발걸음은 인류역사의 한 부분을 반드시 새롭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의 발걸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고 계시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처해 계십니까? 자신 있게 넘어갔던 인생의 산을 거꾸로 되넘어오고 있습니까? 하는 일마다 무산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마저 없습니까? 다소의 바울처럼, 칩거와도 같은 무거운 세월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사람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한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셨던 그분의 사랑을 말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당신의 손으로 지금 나를 새로이 빚어주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그분과 함께 인생의 산을 넘어 가십시다. 그분과 함께라면, 아무리 기나긴 다소의 칩거라 할지라도 반드시 자기성숙의 은혜로 승화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행보라면, 그 어떤 아마노스 산도 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 인생의 다소로, 그리고 아마노스로 나를 부르신 분이 주님이시오, 그분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바나바가, 아니 그분의 손길이 벌써 내 인생을 재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과 함께 동행하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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