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대선지서

겔 16장 은혜를 잊어버린 자가 받는 심판 (찬 417, 418)

은바리라이프 2009. 3. 4. 18:49

겔 16장 은혜를 잊어버린 자가 받는 심판 (찬 417,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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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겔 16장과 23장은 성경 중에서 가장 그 표현에 있어서 성적인 이미지들과 거의 외설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노골적인 묘사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거의 읽혀지지 않고 설교되지 않을 본문에 속한다. 아마 정결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제사장 출신인 에스겔에게 있어서(4:14) 이런 말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자기 입으로 전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었겠는가?

2. 당시 에스겔과 함께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지배적인 생각은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즉,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그렇지 않은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이 자기들을 저버리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이 바로 16장, 23장, 그리고 20장이다.

3. 16장에 가장 많이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는 매춘, 음행, 창녀를 의미하는 ‘자나’라는 단어이다. 무려 이 한 장에 21번이나 나온다. 즉, 하나님의 메시지는 유다가 창녀와 같이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떠나 음행하였기 때문에 이런 심판을 받는 것은 결코 억울하거나 부당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며 오히려 그들의 행위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4.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먼저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14). 이스라엘의 태생 자체가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 민족들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3).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이 태어날 때의 모습은 당연히 있어야 할 산과적 조치가 아무 것도 취해지지 않은 채(4), 들판에 피투성이로 발짓하는 모습으로 버려진 것이었다(5). 그들을 건져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를 향하여 ‘너는 피투성이라고 살라’고 두 번이나 명하시므로 살게 된 것이다(6). 그리고는 하나님의 은혜로 잘 자라서 성숙한 처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곱게 기름을 발라서 결혼할 신부로 온갖 좋은 것들로 치장하고 이스라엘을 왕후의 지위로 올리셨다(8~13). 이렇게 이스라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신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화려함을 입어 하나님의 신부가 된 것이다.

5.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입은 모든 화려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섬기면서 음행을 자행하였다(15~22). 이것은 종교적 매춘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모든 은혜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다(22). 또 이들은 정치적 음행도 저질렀다(23~34). 애굽과 앗수르와 그리고 바벨론과 더불어 그들은 음행을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자기들을 돌보아줄 보호자를 찾고 그들에게 의지한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과 절교를 선언하시는 것이다(35~43). 이스라엘이 지금 당하는 고난은 부당하거나 억울한 것이 아니라 합당한 것이다!

6. 이제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유다의 태생이 이방민족과 다르지 않다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의 자매들이 음행한 연고로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북왕국)이며 아브라함 때 멸망한 도시 소돔이라는 것이다(46). 아니 유대의 행위는 그 자매들보다도 더 부패하였다고 말씀하신다(47).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인 선언이었겠는가? 소돔이 유대인의 자매라니 말이다.

7.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믿어지지 않는 회복의 메시지로 마치고 있다(53~6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소돔과 사마리아(이스라엘)도 함께 회복시키실 것이다(53~55).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들의 특수한 지위를 늘 주장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인 것이다. 또 이 회복은 부끄러운 회복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61~63). 왜냐하면 그때에 자기들이 행했던 그 일들을 그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는 심판이 부당하다고 여겼었지만, 결국 자기들이 얻게 된 회복과 구원이야말로 부당한(자기들이 받을만한 자격이 없이 받게 되는 은혜라는 의미로)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8. 적어도 우리가 이 본문에서 생각해야 하는 교훈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누리는 모든 명성과 받은 것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14).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많이 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많이 찾으시고 많이 요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가 아니다. 그러나 이 일에서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예와 명성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아름다움으로 입히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둘째는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기억하라(22, 43, 60, 61, 63)는 단어가 이 본문에 5번 등장한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22). 이것이 이스라엘의 타락의 원인이다. 그들은 소시적 은혜를 기억하지 않았다(22, 43).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살라. 은혜가 없이 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인정할 수 있겠는가?

9. 이 무서운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대하면서 빌리 그래함이 했던 말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님은 미국을 심판하시든지, 소돔에 사과하시든지 둘 중 하나를 하셔야 한다.” 당신은 이 말에 동의하는가? 이것이 미국 뿐이겠는가? 한국은 어떤가? 그리고 교회는 어떤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하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자신을 정직히 보되,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살게 하사,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신 것임을 알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