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벗과의 동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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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8-03-12 오후 8:22:56 | |
관객 200만 넘긴 놀라운 다큐영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영화에는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의 아름다운 풍광이 가득 담겨 있다. 매우 익숙한 풍경이지만 또 어찌 보면 생경한 별천지 같기도 하다. 그곳은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에 입력된 고향의 풍경이나 실제 생활이라면 1주일 버티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곳은 노인과 노파와 노우(老牛)의 세계다. 노년을 위한 흙과 느림의 세계다. 소란과 싫증, 번민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 아프면서도 영감, 할망 불 떼고 겨울 나라고 저리 나무를 많이 해놓고 죽었다."
이삼순 할머니의 말이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관객들은 소의 희생을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소의 무덤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 소와 소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준다. 죽도록 충성하고 닳아서 죽은 늙은 소가 작은 고난에도 별별 소리를 다 뱉는 우리를 일깨운다. 일깨움의 외침은 없지만 말없는 커다란 눈망울이 도리어 아프다.
비슷한 개념으로 동물의 수명이 호흡수나 심장박동 수와 관련있다는 이론도 있다. 숨을 빨리 쉬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작은 동물은 수명이 짧고, 그 반대인 큰 동물은 오래 산다. 모든 포유류는 평생 2억 번의 호흡과 8억 번의 심장 박동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굼뜨고 게으른 필자는 오래 살 가능성이 제법 높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눅24:36)’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려 하신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지.
두 마리 소가 나란히 선 모습은 멀리서 보면 함께 멍에를 진 듯 보이지만 실상 키 작은 송아지는 멍에에 어깨가 닿지 않아 힘들 것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신 예수께서 특유의 비유법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주의 옆에 나란히 서서 그를 보고 배우라. 보조를 맞춰 걸으라. 그를 앞서려고 하지도 말고, 한눈 팔며 뒤처지지도 말라.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행하며 이별도 없을 그, 신실하고 오랜 벗을 기뻐한다.
은바리애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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