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선교여행
그후 바울은 남부 갈라티아(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재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가려 했지만, 바울은 그가 첫번째 여행에서 실패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이를 거절했다. 바르나바와 마르코는 키프로스로 갔다. [사도행전]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나머지 기록들은 오로지 바울만 집중되어 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인 실라(로마식 이름은 실바누스)를 대동했다. 그들은 소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갈라디아로 갔다. 리스트라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팀에 맞아들였다. 디모데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은 개연성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선교활동이 주로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영향력있는 중심지역에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그때문에 그는 아시아 속주의 수도이자 에게 해안의 항구도시인 에페소스로 갔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성령에 의해'(아마도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예언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표현일 것임) 방해를 받았다. 그는 북부 비티니아 지방의 큰 도시로 관심을 돌렸다. 북부 갈라디아의 이방인 교회들은 그 사이에 이미 창설되어 있었던 것 같다([갈리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들 교회에 보낸 것). 그의 계획은 다시 한번 좌절된 셈이다. 그래서 그는 북서쪽에 있는 트로아스로 갔다. 그곳에서 방문을 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뱃길로 마케도니아로 갔다. 그는 필립피(필립비), 데살로니가(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 베레아에 교회를 설립했다. 필립비는 그리스를 관통하는 주요도로였던 비아 에냐티아에 있는 로마 식민지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방인 개종자들의 무리를 얻었고, 그들은 바울 기부금을 바쳤다. [사도행전]은 바울과 실라가 필립비에서 감옥에 갇혔으나 로마 시민권을 제시하여 풀려났다고 전한다. 데살로니가와 베레아에서는 바울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는 아테네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바울은 아레오파고 광장에서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후 코린트(고린도)로 갔으며,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아레오파고 연설은 철학적으로 훈련받은 청중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바울은 단 하나의 교회도 설립하지 못했다.
그당시 일어난 사건들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이 최초로 씌어진 바울의 서신일 것이다. 이 서신은 실라와 디모데가 코린트에서 바울과 합류한 직후에 씌어졌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서신에서 그는 이곳에 새로 세워진 교회가 그리스도를 황제의 경쟁자로 선포해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데 대해 우려를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서신으로부터 우리는 바울이 이방인 청중에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살아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도록" 가르쳤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도록"(Ⅰ 데살 1:9~10)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선교를 위해 행한 설교의 훌륭한 실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디모데는 바울 개종자들이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우려한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에 접한 바울은 심판을 위해 그리스도가 올(재림할) 날은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그에게 속한 사람으로 선언되고 영원한 왕국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구원받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를 보완하기 위해 그 직후에 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가 바울로 의해 직접 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것에는 재림에 앞서 일어날 사건들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불행하게도 이 상세한 묘사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패한 직후 코린트에 도착했을 때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코린트에서 그는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라는 유대인 부부를 만났다. 바울처럼 천막을 만들었던 이 부부는 바울의 일평생 지기가 되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로마를 떠나 코린트에 왔다. 그때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한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이 반포된 직후였다. 그들은 이미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 같다. 거대한 교역 중심지인 코린트에서 바울은 마침내 장기적인 교역 활동을 펼칠 수 있었으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당시 바울이 갈리오 총독 앞에 끌려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바울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확인하는 데 중요하다. 델포이에서 발굴된 한 비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AD 51년에 공직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바울은 AD 50년에 코린트에 도착했던 것 같다. 바울이 코린트를 떠날 때, 아퀼라와 브리스킬라가 에페소스까지 그와 동행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 뱃길로 카이사리아(지금의 카이세리)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안티오크로 갔다.
6. Third missionary journey. 제3차 선교여행
이때까지 바울은 이미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교회를 설립한 상태였다. 그 중심은 코린트였고, 이미 코린트만큼 중요한 에페소스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내부강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그는 육로를 거쳐 에페소스로 갔다. 에페소스는 그후 3년 동안 바울의 활동기지가 되었다. [사도행전]은 별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이 기간 동안 콜로사이(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리쿠스 골짜기의 라오디케아(라오디게이아)에 교회를 설립했음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은 에페소스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 집단이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아마도 그곳에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에페소스에서 야생동물들과 싸웠고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커다란 재난에 직면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에 바울은 가장 중요한 서신들을 집필했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이 매우 중대한 난제에 봉착했음을 시사한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바울은 이 서신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비도덕적인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한 편지를 이미 보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바울은 광범위한 문제와 대결하고 있다. 서로 경쟁하는 집단들은 서로 다른 교사들(베드로, 아폴로, 바울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근친상간이 횡행하는데도 아무런 비난도 가해지지 않았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음란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결혼과 이혼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방계 그리스도교도들이 먹어도 좋은 음식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양심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성만찬(주의 만찬)에서 정도를 벗어난 행동이 버젓이 행해졌다. 이 문제들을 다루면서 바울은 자신이 결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성만찬 양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성령의 선물들을 설명하는 부분에는 유명한 사랑의 장(Ⅰ 고린 13)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성령의 선물을 설명하면서 방언으로 말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고 있다. 부활에 관한 긴 장(Ⅰ 고린 15)을 보면, 그리스도교도의 삶이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 이미 참여한 삶임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재림이 임박했고, 영원한 생명은 이 사건 이후에 완전히 경험되리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린트 교회에서는 새로운 분란들이 일어났다. 다른 교회로부터 침투해 들어온 사람들이 바울의 권위를 훼손시키고자 했다. 그는 코린트로 달려갔으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에페소스로 돌아와 신랄한 편지를 썼다. 아마도 이 편지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0~13장에 그 일부가 보존되어 있는 듯하다. 그는 디도가 이 편지를 들고 에페소스를 떠난 직후 편지 쓴 것을 후회했다. 바울은 트로아스에서 선교활동을 벌일 생각이었지만, 코린트 교회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귀환길의 디도를 만날 희망을 품고 마케도니아로 갔다. 디도는 바울의 신랄한 편지가 소정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크게 안도한 바울은 화해라는 주제로 가득 차 있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1~9장으로 추정)를 썼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Ⅱ 고린 5:19). 또한 바울은 인간이 새로워져 영광의 상태로 변화된다는 견지에서 부활을 다시 한번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또 하나의 주제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의연금이다. 이 선물을 통해 바울은 유대계 교회와 이방계 교회들의 일치를 상징하고자 했다. 이 계획의 배후에는 이방인 개종자들을 유대화하고 당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면화된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갈라디아의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시도를 다루고 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자신의 교리(信仰義認論)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바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교리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전적으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코린트로 갔다.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며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바울이 이 편지를 집필한 표면적인 이유는 예루살렘에 의연금을 보낸 후 극서(極西:스페인을 언급할 때 쓴 표현) 지방을 복음화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이방인 개종자들의 유대화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줄 세력을 구해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하느님의 계획은 보편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신앙을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다. 율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 율법은 인간의 죄의 본성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사람들을 의롭게 만드는 데는 무력하다. 바울의 적들은 만일 율법이 없다면 이방인 개종자들은 코린트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방종한 행동을 하기 쉬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같은 우려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성령의 성화(聖化) 능력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다고 응답했다. 그다음 바울의 적들은 바울의 주장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이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에 따르지 않았지만 이방인 선교의 성공을 통해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의 구원을 찾도록 자극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온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될 것"(로마 11:26)이다. 그후 우주는 자신의 목표를 완수하게 될 것이며, 최후의 변모가 시작될 것이다.
7. Arrest and imprisonment. 체포와 구금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화를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냈고, 심지어는 예루살렘 교회가 의연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이 2가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던 것 같다. [사도행전]은 이방인 교회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에 동행했다고 전하지만 의연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의연금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이 없었음을 루가가 전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가정할 때 가장 잘 설명된다. 만일 그렇다면, 의연금의 전달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상징하려는 바울의 희망은 좌절된 셈이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에 있는 성전의 안뜰로 이방인 교회의 파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거짓 고소를 당해 체포된다.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지만 이때문에 바울은 폭도들로부터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 덕분에 좋은 대접을 받았다. 바울의 생명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꾸며졌을 때, 그는 로마 군대의 사령부가 있던 카이사리아로 압송되었다. 총독 펠릭스는 유대교 당국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다. 2년 후 펠릭스의 후임자인 페스투스(페스도)는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바울은 예루살렘행을 거부하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다.
로마를 향한 여행은 늦가을에 시작되었으나 도중에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여행자들은 몰타에서 3개월 동안 발이 묶였다. 그들은 AD 60년 봄 로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바울은 재판을 기다리며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이 대목에서 끝난다. 바울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져 있는 셈이다. 목회서신들이 바울의 진짜 서신으로 인정되었을 때만 해도 목회서신들의 증언에 따라 바울이 무죄방면되어 그리스와 소아시아, 심지어 크레타에서 계속 활동을 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활동은 바울이 2번째로 체포되어 로마로 돌아가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가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회서신들은 바울의 이름을 도용한 서신들로 간주되고 있으므로 바울이 무죄방면되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바울은 감옥에 있는 동안 몇 편의 서신을 집필했다. 이 서신들은 옛날 바울이 에페소스에 갇혀 있을 때 쓴 것일 수도 있고, 카이사리아에 갇혀 있을 때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 씌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옥중서신들 가운데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일반적으로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의 진짜 서신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골로새의 한 그리스도교도인 필레몬으로부터 도망친 노예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서 그를 개종시켜 필레몬에게 되돌려보냈다. 그는 "이제부터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교우로서"(필레 1:16) 필레몬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미묘한 상황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이 서신은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주옥과도 같은 작품이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필립비 그리스도인들의 관대성을 담담하게 인정해주고 있다.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골로새에서 거짓 교사들이 일으킨 분란들을 다루고 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유대교에서 벗어난 비정통적인 종파로 추측된다. 이에 대응해 바울은 하느님의 온전한 구원 계획을 구현한 하느님의 참된 지혜로서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방인들의 특권을 웅변조로, 어쩌면 지나치게 수사학적으로 진술한다.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지위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들었다"(에페 2:14)는 것이다.
바울의 영원한 금자탑은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회이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방인 개종자들을 유대화하려는 파벌에 맞선 그의 단호한 태도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내부의 소종파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한 것은 그 누구보다도 바울의 덕분이라는 주장은 옳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은 사후에도 지속되었다.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집필되었다. 이 서신들은 1세기말경에 씌어진 것 같다. 이와 동시에 현존하는 바울의 서신들이 수집되었다. 그것은 교회 전체에 그 서신들을 회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서신들은 곧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의 준거가 되었다. 특히 속죄(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인류와 하느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가르침)에 관한 이론들은 언제나 바울의 사상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절반을 이루는 서방(라틴) 진영에서 바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을 통해 교회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한 펠라기우스 논쟁은 바울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문구에 대한 해석에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논증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예정사상에 논증의 근거를 두었다. 그는 바울의 예정사상이 우주적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예정된 계획을 언급한 것이며 자유의지의 행사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는데 이것은 정확한 해석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도 바울 큰 빚을 졌다. 마르틴 루터는 의인론(義認論)에 몰두했다. 그는 신앙과 공로를 구별했으며 이를 거점으로 중세 후기 교회를 공격했다. 장 칼뱅은 바울로부터 교회를 선민들의 공동체로 보는 개념을 끌어냈고 예정사상을 활용했다. 그는 이에 약간의 추론을 덧붙였는데, 신자들만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을 통해 종교개혁과 그 유산인 근대 개신교의 루터파 교회와 칼뱅파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동방정교회에서는 서방교회만큼 중시된 적이 없다.
바울로 대한 현대 신학자들의 연구는 이같은 논쟁들을 넘어서서 바울을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연관시켜 살펴보려고 한다. 현대 신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바울 사상의 기초는 그당시의 유대교 개념들과 연관시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칼뱅의 일부 후계자들이 표방했던 비타협적인 예정론은 바울의 의도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된 해석으로 간주되었다. 바울의 사상이 그리스 사상과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거부되고 있다. 오늘날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으로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형편이다. 회심 경험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 있는 우주적인 주(主)이며, 하느님 나라의 대행자요 인도자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V. Bibliography 참고문헌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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