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시가서

잠언 제 2장

은바리라이프 2008. 8. 14. 18:32
잠언 제 2장

 

 

=====2: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지혜의 추구와 여호와 경외에서 오는 유익이 조건절의 형태로 9절까지 이어진다.

한편, 본절의 '나'는 의인화된 지혜(1:20-33)가 아니라 본서의 교훈자(1:8) 자신을 가리킨다.

 

만일 - 4절까지의 조건절을 인도하는 말로서 5,9절에 나타나는 약속들의 전제가 된다

특히 이 조건절은 점층적으로 그 내용이 강조되다가 4절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간직하며 - 문장의 강조를 위해 '받으며'와 병행되어 쓰여진 말로 귀중한 보화를 도난당하지 않도록

 금고에 숨겨 간직하듯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기는 것을 가리킨다(7:1;10:14).

=====2: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시90:1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여기서 '기울이며'는 원어상 '곤두 세우다', '주의를 기울이다'란 의미를 가지는 바, 본 구절은 적극적인 관심과 예민한 주의력으로 지혜의 교훈을 경청하는 것을 말한다.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 '구분하는 것', '나누는 것'이란 의미의 어근에서 파생된 '명철'은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신령한 능력으로서의 올바른 판별력을 가리키며(1:2), '두다'는 '집중하여 쏟다', '향하게 하다'란 뜻을 가진다.

=====2:3

소리를 높이며 - 이것의 어근 '나탄'과 '콜'에는 모두 '울부짖다'란 뜻이 내포되어 있는 바, 본 구절은 지혜 추구의 간절한 열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축복과 은사를 받으려는 자는 이처럼 갓난아기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달라고 보채어야 한다(벧전2:2). 한편, 본절에 나타난 피교훈자의 열정은 곧 의인화된 지혜 자체의 모습이기도 하다(1:20, 21).

=====2:4

은을 구하는 것같이 ...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 동의(同意) 반복법을 사용하여 지혜에의 추구를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본절은 1절부터 계속된 조건절의 절정 부분이다. 지혜의 추구를 보배를 찾는 일에, 또 지혜의 가치를 보배의 귀중함에 각각 비유하는 것은 당시 히브리 문학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였다(욥28:1-28). 여기서 '찾는다'란 말은 '살피다', '땅을 파다'란 말들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은 광부가 광산을 파서 금을 캐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간절한 열망으로 지속적으로 지혜를 찾으라는 말이다.

=====2: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 모든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는 목적 혹은 그 것을 추구한 결과에 대한 진술이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갈파한 1:7 내용을 재차 상기케 하는 구절이다. '여호와 경외'는 모든 지식의 근본인 동시에 최고선(最高善), 최고의 가치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의적인 윤리적, 종교적 노력과 열성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사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 원어상의 의미는 '하나님 지식'이다. 여기서의 '지식'은 실천적이며 체험적인 포괄적 의미의 지식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에서 '여호와 경외'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동의어 반복의 차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곧 여기서 '하니님에 관한 지식'은 '여호와 경외'의 결과로 제시된 말이다. 진실되고 간절한 심령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그 지혜 획득의 유일한 통로인 '여호와 경외'를 은사로 받게 되며 그 은사를 받는 자는 궁극적으로 참 지혜가 되신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으로, 이는 신앙(여호와 경외)과 신지식(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선후 관계에 대한 논란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다.

=====2:6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 신령한 지혜의 원천이 오직 여호와뿐임이 다시 강조된다(단 2:20). 여기서 '주시며'는 '배당하다', '승인하다'란 뜻을 가진 '나탄'의 미래형으로 인간이 원하며 찾아야만 주겠다는 조건절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지혜를 얻게 되는 데에는 사람의 노력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왕상3:9,12;약 1:5-7).

그 입에서 -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신인동형동성론적(anthropomorphic) 표현이다.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에게 직접 말씀을 들려주기도 하시지만 대체로 다양한 경로, 곧 선지자, 교사, 지혜자와 같이 부름받은 자달을 매개로 해서 주시는 '말씀'(His every word, LB)을 통해 지혜를 전달하신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지혜를 전하시며 그 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다.

=====2:7

완전한 지혜(투쉬야) - 본서(3:21;8:14:18:1)와 욥기(욥 6:13;11:6;12:16;26:3) 외에 미 6:9;사 28:29에 등장하는 이 말은 원어상 의미가 '능력', '도움', '도략', '이해', '지혜'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 또한 '도움과 인도', '추진하거나 지탱할 수 있는 힘이나 재능', 또는 '추진하거나 지탱함으로써 유익을 얻게 하는 참된 지혜나 참된 행운', '안전'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참조로 영역본 KJV와 RSV는 '온전한 지혜'로 또 NIV는 '승리'(victory)로 번역하고 있다.

행실이 온전한 자(홀르케 톰) - 문자적 의미는 '흠없이 걷는 자'이다(those who walk in integrity). 여기서 '온전'은 전인격적인 순종의 상태와 도덕적, 종교적 결백의 상태를 지칭한다. 물론 이 말은 절대적 의미에서의 무흠한 자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경외를 삶의 주요한 원리로 삼고 그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뜻에 순종하여 의탁하고자 노력하는 자를 가리킨다(10:9;시 84:11).

방패마겐) - 하나님의 신적 보호와 그로 인한 완전한 안전을 상징화한 말로 시가서에서 그 많은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시84:11;89:18;144:2 등).

=====2:8

개역 성경은 '대저'라는 말을 통해 본절이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시는(7절) 사실을 더 구체화시킨 내용임을 설명하고 있다.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 매우 독특한 표현이다. '보호하시며'(나차르)는 '지키다'(준수하다) 혹은 '보호하다' 등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전자의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율법, 명령 따위의 준수 대상이 뒤따른다(3:1;5:2;28:7;신 33:9;시 119:33). 그리고 후자의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사람이나 기타 보호되어야 할 구체적 대상이 뒤따른다(11절;4:6;사 26:3). 여기서는 주어가 '여호와'이시므로 개역 성경처럼 후자의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좋다(Toy). 한편 '공평의 길'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한 모든 길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는 말로서 '성도들의 길'과 병행을 이룬다.

성도들(하시다우) - 본서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이 말은 원어사 의미는 '구별된', '거룩한', '경건한'이다.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시31:23;50:5등), 특별히 마카비 시대 때에는 헬라 사상에 반대하여 유대인의 순수성을 고수하고자 했던 민족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다. 이들은 후일 바라새파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이 말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되었다(고전 1:2;빌 1:1 등).

=====2:9

조건절(1-4절)에 대한 첫 번째 응답(5절)에 이어 두 번째 응답이 기술된다. 곧 5절이 지혜를 추구한 자가 얻게 되는 은사를 근본적인 원칙의 차원에서 언급했다면 본절은 그 신적 은사를 받은 자가 깨닫게 되는 실제적인 선한 삶의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공의, 공평, 정직 - 1:3에도 같은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 용어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기도 한다(시25:8,9;사 30:18).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 역시 당신의 속성을 닮기를 원하신다(레11:45;벧후1:4). 여기서 '공의'(체데크)는 '바르다', '곧다'란 의미의 어근에서 파생된 말로도덕적 의미에서의 올바름을 가리키며, '공평'은 '맞추다', '판별하다'란 뜻의 어근 '솨파트'에서 유래된 말로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른 판단력을 의미한다. 한편 '공평'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름을 뜻한다면 '바르다'란 뜻의 어근 '야솨르'에서 파생된 '정직'(메솨림)은 인간의 내적 면모 곧 그 사상과 양심에 있어서의 올바르고 성실한 태도를 말한다.

선한 길 - 앞에 언급된 공의와 공평과 정직의 내용들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여기서 '길'(마에칼)이 개인적인 행동 방식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는 바, '선한 길'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든 삶에 적용되는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행동 방식을 가리킨다.

 

=====2:10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 개인 성경에서는 문맥상 9절에 이어지는 계속적인 용법으로 쓰여졌으나 원전상 '... 할 때에는'(키)이란 조건적 의미의 접두사가 첨가되어 있어 문장의 새로운 전환을 알린다. 이는 곧 10절 하반절부터 19절까지 내용에 대한 조건적 전제가 된다. 따라서 본 문구는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갈 때에는'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마음'레브)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지, 의, 정을 포함한 인격의 좌소로서 종교적, 윤리적 행위가 결정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창 6:5;삼상 16:7;렘 31:33). 또한 '들어가며'(타보)란 말은 '거하다'란 뜻의 '보'에서 유래된 말로서 확실하게 수용하여 영구히 거하게 한다란 의미를 나타낸다(14:33).

자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 여기서의 '지식'은 단순한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 전반을 직관하고 통찰할 수 있는 실천적, 체험적 지식을 의미하며(1:4), '영혼'(네페쉬)은 인간의 내적 면모를 총괄하며 모든 인격 생활의 중추가 되는 곳인 바,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생겨난 지식이(5절;1:7)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며 속사람을 각성시켜 새로운 힘과 기쁨을 얻게 해준다는 의미이다(느 8:10).

=====2: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 사려깊게 생각하여 행할 수 있는 능력인 근신과(1:4), 옳고 그름을 판별하여 모든 문제를 합리적 방법으로 풀어 나가는 능력인 명철이 지혜를 획득한 자에게 실제적인 삶의 안전과 유익의 방편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2:12

지혜를 획득한 자에게 주어진 근신과 명철의 첫 번째 보호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 여기서 '패역'(타흐푸코트)은 '뒤집다', '바뀌다'란 뜻의 어근 '하파크'에서 파생된 말인바, '패역을 말하는 자'는 곧 참된 진리나 선한 것을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왜곡시켜 사람을 미혹케 하는 자를 지칭한다(8:13;10:31,32;신 32:20).

=====2:13

본절은 악을 어두움의 표상으로 선을 빛의 표상을 나타내는 성경의 보편적인 사상을(요3:19,20) 드러낸 구절로 '정직한 길'과 '어두운 길'을 대조시켜 지혜를 소유하고 그 지혜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삼과 지혜의 근본이신 여호와를 떠나 사는 삶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두운 길 - 의도적으로 지혜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자신을 가리우려는 악한 행실을 가리킨다(욥 24:15;38:13,15;사 29:15).

=====2:14

행악하기를 ... 즐거워하나니 - 13절에 언급된 악한 무리들의 실체를 더욱 강조한다. 곧 그들은 악한 행위를 단순히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악행 자체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이미 습관화된 악행으로 인해 그 양심이 마비되었으며 오히려 그 행위로 인한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그 죄의 성향 때문에 빛으로 나아가기를 꺼려하며 현재의 죄악된 삶을 합리화시켜 그 안에서 안주하려는 경향을 가진다(요3:19, 20).

=====2:15

그 길은 구부러지고 - '구부러지고'는 원어상 '왜곡된', '거짓된'의 뜻의 '이케쉬'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인 '의로운 삶'에 반하는 왜곡되고 거짓된 행악자들의 악한 삶을 가리킨다.

=====2:16

12절에 이어 지혜를 획득한 자에게 주어지는 근신과 명철의 두 번째 보호 내용이 특별히 젊은이들에 대한 강한 권고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음녀(이솨 자라) - 이 말의 어근 '주르'는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온 이방인', '이상한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성경에서는 주로 히브리 사상에 반하는 이방적, 이질적 요소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시81:9;사 1:7). 따라서 이러한 어원적 의미로 볼 때 본문의 '음녀'는 이방 출신의 매춘부를 가리키는 듯하다(strange woman, KJV;adulteress, NIV).

말로 호리는 이방계집 - '말로 호리는'은 곧 '매끄럽게 말하다', '아첨하다'란 뜻의 어근 '할라크'에서 유래된 말로서 유혹을 목적으로 입에 발린 말을 하며 아첨하는 모습을 가리킨다(5:3;6:24;7:5). 또한 '이방 계집'(나케리야)은 '음녀'보다는 이방적 의미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는 말로서 성경 곳곳에 이방 여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다(룻 2:10;느13:26, 27). 한편 이를 본서의 저자 솔로몬과 연관시켜 볼 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은 솔로몬이 한 때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자의적으로 통혼했던 이방 여자들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왕상 11:1-8). 이 이방 여자들은 이스라엘 왕실에 들어와 갖가지 말로 솔로몬을 유혹하여 이스라엘 내에 이방신들과 그에 따르는 문란한 이방의 종교적, 사회적 풍습을 유입시킨 장본인들이기도 했다. 실로 당시 매음 행위는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상의 엄중한 금지 규례였지만(레 19:29;21:9;신23:17) 일부 이방 종교에 있어서는 중요한 종교 의식의 하나였다. 따라서 이러한 매음 행위는 거의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된 이방 여인들에 의해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통해 공공연하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 규례가 문란해진 솔로몬 집권 말기에 성해하였다.

=====2:17

16절에 이어 계속되는 본절에 '소시의 짝'과 '하나님의 여인'이란 말이 나타나는 점에 미루어 '음녀'와 '이방 계집'이 통혼 관계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된 이방 여자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 이방 여자들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규례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소시의 짝 - 여기서 '짝'(알루프)은 문자적으로 '친구', '동료'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결혼을 통해 법적으로 인정된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theit husbands, LB).

하나님의 언약 - 앞 문장과 어우러져 여기서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일부일처의 혼인 언약을 가리킨다. 실로 이스라엘에 있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 제도는(창2:24) 곧 하나님께서 그 제도의 증거자가 되신다. 종교적 의의를 지니며(말2:14g), 일부일제 또한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어도 분명히 율법에 명시된 하나님의 규례였다(출 22:16;신 22:28, 29).

=====2:18

그 집은 사망으로 ... 기울어졌나니 - 상반절의 의미는 '그 집'에 대한 해석 여하에 따라 두 가지로 제시된다. 그 한 견해는 '그 집'을 음녀 자신은 물로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인칭 주격으로 보는 것이다('그녀는 그녀 자신과 함께 그녀의 집을 사망으로 이끌고 내려간다'). 또 다른 견해는 '그 집'을 '사망'과 동격으로 보는 것이다('그녀는 사망으로 내려간다. 곧 사망이 그녀의 집이다'). 이중 70인역의 해석('그녀는 그녀의 집을 사망 곁에 두었다') 등과 종합해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2:19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 음녀의 집이 곧 사망인 바, 음녀의 집의 친구로 함께 속한 자들이 그 음부의 세계에서 산 자의 땅으로 결코 돌아올 수 없음을 뜻하는 말로 음행을 범하는 자가 당할 영벌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욥 7:9, 10).

=====2:20

12, 16절에 이은 근신과 명철의 세번째 보호 내용으로서, 앞의 내용이 금지와 경고로 행동의 절제를 요구하는 소극적 내용인데 비해 본절은 '선'과 '의'에로의 실행을 촉구하는 적극적인 내용을 함축한다.

선한 자의 길 - 여기서의 '선'(토빔)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악'(라임)과 대칭적 개념인 '선'을 뜻하는 바(14:19), '선한 자의 길'은 삶의 자리에서 실천되어져야 하는 사회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규례를 가리킨다.

의인의 길 - 2:9 주석 '공의'를 참조하라.

=====2:21

22절과 함께 본장의 결론을 도출시키는 부분으로서 지혜의 수용과 배척에 따른 결과가 대구법을 통한 강조의 문장으로 피력된다. 곧 본절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의인에 대한 축복과 악인에 대한 저주라는 신명기적 관점이 히브리인들의 가장 큰 삶의 주제인 '땅'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10:30;시 37:29).

정직한 자 ... 완전한 자 -'정직한 자'는 주로 인간의 내적 측면을 강조하여 그 사상이나 양심, 종교성 등이 올바르고 성실한 자를(9절 주석 '정직' 참조), '완전한 자'는 도덕적 측면에서 그 행동 양식이 순결한 자를 각각 가리키는 말인 바, 이들은 모두 그의 전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인지하며, 그 규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땅(아레츠) - 본절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땅이 아니라 특정한 땅,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았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듯하다. 실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 가나안은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 주어진 약속의 땅이었다(출 20:12;레25:18;26:5). 한편 이를 신약과 연계시켜 유추해 볼 때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거하게 될 '새 땅'에 대한 비전의 제시로도 볼 수 있다(마 5:5;벧후 3:13;계 21:1).

=====2:22

끊어지겠고 - 문자적 의미는 '(나무를) 자르다', '베어넘기다'이나 상징적으로 '파괴하다', '소멸시키다'란 뜻을 함의하고 있는 바, 철저한 멸망의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성경의 여러 용례상 이 말은 이스라엘 민족 곧 선민으로부터의 출교를 뜻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출교를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상태와 택함에서

제외된 이방인으로서 전락으로 여겼던 바, 이러한 상태는 영적, 육적 파멸과 동일하게 생각되었다(창 17:14;출 12:15;시 37:38;104:35).

궤휼한 자 - 여기서 '궤휼'(바가드)은 문자적으로 '남몰래 행동하다', '거짓으로 대하다', '불신실하게 대하다'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며, 지혜의 권고를 무시해 버리고, 진리를 왜곡시키며,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폐시키려는 모든 악한 자들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11:3, 6;13:2,25;22:12;시 25:3;59:5;사 33:1).

뽑히리라(이세후) - '떼어버리다', '근절하다'란 뜻의 어근 '나사흐'에서 유래된 말로서 나무가 그 생명의 근저인 뿌리까지 송두리채 뽑혀지는 것을 비유한 표현으로서 그 존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의 상태를 나타낸다. 한편 혹자는 이를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이스라엘의 포수기(捕囚期)와 연결시켜 생각

하기도 한다.

 

지혜 추구의 방법과 결과(잠언 2:1-9)

욥은 이보다 오래 전에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하고 묻고(욥 28:12, 20),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답으로써 "하나님은 그 곳을 아시느니라"(23절)고 하였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솔로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와 획득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아울러 말해 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우리가 지혜를 얻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지혜의 말씀이며, "우리를 능히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1,2절).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지혜와 명철의 샘이요, 표준임을 확실히 깨달지 않으면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만들어 주는 것 이상으로 지혜롭게 되기를 소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혜"나 "명철" 그 자체에게 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귀를 기울이며 우리 마음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기질에서도 지혜로운 것이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적 계시와, 그 계시 위에 구축된 참 신앙은 그 전부가 다 지혜인 것이다.

(2) 따라서 우리는 아주 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하며 약속뿐만 아니라 계명조차도 불평하거나 논란함이 없이 기꺼이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이르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나이다."

(3) 우리는 도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숨기는 보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유해야 하고 우리의 소용에 즉시 닿을 수 있도록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기탁시켜 두어야 한다.

(4) 우리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모든 기회를 포착해야 하며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주의깊고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5) 우리는 우리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에 바쳐야 한다. 만약 마음을 거기에 쏟지 않는다면 귀를 기울이는 일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2.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3절). 우리는 굶주림으로 거의 죽게 된 자가 허겁지겁 먹을 것을 찾듯이 "지식ㄷ을 불러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꺼져가는 듯한 희미한 열망 가지고는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가치와 그 자식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아는 자답게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우리는 갓태어난 아기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달라고 보채지 않으면 안 된다(벧전 2:2). 우리는 "명철을 얻으려고 우리 소리를 높여야"한다. 그 소리를 높여 하늘에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이러한 좋은 은사와 완전한 선물을 기대할 수 있다(약 1:17; 욥 38:34). 우리는 "목소리를 명철에게 주어야"하고(말의 직접적 해석은 그렇다), 그것을 변호하고 찬성하여야 하며, 혀를 지혜의 명령에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그것에 봉헌해야 한다. 마음을 그것에 쏟았던 우리는 이제 그것을 구하는 데에 우리 목소리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로몬은 probatum est-즉 시험삼아 해 보는 치료법으로 이 방법을 기록할 자격이 있었다. 그는 지혜를 주십사고 기도를 하였었고 또 그렇게 하여 그것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3. 우리는 고심참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4절). 즉 우리는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해야"한다. 그것을 이 세상의 모든 부귀보다 더 좋아하며 광산에서 굴착해 들어가는 광부처럼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수고를 하여야 한다. 광부는 광석을 채취하기 위해 백절불굴의 끈기와 정복할 수 없는 견실한 지조와 결의로써 커다란 고난을 견디며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또 부자가 되려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밤 늦도록 일하며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무슨 일이라도 다해 가면서 자기 재물 창고를 채우는 자들처럼, 그것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기 위해 따라갈 때에, 이처럼 부지런히 지식의 방편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이러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성공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우리는 하나님과의 지면(知面)과 교제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게 될 것이다(5절) 즉 너는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고, 모든 성례의 의미와 신비로 안내 받을 것이며 그 규례의 목적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원문의 뜻은 "네가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하게 되리라"이다. 역주). 이것은 우리가 그를 올바로 경외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따뜻한 애정과 그에 대한 찬미로써 그 사실을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

2.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올바른 처신법을 알게 될 것이다(9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너는 공의와 공평과 정직을 깨달을 것이라. 너는 너의 모든 처세 과정에서 너를 이끌어 주고 규제할 정의의 원리, 자비의 원리, 공정거래의 원칙을 배우게 될 것이며, 그 원리들은 네가 모든 관계, 모든 사업에 적격자가 되게 하고 모든 신뢰에 결코 어그러지지 않는 충실한 사람이 되게 해 줄 것이다. 그 말씀은 네게 정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심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을 줄 수 있는 마음도 심어 줄 것이다. 공정하게 행하지 않는 자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들을 "모든 선한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니, 성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즉 자기 의무를 아는 자들은 가장 훌륭한 지식의 소유자인 것이다(시 111:10)

Ⅲ. 우리가 지혜의 추구에서 이런 성공을 희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우리의 격려를 얻어야 한다(6-8절).

1. 하나님께서는 부여해 주실 지혜를 가지고 계시다(6절).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지혜를 주기"도 하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명철을 열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어떤 피조물 안에 있는 모든 지혜는 다 그의 선물이며, 그가 거져 주신 은사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지혜를 후히 주시고(약 1:5), 많은 자에게 주셨으며 아직도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려면 그에게로 가서 구해야 할 것이다.

2. 그는 자기 의지의 계시로써 이 세계를 축복하셨다. "그의 입에서," 즉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과 그의 사역자를 통하여 "지식과 명철을 내신다." 기록된 말씀과 그의 사역자들은 다 인간들에게 대한 그의 입이다. "지식과 명철은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그러한 진리와 선의 발견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 감명을 인정하며 그 감동을 받아들이려 하기만 하면 우리를 참으로 지식있는 명철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에게 탐색할 만한 성서가 있다는 것은 지혜를 추구할 약속이기도 하고 격려이기도 한 것이니 만일 우리가 부지런히 찾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지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 그는 특별히 당신의 뜻을 성실히 추구할 마음이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전제하고 있다(요 7:17). 그런 선한 자들만이 그들에게 필요한 그 자식과 명철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행하고자 하는 선한 자들아! 그것을 찾으라. 그러면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구하라! 그러면 그것을 얻게 되리라(7,8절)

(1) 이와 같은 은총을 입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정직한 자들이다. 의로움에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게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또 그들은 하나님과의 거래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직하며 자기가 아는 한도까지는 자기 의무의 수행을 본분으로 삼는 자, 곧 "그 행실이 온전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성도들"이다. 곧 그의 영광을 위해 바쳐지고 그에 대한 봉사를 위해 구별된 무리이다.

(2) 그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무엇인가!

[1] 훈계, 지혜의 수단은 모든 자들에게 다  주어지나 지혜 그 자체, 곧 "완전한 지혜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예비되며"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비축되어 있다. 그리스도께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지혜"이신 것이다. 말씀 안에서 계시의 성령이 되시는 그분이 곧 성별된 자들의 영혼 속에 들어와 계신 지혜의 영이시며, 그의 길을 깨닫는 명철한 자의 지혜가 되신다. 그것은 완전한 지혜여서 기초가 공고하며 원리는 어김이 없고 그 소산은 영원한 이익을 준다.

[2] 만족, 혹자는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물질을 예비하신다"라고 해독한다. 그는 실질적 지식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행복과 위안도 예비하신다(잠 8:21). 재물은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것이다. 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단지 스스로 행복한 줄로 상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자를 위한 약속 안에, 그리고 천국에 예비되어 있는 것들은 그들에게 진정한 행복, 철저하고도 영원한 행복을 줄 것이다.

[3] 보호. "행실이 온전한" 자들조차도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는 위험한 데에 직면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방패"가 되시며, 또 되실 것이다. 그래서 저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들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공포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안전하며 그들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아브라함아! 두려워말라. 나는 네 방패니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소유하고 계시며 돌보아 주고  계시는 것이 저희의 길이며 저희가 다니고 있는 공평의 소로인 것이다.

[4] 끝까지 지속되는 은혜.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에게서 지혜를 구한다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순전함 가운데서 지탱해 주실 것이며 우리가 거기서 곁으로 벗어나도록 아무리 유혹 받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공평의 길을 견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다. 즉 그가 "자기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사 그것이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며, 그들을 그 길에서 안전하고 결백하게 보전하셔서 자기의 하늘 나라에 이르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은혜에 대해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을 올바르게 활용한다면 그것은 우리 의무를 수행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고무하고 촉진하게 해줄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역사하시느니라."

    
지혜의 유익함(잠언 2:10-22)

이 성귀의 목적은 다음 사실을 나타내는 데에 있다.

1. 참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큰 이득을 주는가? 참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해 줄 것이며,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재물로 부유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친절을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 된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어떻게 선용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혜를 미덕의 길로의 안내자로서, 모든 종류의 유혹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사용해야 한다.

3. 우리가 이 지혜를 소유하는지의 여부는 어떤 규칙을 따라 시험해 볼 수 있을까?

이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지혜롭다면 그 지혜는 모든 악한 친구와 악한 행위를 피하려는 우리의 근신함으로써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쓰일 것이다.

Ⅰ. 악으로부터, 죄의 폐해로부터 우리를 보존하는 데에. 결과적으로 이 지혜는 죄악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환란의 재앙에서 우리를 보전하는 데에 유용하다.

1. 전체적으로(10,11절). "지혜가 너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면 언제 그 지혜는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는가?

(1) 지혜가 우리에게 대해 지배권을 행사할 때. 지혜가 우리 머리를 지혜로운 관념들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어가서" 명령권을 가지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 즉 지혜가 우리 마음 속에서 왕노릇하며 애정과 열정을 규제하게 될 때, 누룩(효모)이 밀가루 반죽 속으로 들어가듯이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서" 거기에 제맛을 확산시키며 전체를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릴 때, 이러한 때에라야 그 지혜는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가  그 지혜를 기뻐하게 되는 때.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때." 네가 그것을 극히 유쾌한 위안물로서 즐기기 시작하고 즐거이 흡족하게 여기면서 그 규칙에 복종하게 될 때, 즉 다시 말하자면 네가  미덕의 행위를 노예들이나 하는 고역으로서 하는 수 없이 억지로 해야 하는 임무라 하지 않고 "자유"요, "즐거움으로 하는 일"이라고 부르며 신령하고 경건하게 사는 삶을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안락한 삶이라 말하게 될 때, 너는 그 지혜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설사 어떤 점으로는 그 지혜가 주는 제한이 몸에게는 다소 즐겁지 아니하더라도 그러한 것조차도 영혼에게는 즐거울 것임에 틀림 없다.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 이 정도에 이르게 될 때에는 "근신"이 우리를 지켜며 "보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에게 해로운 길에서 피할 수 있고 악인의 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심으로써 "그 성도의 길을 보전"하신다(8절)

심령을 지배하는 은혜의 원리들은 내부의 타락과 외부의 유혹에 대해서 공히 강력한 보신책이 될 것이다(전 9:16, 18)

2. 보다 세부적으로 지혜는 우리를 보전해 준다.

(1) 타락된 원리의 사람들과 무신론적 이교도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데, 그들은 젊은이들의 판단을 타락시키며 그들의 마음에 신앙에 대한 편견과 악을 위한 논증 따위를 주입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는 자들이다.

"지혜는 너를 악한  자의 길에서 건져 내리라. 그 구출은 마치 죽음의 입에서 건져내는 것같이 복된 구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악한자가 걷고 있는 길로부터, 악한 자가 네게 걷도록 유인하는 그 길로부터의 구출이다." 원수는 악한 자(12절)라고 단 한 사람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서는(13절) 다수로 표현되고 있다. 즉 한 무리이며 일당이다. 그들은 신앙에 대항하여 연합을 이루고 악마의 왕국과 그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손을 잡고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1] 그들은 선한 것에 반대하는 심령을 갖고 있다. 그들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그들은 종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면 그것이 신앙에 의한 그들 자신의 적의를 나타내기 위함이건 타인들을 신안의 길에서 도중하차 시키기 위한 것이건 무엇이든지 다 말한다. 그들은 사탄의 대변자요, 바알을 위해 변호하는 자들이어서 "여호와의 올바른 길을 그르치게 하느나라" 신성을 모독하는 독신적(瀆神的) 재주는 죄악을 위한 찬성론을 얼마나 심술궂게 펼 것이며 패역함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헐뜯을 것인가! 지혜는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막아 줄 것이며 최소한 그런 자들의 꾐에 빠지지는 않도록 해 줄 것이다.

[2] 그들은 바로 그 선한 것에서 탈퇴한 자들이다. 흔히 그런 자들이야말로 경건한 신앙 세계의 원수 중 가장 악의에 차고 위험한 원수들이다. 배교자 율리안이 그 증거가 아닌가!(13절).  "이 무리는 정직한 자의 길을 떠나느니라." 그 정직한 길 안에서 그들은 훈련을 쌓아 왔으며 출발을 했었는데 이제 자기들이 받은 교육의 영향력을 훌훌 떨쳐버리고 희망어린 첫출발의 인연도 끊어 버렸다. 이것은 "어두운 길로 행하기 위해서"였다. 빛을 싫어하는 그 사악한 길에서 사람들은 무지와 실수로 눈을 가리우며 완전한 어두움으로 끌려 가게 된다. 죄악의 길은 암흑의 길이요, 편안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한 길이다. 평탄하고 즐거우며 밝은 길, 정직한 길을 버리고 그런 암흑의 길로 행하다니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시 82:5; 요일 2:11).

[3] 그들은 죄악을 즐거워하며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과  타인의 범죄 행위를 보는 것을 다 기뻐한다(14절). 그들은 "행악"할 수 있는 기회를 "즐거워하며" 악한 계획의 성취와  성사를 기뻐한다. 나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유희이다. 그들에게는 "악인의 패역을 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광경은 없다. 소망있는 자들이 죄악의 길로 끌려가는 것을 보는 일, 그래서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강팍케 되고 굳어지게 됨을 보는 것보다더 기분좋은 일은 없다. 그들은 악마의 왕국이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즐거워하는 것이다(롬 1:32  참조). 그들의 불경건은 이렇게까지 높이 도달해 있다.

[4] 그들은 죄악에 확고부동하다(15절). 저희 "길은 구부려져 있느니라." 그 길은 아주 굉장히 꼬불꼬불하고 이리 돌며 저리 돌아  저희의 회오가 추적해 오지 못하도록 도피하고  있으며 회오의 힘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기만적인  마음은 저희 악행속에 있는 손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때는 간교한 변명을, 또 어떤 때는 이런 저런 교묘한 구실을 갖다 댄다. 그들은 저 미궁(迷宮)의 미로(迷路)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그들 자신의 양심의 붙잡음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위가 패역한 자"들인 때문이다. 즉 그들은 voi역한 길에서 계속 매진하려고 결심하고 있다. 그것을 말라는 말이 무엇이든지 마이동풍격으로 흘려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 모든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자들과의 교제를 회피해야 할 것이다.

(2) 지혜는 타락한 행위의 여인들로부터 우리를 보전해 줄 것이다.

전자는 영적 악함, 즉 성화되지 않은 마음으로의 욕망으로 이끌어 간다. 반면에 이 후자는 "육체적 욕정"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산 성전인 육체를 더럽히며 게다가 "영혼에게 전쟁을 건다." 음녀는 여기에서 "이방 계집"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자기 안에 지혜나 선함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여인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인은 음녀가 마치 이교도인양, 그리고 저 신성한 공동체에 대해 이방인인양 회피할 것이다. 이방 계집이란 사실상 이성과  미덕과 명예의 제반 원리로부터 완전히 소원(疏遠)한 여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음녀의 유혹에서 구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1] 이 여인은 얼마나 거짓된 자인가!

온통 위선 덩어리로 이루어진 자와 거래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여인은 이방의 여인이여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녀는 자기가 유혹하는 자에게 부실하다. 그녀는 정중하게 말한다. 즉 그에게 다른 누구보다 그를 얼마나 흠모하는가, 또한 그녀가 그를 위해 얼마나 친절한가를 말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로 호리고 있느니라. 이 여인은 데리라가 삼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정도 품고 있지 않으며 그의 행복 따위는 원하고 있지도 않다. 그녀가 의도하는 전부는 그의 호주머니를 터는 일과  자신의 천한 욕정을 충족시키는 것뿐이다.

둘째, 이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부실하며 그에게 매여 있는 자기의 신성한 의무를 깨뜨리고 있다. 그는 자기 "소시의 짝(혹은 "길잡이")이었다."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그를 그렇게 선택하였고 그만을 섬기며 그 외 모든 것은 버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는 그를 "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여인이 그 외 딴 어떤 자라고 해서 절개를 지키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다. 그 여인을 향유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녀의 허위성을 같이 분담하려는 자이다.

셋째, 이 여인은 하나님께 부실하다. 그녀는 "자기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니라"(17절). 즉 혼약을 망각하였다. 하나님은 결혼 언약에 증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혼약 당사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남편과 아내 쌍방이 서로에게 진실하겠노라고 서약하는 의식의 창시자인 까닭이다. 따라서 이 여인이 죄를 짓는 것은 그 남편에게 뿐만 아니라 그녀의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서약을 무시하며 언약을 깨뜨리는 때문에 "간음자와 행음자를 심판하실 것이다"(겔 17:18; 말 2:14).

[2] 이 여인과 연합하게 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치명적 결과가 발생한 것인가!(18,19절)

타인들의 고생을 보거든 그것을 우리의 경고로 삼자. 우리는 음행의 죄를 조심하자.

첫째, 음행하는 자들이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그들의 파멸은 확실하며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행의 죄는 영혼을 곧 바로 살해하는 경향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애정과 영혼 속의 선한 기질을 질식시켜 버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저주, 그리고 그의 공의로우신 칼날 앞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금지된 쾌락 속에서 사는 자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근신은 모든 사람을 악한 여인으로부터 보전해 줄 뿐만 아니라 악한 집으로부터도 지켜 준다. "그 집은 사망으로 기울어지는" 집이다. 즉 그 집은 영원한 죽음으로 직통하는 길 위헤 있다. "그리고 그녀의 길은 르바임(Rephaim)으로," 즉 옛 세계의 죄인들인 "거인들"(어떤 이는 그렇게 읽는다)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그 거인들은 사치와 과도한 난동의 삶을 살다가 늦게야 제거되고 그들이 설립한 것은 홍수로 뒤집혀 버렸던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 많은 쾌락 뒤에 따를 영원한 고통을 상기시키시면서 우리를 제지시키신다(마 5:28, 29  참조).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회개와 회복은 지극히 모험적이다. "그녀에게로 가는 자는 누구든지," 거의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느니라." 마귀의 이 올무에 걸린 자  치고 회복에 나오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 죄의 기만성에 빠지면 그만큼 심령이 강퍅해지고 그 마음이 눈뜬 장님처럼 어두워진다. "생명의 길을 잡았다"가("얻었다는" 뜻은 원래 잡는다"이다), 일단 놓치면 그들은 다시 잡을 줄은 모르고 그 천한 욕망에 완전히 도취되며 매료되고 만다. 많은 박식한 해석가들은 "이방 여인"에 대한 경고를, 문자적인 의미 이외에 상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영적 매음인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로서. 지혜는 네가 모든 우상 경배자들과 친하지 못하게 지켜 줄 것이며 그들에게 가담라도 싶어하는 네 모든 성향으로부터도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우상 숭패는 수 십 세기 동안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해로운 결과를 끼쳤고, 솔로몬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신체의 욕망과 육정으로 인해 영혼의 지적 능력과 기능이 타라되는 데 대한  경고로써, 지혜는 네가 육육의 마음에게 포로당하지 않게 지켜 줄 것이며, 네 영이 이 악명 높은 음녀, 곧 육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다. 이 악명 높은 음녀인 육은 "그 길잡이(혹은 "짝")를 버리며 우리 하나님의 언약"을 범하여 "죽음에로 기울어진" 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사불란한 지배를 하기시작할 때는 그 영혼의 사정이란 가망이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Ⅱ. 이 지혜는 우리를 선한 것에로 안내하고 지시하는 데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20절).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리라."

우리는 선한 길로다니기 위해서는 "악인과 이방 여인"의 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선한 행하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악을 행하는 일을 그쳐야"만 한다.

여기서 다음 사실에 유의하도록 하자.

1. 선한 자들의 전용 도로가 있다. 그 길은 선한 자들이 선한자의 자격으로서 다니는 길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선한 동아넹는 언제나 다닐 수 있는 길이다.

2. 그 길로 행하며 그 선한 옛 5길을 구하고 그 안에서 다니는 것이 곧 우리의 지혜이다(렘 6:16; 히 12:1). 우리는 잠시동안 그 길로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길을 지키고 계속 그 길 안에서 걸으며, 그 길에서 곁길로 나가서는 아니 된다.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이어서 지혜로운 모든 사람은 그것을 한 번 붙잡은 이상 그 길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너로 저 훌륭한  분들, 곧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본받게 하며(패트릭 감독은 그렇게 의역한다), 그들을 따라간 의로운 자들의 길을 지키게 하리라."

우리는 성도들의 선한  귀감에 의해 전반적인 우리 길을 선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부적 소로의 선택에 있어서도 옛 성도들의 모범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한다. 즉 흔적을 살피고 무리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왜 우리가 이같은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인간의 순전성은 그들은 확고히 세워 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21절).

[1] 그것은 그들 개인을 확립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대저 정직한 자는" 그들이 사는 날동안 평화롭고 조용하게 "땅에 거하리라." 그들의 정직성은 그런 삶에 이바지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저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계획에 길잡이가 되며 그들의 이웃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이다.

[2] 저희 권속들을 확립시켜 주는 게 될 것이다. "완전한 자는"그들의 후손으로 "땅에 남아 있으이라." 그들은 천국의 가나안에 영원히 거하며 남아 있게 될 것이니, 땅의 가나안은 그 천국 가나안의 모형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2) 인간의 불의는 그들의 파멸이 될 것이므로(22절). "악인"은 어떻게 되며 누가 "궤휼한"자의 길을 택하는지 살펴 보라. 그들은 이 뒤에 올 천국과 그에 대한 모든 소망으로부터 "끊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착을 두고 있는 저희의 보화를 쌓아둔 바로 이 현재의 "땅에서 끊어지리라." 그들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 땅에서" 뽑혀질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땅에게는 자비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아니할" 날이 올 것이다(말 4:1). 그러므로 그 지혜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하며 "우리 영혼에 즐겁게" 되도록 하자. 그 지혜는 이와 같은 종말의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