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성탄 특강 제 2 강 (2007. 12. 9. 주일, by 최아브라함 목자)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II) (가정교회의 참된 기쁨)
말씀 / 누가복음 1:24-80 요절 / 누가복음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Merry Christmas! Joyful Christmas!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주일 예배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인터넷 검색포탈에서 ‘세상에서 가장 기쁜일?’이 뭘까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수시 2학기 지원에 바로 합격을 해서, 5학년아들이 학교에서 평균 99.80으로 1등을 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게 되어서, 지각을 하게되어 헐레벌떡 교문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각오하고 있던 선도부 호랑이 선생님이 안보이고 주번인 같은 반 친구가 대신 서 있어서, 어떤 집은 강아지가 태어나서 가장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다 “어머! 축하한다. 얘!” 하며 함께 기뻐해줄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라는 노부부가 노년에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노부부가 아들로 인하여 물론 기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아들이 장차 세상에 소개할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더욱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셉씨와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하게 하게 된 일로 기뻐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사랴와 엘리사벳의 가정, 그리고 마리아가 이룰 가정의 공통점이 뭘까요? 모두 하나님이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내시는데 쓰임 받은 가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난주 예배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가정교회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바라보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정이었고, 특별한 문제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특별한 뜻이 있는 가정이었으며, 인간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가정임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정에서 삶을 시작하고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가정! 너무 너무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행복이 가정에 있습니다. 이 가정에서는 가족 간에는 있는 모습그대로 보여주며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는 Merry Christmas! 도 잘하고, 기쁜 성탄 노래도 잘 부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는 어떠합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많이 의식하고 하나님앞에 사는 것 같은데 가정에서는 어떠합니까? 교회에서나 전철 안에서는 참아야 하는 방귀도 가정에서는 스스럼없이 뿡뿡! 터뜨립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 말씀도 계속해서 ‘가정교회’라는 관점에서 공부하고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비신부 마리아의 성령수태 찬양노래와,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의 기쁨을 통해서 가정교회의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예비 신부 마리아의 가정 결단과 찬양시 -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룰 기뻐하나이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대로 잉태한지 여섯째 달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 천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번에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27절 중 천사의 인사부분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깜짝 놀라서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더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조상 다윗왕의 왕위에 올라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는 왕이 되며 그나라는 무궁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집이란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택한 이스라엘, 오늘로 말하면 전체 성도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는 그동안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중심을 지켜온 남은자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구세주가 자기에게 수태되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약혼한 처녀인 자기에게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너무 놀라서 숨도 멈추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불신의 말을 했습니까? 사가랴는 자신의 인간조건을 바라보며 천사의 말을 불신했다가 그 불신의 말 때문에 10달간 벙어리가 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4절 마리아의 질문을 보겠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질문은 의심하여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서 천사의 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방법을 물은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천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구체적으로 심어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하셔서 수태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친족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이미 여섯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씀앞에 결단하였습니다. 38절 마리아의 대답부분을 보겠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요셉씨와 약혼하여 결혼을 앞두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갈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나사렛의 모든 산천초목이, 길가의 이름모를 풀한포기도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고 산새들의 노래도 자기를 부러워하며 축하해주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아도 저기 저 구름사이에 요셉씨의 믿음직한 얼굴이 떠올라 얼굴에 발갛게 물들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런 행복한 모두 엎어 버리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결단은 사랑하는 요셉씨와 부모형제들, 자기를 아껴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수 없는 수치와 아픔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간음죄로 고소당하여 만천하에 수치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결단후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져서, 두려워서 미친듯이 헤메었습니까? 아닙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천사의 말을 확인하여 믿음을 덧입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마리아가 요셉이나, 학교동창친구나, 평소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선배를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축복을 누린 믿음의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 엘리사벳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임한 이 일은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에게 임한 이 일은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말할수 없이 큰 축복임을 알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찬양하며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비천한 자기 인생을 돌아보신 하나님,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아들을수태하게 하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실로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못하고 괘씸한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셔서 이를 용서하시고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구원과 축복의 언약대로 영원히 성취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긍휼의 약속이 마리아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비신부 마리아의 가정을 위한 결단과 기도, 기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구세주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는데 나를, 우리 가정을 사용하여 주소서. 오, 하나님! 나는 연약하여 이를 감당할 수 없사오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이루지게 하소서. 그 일에 나를 드리오니 사용하여 주소서” 마리아는 이제 요셉이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우리 주님 예수님의 성탄은 이렇게 예비신부 마리아의 결단과 기도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가정은 주님께서 이땅에 오시는데 쓰임 받는 가정입니다. 이땅의 외로운 한 영혼에게 주님께서 임하시고 성탄하시게 하는데 드려지는 가정이 믿음의 가정, 가정교회입니다. 마리아에게 아픔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아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것을 바라 볼때, 칼이 마음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극복하였습니다. 마침내는 요셉도 이 뜻을 받아들였고 둘은 합심하여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고 키워냈습니다. 십자가의 아픔을 지나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나이다” 우리 모두 예비신부 마리아의 가정을 위한 결단과 기도와 기쁨에 동참하는 가정, 이시대 참된 믿음의 가정이 될수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서 예수임이 자라시고 한영혼에게 성탄하시는 역사가 일생토록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2.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은 요한을 키우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공유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가정이었습니다. 23절을 보면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 노릇하다가 벙어리가 되어 오해도 받고 힘들었지만 직무를 다 감당한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잉태함을 깨달은후 5개월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이는 부정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며 하나님앞에서 이 일의 의미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바라본다고 하지만, 나이 늙어서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두 부부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인생을 마감할 나이에 신혼부부처럼 아이 양육의 십자가를 져야하다니! 주실려면 일찍 좀 주시지 이 늙은 나이에 어찌할꼬! 교육비는 어찌 벌꼬! 탄식이 나올 만도 하였습니다. 학부모 모임에 가는 날이면 다른 학부모들도 놀라고, 요한도 이런 말을 할것 같았습니다. “엄마 아빠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야?” 사가랴는 운동회때 요한과 함께 발목 묶어 달리기를 할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저아이가 다 자라기도 전에 우리가 죽으면 누가 키우지? 하는 걱정도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엘리사벳은 남편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어버렸으니 더 걱정이 컸습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할꼬!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어떻게 극복하였을까요? 이때 사가랴는 서판으로 이 임신이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와 능력으로 된 일임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까지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엘리사벳! 천사가 계시한 아들 이름은 요한인데, 그 뜻은 당신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이지 않소. 이 일은 힘들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오. 모든 것을 은혜의 관점에서 보기로 합시다.” 60절에 보면 아들의 이름을 지을때, 사가랴 2세라고 짓자는 친척들 앞에서 엘리사벳이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한데서 엘리사벳은 남편을 통해서 그들 가정에 주신 비전을 영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에게 비전을 주셨고, 아내 엘리사벳은 이를 그들 가정에 두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으로 영접하고 깊이 소화하였습니다. 두 부부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잉태하고 키운다는 것, 특히나 그 아들이 이세상에 오실 구제주의 길을 예비하는 아들로 쓰임받는 아들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비전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 노년 생활을 활기차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앗싸! 믿음의 가정 목자가정에는 은퇴란 말은 없다!” 믿음의 가정은 이처럼 하나님이 뜻두신 한 사람을 키워서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헌신하도록 하는 일에 인생 끝까지 충성하는 가정인줄 배우게 됩니다. 저와 한나 목자가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학생들과 일대일 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주님 보실 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이런 믿음의 가정을 소망하고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사가랴 엘리사벳 가정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귀히 여겨 격려하고 세워주는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결단한 후에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사가랴의 집에 이르러 문안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안하니’는 헬라어로 ‘에스파사토’인데, 그 기본적의미가 ‘껴안다’입니다. 여기에서 파생된 의미가 ‘...를 환영하다’입니다. 즉, 마리아가 알리사벳을 문안했다고 하는 이 인사는 포옹과 문안을 포함하는 매우 열열한 인사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벳은 인생의 선배이고 제사장의 아내입니다. 마리아는 한참 후배로서 시골 아낙네 후보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얼마나 따뜻이 대하며, 존중해주고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41~45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함을 받아 모든 전후 사정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배속의 아들이 메시야의 선구자가 된다고 계시를 받았으므로, 그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가 곧 탄생하실 것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자기 앞에 그 주의 모친이 나타난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리아에게 네가 여자 중에 복이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 부르며 자신이 마리아를 만나고 그 앞에 서게 된 것이 감격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를 듣자 내 복중의 아이가 기쁨으로 뛰놀았다는 사실을 말하며, 마리아가 얼마나 복받은 여인인지, 그 태중의 아이가 얼마나 축복된 귀한 존재인지 일깨워주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믿음의 결단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의 입술에서는 드디어 주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이 터져나오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석 달쯤 엘리사벳 가정에 함께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주의 어머니로 영접했으니 참으로 귀하게 여겨주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기간을 통하여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련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의 가정은 이처럼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아기 예수님의 출산을 능히 감당할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믿음의 가정은 이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에 예민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쓰임받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가정입니다. 저는 지난 3월 동경의 박에스라 박에스더 선교사님 댁에서 하루밤 거하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좁은 집이지만 양들을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과 말씀으로 귀하게 섬기는 가정교회의 참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넓은 집이 아니고 가난한 목자의 집이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는 그 가정의 모습에 양들은 오히려 감동을 받고 마음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자라가는 양들을 귀히여기고 섬기는 가정을 이루어 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 사가랴 엘리사벳 가정은 자녀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로 키우고자 하는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드디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웃과 친족이 듣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전례대로 제8일째 되는 날 온천칙들이 모인가운데 할례를 하고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습니다. 친척중 한사람이 “사가랴 자네가 아들을 얻다니, 정말 축하하네! 자네도 이제 대를 이어갈 수있게 되었네 그려! 여러분! 아이 이름은 당연히 사가랴가 어때요? 헤이 주니어 사가랴! 까꿍!” 친척들은 박수를 치며 ‘주니어 사가랴! 주니어 사가랴!를 연호하며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사벳이 나서 손을 저으며, “안돼요 우리 아이 이름은 요한이라 할 거예요!” 친척들은 “네 친척중에 그런 이름이 없는데, 뭔소리야!”라며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뭘 모르고 그런다고 생각하며 아버지 사가랴의 의사를 물어보았습니다. 몸짓하여 물어본 것을 볼때,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였음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겼습니다. 더 놀란 것은 그 순간 사가랴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짓는자가 자기의 지배권,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은 아이 이름을 주니어 사가랴 라고 하지 않고, 한 마음으로 요한이라 지었습니다. 요한이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두 부부가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은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두 부부는 아이를 자기 집안의 아이, 대를 이어줄 아이로 키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키우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사가 전해준바 하나님의 뜻대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름을 짓는 이 한가지 일에서 그들 부부가 자신들의 가정에 대해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나를 보여줍니다. 이 두 부부는 자기들의 가정은 하나님이 특별한 뜻을 두신 섬기는 가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이 왜 우리로 가정을 이루게 하셨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바로 이런 요한을 키우는 특별한 뜻을 섬기기 위한 가정임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서 이름을 짓고, 이를 위해서 요한을 키우는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믿음의 가정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처럼 이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가정입니다. 한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든 영적인 자녀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존엄한 것은 그 한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인격체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섬기는 가정인 것입니다. 목자가정 믿음의 가정은 이런 가정의 목적과 정체성을 가진 가정입니다. 우리가 이런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그냥 보통의 소시민적인 가정과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일생동안 우리의 가정을 그리스도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키워내는데 충성하는 믿음의 가정들이 될 수있기를 기도합니다.
5.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은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태중의 아이를 키우가면서 그 이름 요한을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 자기 인생에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습니다. 이 아이로 인한 기쁨이 컸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만나고, 바로 그때 그녀는 복중의 아이가 크게 기쁨으로 뛰노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때, 복중의 아이는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으로 뛰논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마리아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습니다. 이는 기뻐 외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자들은 아기에 불과해도 예수님의 성탄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됩니다. 아들이 태어남을 기뻐하는 것이 보통인 시대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를 넘어서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짓고 혀가 풀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찬송한 것을 보면 사가랴는 메시야의 탄생으로 인하여 기쁨이 충만함을 알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하나님을 높아 찬양하였습니다. 또한 조상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시고 원수의 손에서 건지사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아들 요한이 전파할 구주 예수님을 생각할 때 기쁨이 넘쳤습니다. 77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님은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는 용서받고 죄사함 받을 만한 어떤 의로움도 없는데 하나님이 다만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볼때, 인간세상의 깊로 무서운 죄의 세력을 볼때, 정말 구원역사는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마치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해가 돋으면 온세상이 밝아지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가랴는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의 찬송시는 이처럼 자기 아들의 탄생을 통해서 메시야의 탄생을 내다보며 그로 인한 기쁨으로 찬송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가정의 기쁨의 원천은 이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믿음의 가정은 부부간에 서로를 기쁘게 하기보다 먼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가정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 32~34절에서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간 남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가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간 여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시집 장가간 자들에게 올무를 놓기 위함이 아니라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시집․장가가서라도 흐트러짐없이 주를 기쁘시게 섬기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자체가 믿음으로 한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믿음의 가정은 주님을 기쁨의 원천 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가정의 목적으로 삼는 가정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9에서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UBF사역은 켐퍼스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런 성경적인 가정교회를 이루고 한 영혼을 말씀으로 키워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가정으로 이루어가도록 하는 사역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고수해야할 성경이 가르쳐주는 영적유산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마리아가 그렇게도 감격하고 기뻐한 것은 성탄의 예수님이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온인류에게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외에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 철학 사상도 인간의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구원을 줄수 없습니다. 흑음과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하신 우리주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 떡을 떼어주시고 포도주를 따라 주시며 내 살과 피를 영원히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 본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항상 영원토록 항상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유언적 명령대로 항상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형편속에서도 감사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기억할 때 예수님은 항상 우리안에 살아계시며 기쁨의 원천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성탄절은 기쁜 성탄입니다. 우리 모두 성탄을 예비하는 가정이 되어 기쁨이 충만하게 주님을 섬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같이 외쳐보겠습니다. Merry Christmas! Joyful Christmas! Joyful and Merry Christmas!
* 최도영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8 00:4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