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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벗과의 동행-워낭소리(Old Partner)

은바리라이프 2009. 8. 18. 18:54

오래된 벗과의 동행

 

 

 

 

 

등록일: 2008-03-12 오후 8:22:56

 

관객 200만 넘긴 놀라운 다큐영화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영화, 순제작비 1억원짜리 작은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관객 200만을 넘어 300만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 싶다. 수십억 원씩 제작비를 투자하면서도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실적을 거둔 한국의 메이저 영화제작사 대표들의 표정이 문득 궁금해진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영화에는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의 아름다운 풍광이 가득 담겨 있다. 매우 익숙한 풍경이지만 또 어찌 보면 생경한 별천지 같기도 하다. 그곳은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에 입력된 고향의 풍경이나 실제 생활이라면 1주일 버티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곳은 노인과 노파와 노우(老牛)의 세계다.

노년을 위한 흙과 느림의 세계다. 소란과 싫증, 번민은 잘 보이지 않는다.

노인과 소의 동행
노인과 소는 오랜 친구 사이다. 무려 40년 가까운 지기(知己)다. 물론 둘은 처음부터 친구는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다보니 주종(主從)의 관계가 희미해지고 부지중에 친구가 됐다. 뼈만 앙상한 소는 평생을 노인의 손과 발이 되어 일한다. 노인은 소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매일 소를 끌고 나간다. 소가 죽으면 따라서 죽겠다는 노인의 말은 다름 아닌 소에 대한 우정이며 사랑이다.


읍내 장에서 술을 마시고 달구지에서 잠든 노인은 소를 믿으므로 근심이 없다. 자동차도 알아서 피해 다니는 소의 연륜을 믿기 때문이다. 역시 눈을 뜨니 집이다. 햇볕에 취하고 농사일에 지치면 달구지 위에서 졸고, 짐이 많으면 부담을 나누어 지고 함께 걷는다.


오랜 절친들에게 기어이 이별의 날은 온다. 늙은 소는 기력이 다하여 일어나질 못한다. 노인은 소의 코뚜레를 풀고 워낭을 떼어준다. 소의 평생동안 몸에 붙어있던, 몸의 일부같은 기구들이다. 소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세상 끝날의 징조가 이처럼 분명하지만 소는 차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소는 곧 눈을 감는다.

 

"그리 아프면서도 영감, 할망 불 떼고 겨울 나라고 저리 나무를 많이 해놓고 죽었다."

 

이삼순 할머니의 말이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관객들은 소의 희생을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소의 무덤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 소와 소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준다.

죽도록 충성하고 닳아서 죽은 늙은 소가 작은 고난에도 별별 소리를 다 뱉는 우리를 일깨운다.

일깨움의 외침은 없지만 말없는 커다란 눈망울이 도리어 아프다.

평강을 주려 하신 뜻
영화 속 소의 나이가 경이롭다. 보통 소의 수명이 15년이니 40세라면 2배 이상을 산 셈이다. 사람으로 치면 거의 200세다. 막스 루브너는 삶의 속도가 수명을 결정한다고 했다. 부지런한 생쥐가 게으른 코끼리보다 일찍 생이 마모된다는 이론이다. 포유류만 놓고 보면 그럴 듯하다.

 

비슷한 개념으로 동물의 수명이 호흡수나 심장박동 수와 관련있다는 이론도 있다. 숨을 빨리 쉬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작은 동물은 수명이 짧고, 그 반대인 큰 동물은 오래 산다. 모든 포유류는 평생 2억 번의 호흡과 8억 번의 심장 박동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굼뜨고 게으른 필자는 오래 살 가능성이 제법 높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눅24:36)’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려 하신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지.

신실하고 오랜 벗을 기뻐한다
화창한 봄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 그때 들녘에는 농부가 멍에 지운 암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곁에는 어미를 따라온 송아지가 이리저리 뛰놀기도 하고, 어미가 쉴 때는 곁에 다가와 젖을 빨기도 했다. 지난 겨울에 태어난 송아지는 처음 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울 뿐이었다.


 

두 마리 소가 나란히 선 모습은 멀리서 보면 함께 멍에를 진 듯 보이지만 실상 키 작은 송아지는 멍에에 어깨가 닿지 않아 힘들 것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신 예수께서 특유의 비유법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고난을 모두 감당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의 옆에 바짝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주의 옆에 나란히 서서 그를 보고 배우라. 보조를 맞춰 걸으라.

그를 앞서려고 하지도 말고, 한눈 팔며 뒤처지지도 말라.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행하며 이별도 없을 그, 신실하고 오랜 벗을 기뻐한다.

 

은바리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