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모세오경

타락이야기1 : 선악과 이야기

은바리라이프 2009. 6. 7. 13:30

타락이야기1 : 선악과 이야기

안정현 2008-07-03 09:02:34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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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으로 '이야기'라는 형식을 선택했다.

어떤 사상을 전파하는 데 있어 가장 탁월한 방법은 이야기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싸움에서 보수가 이토록 고전하는 이유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사상과 가치를 담은 이야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패배하고 있다.  

8-90년대 대학가를 휩쓸었던 '태백산맥'류의 글들이 지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세대들의 정치색이 옅은 이유 역시 2000년대 이후 정치색이 옅은 김훈씨의 글들을 많이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세는 광야에서 출애굽한 자신의 백성들을 상대로 글을 썼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의식은 '왜 우리는 이집트에서 그런 고통을 겪었는가?'이다.

왜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세상 가운데 죄와 악이 존재하는가?

우리가 들어가게 될 약속의 땅에서는 어떻게 하면 그러한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가 모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이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타락이야기들이다.

선악과 이야기는 타락이야기의 첫 이야기로서 전체 타락 이야기의 서론의 구실을 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늘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담고 있다.  

특수한 이야기이면서 인류의 보편적 이야기로서 기술되었다.

선악과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담'은 고유명사로 최초의 인간의 이름이자 보통명사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즉 선악과 이야기는 태초에 있었던 한번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이러하다'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태초에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다.

이 두가지 나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관한 많은 질문이 있다.

아마도 이 두가지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학개념 중에 '죄'라는 개념이 있다.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불리는 단어이다. 성경에는 주로 '죄'로 번역했지만 다른 그리스 문헌들에서는 '한계'로 번역이 된다.

고대 사람들의 관념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인간이 가진 많은 한계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두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죽음이라는 육체적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불사를 추구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스로 영생에 이를 수는 없다. 생명나무라는 외부의 도움에 의해서만 영원한 생명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그 생명나무가 된다고 말한다.

두번째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데 있어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 영적, 도덕적 한계라고 한다. 이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내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와 악을 행하고자 하는 내가 있다'는 의미도 있고, '선한 의도로 어떤 일을 시도했으나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는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사에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선한 의도로 어떤 일을 추진하지만 늘 악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선과 악을 분명히 알 수 없는 존재라는 통찰을 선각자들이 전수해준 것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이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하마르티아(죄: 한계)들이 극복되어진다는 의미이다.

 

또다른 측면에서 선악과는 '하나님의 통치권, 주권'을 의미한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도자의 최종적인 통치권은 '재판하는 권위'이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사법부가 하듯, 인류 역사상 최초의 지도자들 역시 재판관들이었고, 최종적인 주권 역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재판권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인간 외부에 있었고, 세상의 중심에 있었던 그 재판하는 권위 자체를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교만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세는 세상에 죄와 악이 가득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의 선과 악을 완전히 판단하는 주권자가 되고자 한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모세는 이집트의 지도층 몇몇의 부패나 타락, 강압적 권력의 탓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인간들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부터 죄가 출발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세의 이야기가 탁월한 이유는 손쉽게 우리편과 적을 구분하고, 모든 문제를 적에게 뒤집어 씌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 이야기 방식으로는 가나안 땅에서의 대안적인 삶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저들과 동일한 죄를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지하고 새로운 대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대안이다.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만을 요구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만드는 것을 보고 싶어하셨다.  

이 시대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소명 역시 예배당에 모여 우리들끼리 행복하고, 죽어서 갈 천국을 고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땅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 통일을 준비하고, 세계선교의 밑거름이 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