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시가서

잠언 제 1장

은바리라이프 2008. 8. 7. 19:26
잠언 제 1장

 

잠언 머리말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솔로몬잠언이라

솔로몬의 잠언이라 - 본서가 여러 저자들의 작품을 함께 내포하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원전상 이 말이 표제 문구(미쉘레 쉘로모)로 쓰여진 까닭은 당시의 많은 지혜자 중 신적 지혜의 소유자인 솔로몬의 탁월한 위상과 함께 본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수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때문이다. 왕상 4:23에 의하면 실제로 솔로몬이 지은 잠언만 해도 삼천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편 여기서 잠언을 가리키는 원어 '미쉘레'는 '유사함', '비교'란 의미를 지닌 '마솰'의 복수형으로서 '속담들', '격언들'로 번역된다. 그러나 '마솰'의 용도가 성경에 있어서 선지자적 예언(민 23:7,8)이나 교훈시(시 49:3;78:2)또는 지혜자들의 변(욥27:1;29:1) 등과 같은 다양한 의미로도 사용되어졌는바, '미쉘레'(잠언)는 일반적인 속담이나 격언보다 더 넓은 의미의 진리나 의미깊은 개념이 응축된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서론 제목 참조).

 

=====1: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잠15:23

지혜 - 잠언의 핵심 단어로 본서 전체에 걸쳐 41회나 반복되고 있다.이는 히브리어로 '호크마'이며 '(올바른 내적 외적 삶의 유지를 위한) 판단력', '굳셈','밀접합' 등의 의미를 지닌 '하캄'에서유래되었다. '호크마'는 원어상 삶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기능적, 도덕적, 종교적 지혜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출 31:3; 삿 5:29; 삼하 14:2; 왕상 4:29-34; 렘 18:18; 겔 28:3).

 

그러나 본서에 있어서 이는 단순한 도구적지식이나 사변적학식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경건에서 발생하며 신앙적,실천적 특성이 함의된 거룩한 통찰력을 가리킨다(1:7). 한편 이 말이 70인역에서는 '소피아'번역되었는 바, 이는 '호크마'보다 그 종교적 의미가 많이 약화된 것이다.

 

훈계 - 이의 히브리어 '무사르'는 '(물리적 힘이나 말로)징계하다','견책하다'란 뜻의 '야사르'에서 파생된 마로 '지혜'에 비해 더욱 실천적 의미에서의 '교육'또는 '도덕적 훈련'을 가리킨다.

 

명철의 말씀 - '명철'은 원어상 '비나'로 참과 거짓, 선과 악 사이를 구별하는 능력을 말한다(왕상 3:9, ). 따라서 '명철의 말씀'은 그러한 제상황의 판별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1: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본절은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하도록 해주는 훈계와 지혜를 얻게하며'로 역하는 것이 더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혜는 훈계에 따른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좋으며,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는 지혜로운 삶의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지혜롭게'(하스켈)는 2절의 '호크마'와는 달리 '신중함', '사려깊음'등을 뜻한다.

 

=====1: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잠2:9

어리석은 자 - '어리석은 자'의 원어 '페타임'은 '열려진','공개된'이란 뜻의 어근 '파타흐'에서 유래된 말로서 그 마음이 외부를 향해 무방비로 열려있는 단순한 자, 곧 외적 유혹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자를 가리킨다(7:7;8:5;9:6).

슬기(오르마). '재빠르다', '간교하다'란 어근 '아람'의 의미가 보여주듯 여기서는 악한 계략을 피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 여기서 '지식'(,다아트)은 전인격적이며 체험적인 지식을, '근신'(메지마)은 '신중함', '용의 주도함', '숙고함'을 의미하는 바, 본절은 경험의 부족으로 경솔하게 행동하기 쉬운 미성숙한 젊은이들에게 대상에 대한 확고한 지식에 근거하여 사려깊고 신중하게 행동하게 함을 의미한다

 

=====1: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謀略)을 얻을 것이라

본절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된 표현이 9:9;16:22; 마 13:12; 막 4:25; 눅 8:18 등에도 나타난다.

 

학식(레카흐) - '전해진', '받게 된'이란 의미로서 대대로 전수되어 축적된 지식을 가리킨다.

 

모략(타흐불로트) - '줄을 당기다', '조정하다'란 뜻을 지닌 '헤벌'에서 파생된 말로서 일반적인 항해(航海) 용어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으로 '인도', '대상을 다루는 기술'(욥 32:7; skill, RSV)이란 의미를 가지는 바, 여기서는 삶을 바르게 조종할 수 있는 사려깊은 원리들을 말한다(11:14;12:5;20:18;24:6).

 

한편 '학식'과 '모략'은 전수된 지식의 올바른 활용이란 측면에서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

 

=====1: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奧妙)한 말을 깨달으리라    시49:4

잠언의 효용성을 언급한 4, 5절과 문맥상 연속되는 부분으로 결과적 유용성을 보여 준다.

 

비유 - 히브리어 '멜리차'는 '돌아가다', '구부리다'란 어근'루츠'에서 파생되었으며, 해석과 설명을 필요로 하는 우회적, 상징적 표현을 가리킨다(합 2:6,Hitzig, Toy).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 원문상 '말'과 '오묘한 말'은 모두 '지혜있는 자'의 수식을 받는다. 한편 '오묘한 말'(히다)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흔히 지혜의 척도를 재어보기 위해 사용되었던 '수수께끼'를 뜻한다 (삿14:12-18,h).

 

악한 자와 짝하는 것에 대한 경계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곧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 (2) 서론의 결론부이다.(3)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 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 혹은 최상의 지혜를 의미한다.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본절에서 9:18까지는 젊은이들을 위한 충고적 교훈들이 강화(講和) 형식으로 나타나며 각 강화들은 균형잡힌 시적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내 아들...네 아비...네 어미 - 혹자는 이를 문자 그대로 혈연적 의미로 해석한다. 특히 더구체적으로는 본서의 대부분이 솔로몬의 저작이라는 점에서 이를 각각 '르호보암'(왕상 11:43), '솔로몬', '나아마'(왕상 14:31)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학자는 원어상 '아들'(베니)이란말이 당시 선생이 그의 제자에게도 흔히 사용했던 보호와 관심의 의도가 깃든 호칭이었다는 점에서(왕상20:35; 왕하2:3, 5) 이를 교훈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서 내의 여러 용례상(2:1;4:10,20;23:15,19,26;31:2) 이는 전자와 후자의 의미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한편 이스라엘의 교육 관례상 실제적인 생활 지침(훈계)은 아버지의 몫이었으며, 일반적 교훈 이나 율법 등의 가르침은 어머니에게 속하였다(3:1).

 

=====1: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순종한 자들이(8절) 얻게되는 결과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관 - 이는 '은총의 관', '영화로운 관'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목의 금사슬 - 고대 근동 국가들의 관습상 '명예', '권세', '위엄' 등을 상징하는것이다(창41:42; 단5:29).

 

=====1: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인데 비해 악을 피하는 것 또한 지혜이다. 곧 19절까지는 악인들의 특성과 함게 그들의 궤계를 피하는 것이 지혜의 일면임을 피력한다. 악한자 이의 원어 '하타임'은 '빗나가다'란 뜻의 어근 '하타'에서 유래된 말로 하나님이 지시하는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 상습적, 고의적, 계획적으로 범죄하며 다른 사람들까지 실족케 만드는 자를 지칭한다(시1:1).

 

=====1: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시10:8

본절에서 14절까지는 악한 자(10절)의 말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악한 자의 실체를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만히 엎드렸다가 - (아라브). 으슥한 곳에 매복하여있는 강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뒤에 나오는 '숨어 기다리다가'(차판)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는 바, 이들의 어근이 각각 '얽어매다'(아라브), '숨겨 감추다'(차판)란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본절은 올가미와 그물을 설치하고 교묘하게 은폐시키며 숨어 있는 사냥꾼의 의도처럼 악인들의 궤계가 은밀하고 치밀하다는사실을 보여준다.

 

까닭없이 - 원어상 이 말이 문법적 해석에 따라 '죄없는 자'를 수식하는가('무고하게 죄없는 자'), 아니면 '숨어 기다리다가'를 수식하는가('이유없이숨어 기다리다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분분하나 성경의 용례상(삼상 19:5;25:31; 시 35:19;69:4; 애 3:52)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1:12 음부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시124:3

직유법과 동의적 대구법(7:1;8:1)을 통해 악한 자의 극악함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곧 출애급 당시 모세에게 반역한 고라일당에게 일어났던 사건을(민16:30-33) 연상시켜 주는 본절은 유사한 성격의 '음부'와 '무덤','산 채로'와 '통으로'를 각각 대구시켜 악한 자의 궤계를 회화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음부'(쉐올)와 '무덤'(보르)은 죽은 자의 세계를,'산 채로'(하임)와 '통으로'(테미밈)는 몸 전체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삼키다'(벨라)와 어울려 무죄한 사람들을 철저하고도 은밀하게 멸망시키려는 악인들의 의도를 보여 준다.

 

한편 혹자는 '산 채로'를 '음부'와 연관시켜 '산 음부'라고도 표현하나 문법상 설득력이 약하다(시55:15,).

 

=====1:13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보화(혼 야카르) - '편리함', '부유함'의 뜻을 지닌 '혼'과 '가치있는', '귀중한'이란 의미의 '야카르'가 합성된 말로 여기서는 육체적인 편의와 쾌락을 가져다 주는 모든 물질적 재산을 가리키다. 빼앗은 것(솰랄).전쟁 중에 탈취한 노략물, 약탈물등을 가리킨다(창 49:27; 출 15:9).

 

=====1:14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제비를 뽑고 - 이는 탈취한 물건(13절)의 동일한 분배를 의미한다.

 

전대 하나만 두자 - 돈 넣는 주머니인 '전대'(키스)는 여기서 악한자들의 공동 재산을 가리키는 바(a common purse, NIV), 각자의 탈취물들을 하나로모아 그들의 공동 재산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에 비추어 보아 본절은 개개인의 성과에 관계없이 제비를 통해 그 공동의 몫인 탈취물을 손쉽게 소유할 수 있게 되리라는 악인들의 달콤한 유혹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불의한 재물의 공유(共有)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범죄와의 결속을 낳게될 뿐이다.

 

=====1:15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시119:101

11-14절에서 악한 자의 실체를 밝힌 저자는 이후 19절까지 유혹의 시초에서부터 악을 철저하게 거절하라는 적극적인 권고와 강력한 경고를 말하고 있다(시 119:101).

 

길에...그 길을 - 여기서 전자의 '길'(데레크)은 구체적인 삶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일반적 비유이며(2:15; 시 1:1), 후자의 '길'(네티바)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흔적을 남기고 지나간 길, 곧 악의적인 행동 양식을 특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네 발을 금하여 - 여기서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인 죄의 성향이 암시되어있다 여기서 '발'(레겔)은 원어상 신체의 일부를 지칭할 때 쓰여지는 복수의 형태가 아닌 단수로 표현되었는 바, 이는 피교훈자의 행실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1: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대저 그 발은...빠름이니라 - '그들은 악한 일 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사람은 죽이는 데 능숙한 자들이다'(현대인의 성경).

 

=====1:17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 이겠거늘 -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의를 일삼는 악인들의 궤계가 궁극적으로 실패하게 될 것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본절은 문맥상 19절까지의 내용을 포괄한다.

 

한편 본절은 원전의 해석 방법에 따라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1) 그물이 쳐진 것을 보고도 그 미끼에 유혹되어 함정에 걸려드는 어리석은 새처럼 악한 자들 역시 과다한 탐욕에 눈이 멀어 그들이 놓아둔 덫에 그들 스스로가 걸려든다는 것을 비유함.

(2) 위험을 보면 달아나는 새들의 본성에 비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궤계가 이미 노출된 채로 그물을 치려는 악한 자들의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처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함.

본절 자체만을 놓고보면 (2)의 해석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의 초점이 결국 스스로 놓은 덫에 빠져버리는 악인들의 종국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1)의 해석도 타당성을 확보한다.

 

=====1:18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1절에 나타났던 악한 자들의 말을 인용해서 그 반전된 상황을 강조하고 있는 본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졌던 보응의 원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러한 보응 원리는 인간적인 도리와 함께 신적 정의의 차원에 그 기반을 두는 것이다.

 

=====1:19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이(베차) - 이 말은 '조각','끊어진 단편'등의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여기서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 부당한 이득의 몫을 말한다(13,14절).

 

길(아레호트)- 인간의 행동,삶의 방법 또는 그결과적 의미까지를 포괄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17절과 연관시켜 볼 때 탐욕과 부정에 눈이 먼 자들의형태와 그 결국은 스스로의 파멸뿐이라는 사실을 경고 하고 있다(딤전 6:10).

 

지혜를 무시함에 대한 탄식

 

=====1:20,21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파멸을 가져올 뿐인 죄의 유혹을 경고한 데 이어 저자는 지혜를 의인화시킴으로써 지혜에의 권고와 초대에 대한 순종의 유익함, 그리고 이를 거절한 자에게 있는 징책과 심판을 선고하고 있다. 성경상으로 지혜가 의인화된 첫번째 경우는 욥 28:20-23,27,28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본문외에 3:15-19;8,9장 등에서 지혜가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특히 8:22-31에서는 지혜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 언급된다.

 

지혜가(호크모트) - '호크마'(2절)에서 파생된 복수형으로(22절;9:1;14:1;24:1,7;시 49:4), 이러한 복수형은 지혜의 수나 종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축하는 지혜의 완전성을 나타내기 위한 소위 장엄 복수로 쓰여진 것이다. 길거리(바후츠) - 바깥의 개념인 '실외'(室外)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부르며(라난) - 문자적으로는 '크게외치며'란 뜻을 가지는 바,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 선지자, 지혜자,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지혜를 전달할때의 매개적인 수단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는 의인화된 지혜가 설교하는 곳을 계속 열거하고 있는바, 이곳들이 모두 공공 장소라는 점에서 지혜의 초청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 공공성을 지닌 것임을 시사해 준다(8:1-4;9:3; 마10:27;행 19:8).

 

훤화하는 길 머리 - 여기서 '길 머리'는 길이 사방으로 갈라지는 길의 중심부(겔16:25) 또는 성벽의 꼭대기(LXX, the top of the walls, RSV) 등을 뜻하며, '훤화하는'(호미요트)은 '시끄러운 곳'(왕상 1:41; 사 22:2)을 의미하는 바, 이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여 북적대는 장소를 가리킨다.

 

성문 어귀 - 고대 근동 사회에 있어서 성읍 내의 중심적인 운집 장소가 된곳으로 재판의 개정(룻4:11; 욥29:7), 시장의 개설(왕하7:1), 공공회의의 개최(대하18:9)등이 행해졌으며 특별히 선지자들의 예언이 자주 선포된 곳이기도 하다(왕상22:10; 렘 17:19,20).

 

==1: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11-14절과는 반대로 지혜 자체의 말 을 인용하고 있다.

 

거만한 자(레침) - 원어상 '조롱하는 자'(29:8)란 의미로 경건한 생활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가벼이 여기고 멸시하는 자를 가리킨다.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 여기서 '신'(루아흐)은 지혜와 총명의 신,모략과 재능의 신, 그리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신이며(사 11:2) 포괄적으로 성령 또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 또한 '부어 부며'(아비아)는 '용솟음쳐 나오다', '풍성히 발하다'란 뜻의 어근 '나바'에서 유래된 말로서 끊임없이 새롭고 풍성하게 주어지는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본 구절은 회개한 자에게 끊임없이 새롭고 풍성하게 주어지는 성령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행2:38,39).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나의말'(데바라)은 지혜에 내재되어 있는 포괄적인 사상이나 교훈들을 의미하며(thoughts,NIV), '보이리라'는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게 '나의 신'은 '나의 말'에 생명과 능력을 부여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이러한 원리는 요 6:63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도 보여지는 바, 이곳에서 지혜는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말씀의 원천으로 나타나고 있다.

 

=====1:24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 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손을 펼지라도 - 여호와 신앙을 잊어 저리고 삶의 지향점을 상실함으로써 방황하는자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주목하며 그들로 하여금 가까이 오도록 하는 것을 의인화시킨 표현이다(사 65:2,).

 

=====1: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교훈...책망 - '책망'이 악을 행치 말라는 소극적 의미를 가지는 데 반해 '교훈'은 적극적인 선의 실천에 대한 권고적 의미를 함축한다.

 

멸시하며(파라) - 원어상 경멸이나 무시의 의미보다는 '내어버리다', '거절하다'(spurned, LB)란 뜻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로 강한 거부 의사를 나타낸다(4:15).

 

=====1:26,27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災殃)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잠10:24

지혜의 권고를 거절한 악인들이 당하게 될 결과적 심판의 엄중성을 점층법과 열거법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웃을 것이며...비웃으리라 - 조롱과 멸시의 의미를 점층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으로(시 2:4) 두 단어 모두 방관자적 조소(嘲笑)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 여기서 '찾으리라'(솨하르)는 '새벽녘'이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일찍 일어나 열심을 내어 기도하며 찾는다는 의미이다(8:17). 따라서 본절 이하는 그러한 열성적인 부르짖음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것임을 시사하는 바(요7:34),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은혜의 시기, 곧 회개와 용서의 때에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호10:12; 눅13:24-28; 고후6:1,2).

 

=====1:29,30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잠1:22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본서의 모토(motto, 7절)에 근거해 볼 때 본절은 악인들이 당할 심판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곧 악인들은 계속되는 지혜의 초정과 권고를 무시하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선택했으며, 종교적, 윤리적 삶의 원리를 제시하는 지식을 경멸하였기에 마땅히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 여기서 '열매'는 자신이 취한 행동의 결과를 비유한것으로 본 문구는 위에 언급된 모든 심판과 형벌의 원인이 바로 악인들 스스로에게 있음을 보여 준다.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 '꾀'(모에초트)는 악한 궤계나 악의적인 모략, 또는 불가능한 계획을, '배부르리라'(사바)는 '과식하여 물리게 하다'(14:14;25:16; 시88:3)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본 문구는 근원적인 만족을 얻지 못한 자가 과한 욕망을 품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좌절과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1: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퇴보 - 이는 '돌아서다'란 의미의 어근 '슈브'에서 파생된 말로 좋은 의미에서는 죄를 자각하고 돌아서는 회개를 가리키며,나쁜 의미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등을 돌린다는 뜻의 배교, 반역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렘 8:5; 호 11:7).

 

안일 - 이 말 또한 원어상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곧 좋은 의미에서의'고요함', '안전함'(17:1; 시122:7)과 나쁜 의미에서의 '나태', '부주의함','세속적 성공에을 지시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로 이러한 거짓 평안은 영혼을 부패시키며 인간을 쾌락과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킨다(눅12:16-21).

 

=====1:33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晏然)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나를 듣는자 - 여기서의 '나'는 의인화된 지혜를 가리킨다(20절). 따라서 이 구절은 지혜의 권고와 충고를 거절한 악한 자들과는 반대로 그 지혜의 모든 권고와 초청을 듣고 따름으로써 전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자를 지칭한다.

 

안연(晏然)히 살며 -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서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신33:12-18의 약속을 연상시킨다. 곧 이 말은 현세적인 안전함을 넘어서 지혜의 충고와 권고에 순종하는 의인이 누리게 될 궁극적이며 영원한 영적 평안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이 원전에서는 완료형 문법으로 쓰여졌는 바, 이 평안은 미래적인 비전일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현재적 의미의 평안이기도 하다.

 

 

잠언의 목적과 의도(잠언 1:1-6)

 

우리는 여기에서 이 책의 서론부와 접하게 된다. 흑자는 에스라와 같이 수집자와 발행인이 본서에 이 서론을 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머릿글은 오히려 솔로몬 자신이 직접 집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기 책의 서두에서 본서 저작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자기 업무를 지속하고 그 목적을 면밀하게 추구하기 위함이다.

 

Ⅰ.  누가 이 지혜로운 말씀을 기록하였는가?(1절)

 이 말씀은 "솔로몬의 잠언"이다.

1. 그의 이름은 "화평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그의 특성이나 통치 성격 모두가 그 이름에 부합되었다. 즉 그의 기질과 정치는 평화스러웠다. 그 생애가 환란으로 가득하였던 다윗은 기도서를 저술하였다.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

그러나 조용하게 산 솔로몬은 교훈의 책을 저술하였다. "교호가 평안할 때 그들은 교훈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스스로 배우고 남들을 가르쳐야 하며, 환란의 시기에는 남들이나 우리가 배운 바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는 "다윗의 아들"이었다. 그 선한 사람과 혈연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의 명예였고, 그가 다윗의 아들됨을 명예로 생각한 것은 충분히 타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문에 더욱 행복하게 되었던 것이다(왕상 11:12). 그는 훌륭한 교육의 혜택을 입었고, 또 그를 위해서는 많은 기도가 드려졌다(시 72:1). 이 두 가지의 효력은 그의 지혜와 유용성으로 나타났다. 때때로 "의인의 세대"는 이와 같이 축복을 받는다. 곧 그들은 축복을 받으며 저희 당대의 저명한 축복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왕 다윗의 아들로 불리시는데 솔로몬은 다른 일들 뿐만 아니라 이 일로도 그의 예표였다. 즉 주님께서는 "그의 입을 열어 비유나 잠언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3. 그는 "이스라엘이 왕이"었다. 왕이면서 무지한 자의 훈계자가 되고 어린 아이의 선생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치욕도 되지 않았다. 그는 특히 하나님이 알려져 있고 그 이름을 크신 이름으로 여기는 백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백성들 중에서 지혜를 배웠으며 그들에게 그 지혜를 전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지혜를 능가하는 "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온 땅이 그를 찾았다(왕상 4:30; 10:24). 이스라엘의 임금이 그런 놀라운 지혜의 필기사였고 신탁자였다는 것은 그 백성들에게 영예가 되었다.

솔로몬은 경구(驚句)로 유명하였다. 그가 한 말은 언 것이나 무게가 있었고, 놀라게 하고 교훈하는 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를 시중하고 그의 지혜를 듣던 자들은 자기들의 일기장에 기록해 두었던 그의 잠언 삼 천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이 잠언은 그 자신의 기록으로 되었으며 천 개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잠언은 그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혹자는 위경 "Ecclesiasticus"(일명 Ben sira의 지혜서:역주)나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가 신적 영감으로 저작되지 않은 그의 딴 잠언들로부터 편찬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위서에도 매우 훌륭한 명언과 유용한 격언이 상당히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을 다 합친다 해도 본 잠언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로마 황제들은 요즘 왕들이 각기 문장(紋章)을 가지듯 자기 심볼이나 좌우명을 제각기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천금 같은 많은 금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금언은 그들처럼 타인들로부터 빌어온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비상한 지혜의 산물이었다.

 

Ⅱ. 이 잠언은 무슨 목적을 위해 저작되었는가?(2-4절)

이것은 저자의 명성을 높이거나 자기 백성 사이에서 자기 세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로 씌워진 게 아니라 모든 자들이 사용하여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누구나가 이 훈령을 따라 자신을 거느리고 또 세심하게 연구하라고 저작된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준다.

1. 사물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형성하게 하며 우리 마음이 사물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석한 주관을 갖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우리로 하여금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교훈으로 말미암아 획득한 지혜를 신적 계시에 의해 현명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고 타인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도록 사용하기 위해서 이 책은 기록되었다.

2.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즉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이해하고 판단하게 해 준다. 실수를 예방하게 해 주며 우리가 배운 바를 우리 자신에게 적응시켜 주어 쓸모있게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들을 구별"하도록 해 주며 속임을 당하지 않게 하고, 사도가 기도하는 대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여 그 이익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빌 1:10).

3. 우리가 매사에 올바른 언행을 지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3절).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의 훈계를 받도록"하기 위해 우리의 실제 행동을 "정의와 공평과 정직"으로 안내해 주는 지식의 공급자가 될 것이다(3절). 이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지불해야 할 모든 것을 갚도록 조처해 줄 것이다. 모든 종교적 실천으로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하며, 인간에게 돌려 줘야 할 모든 것은 관계로나 직분으로나 계약으로나 그외 어떤 계산으로든, 우리가 지고 있는 의무대로 갚게 해 줄 것이다.

보편적으로 양심적인 사람들은 참다운 지혜인이며 또 그들만이 지혜로운 자이다. 성서의 의도는 우리에게 바로 그 지혜를 가르치려는 것이니 제 일 석판(십계명의 두 서판 중)이 의무에 있어서는 "의로움"을, 제 이 석판이 의무에 있어서는 "공평함"을, 이 두가지 다 포함에서 "정직함"(즉 성실성)을 가르쳐 준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그들을 구별한다.

 

Ⅲ. 이 잠언은 누구의 사용을 위해 기록되었는가?(4절)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소용되지만 특히 다음과 같은 대상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1. "어리석은 자"를 위해, 그들에게 "슬기를 주려고." 여기에 제시된 교훈은 평범하고 쉬우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도 맞는 수준으로 되어 있어서, "어리석은 길손이라 하더라도 이 길에서는 실족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배울 필요성을 느끼며 따라서 교훈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이 잠언을 통해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우둔하더라도 자기 재능이나 능력껏 이 교훈을 받아 들이는 자들은 이로써 슬기로와지며, 자기들이 피해야 할 조가 무엇이며 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은혜로운 재주를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유혹자의 간계를 모면할 수 있게 된다. "비둘기처럼 순결"한(혹은 "무해한") 자는 솔로몬의 규칙들을 관찰함으로써 "뱀 처럼 지혜로"와질 수 있다. 죄악의 길에서 어리석었던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스스로를 규제하기 시작하면 은혜로운 지혜를 지니게 된다.

2.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하여. 청춘은 배우는 시기이며 교훈을 붙잡고 감명을 받으며 얻은 것을 보유하는 때이다. 그러므로 청춘의 시기에 그 마음을 좋은 양념으로 간을 잘 맞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솔로몬의 잠언보다 더 좋은 맛을 나게 하는 것은 없다. 청춘은 성급하고 고집이 세며 무사려하다. "인간은 들나귀 새끼처럼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견제에 의해 제동을 걸 필요가 있으며 이 잠언의 규칙으로 길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잠언대로 자기 길을 조심한다면 그들은 곧 옛 성현들의 지식과 분별력을 얻게 될 것이다. 솔로몬의 본서를 기록하면서 후인들을 염두에 두었었다. 즉 이 잠언을 통하여, 다가올 새 세대의 마음이 지혜와 미덕의 원리라는 풍부한 양념으로 맛들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Ⅳ. 이 말씀은 무엇에 유용한가?(5,6절)

 젊고 어리석은 자라도 이 말씀으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플라톤 학파에게 간다면 문전 축출당하고 말 그들이지만 솔로몬의 학교에서는 따뜻이 맞아 들여진다. 그러면 잠언은 젊고 어리석은 자만을 위한 것일까? 아니다. 여기에는 어린이를 위한 젖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을 위한 강장식도 있다. 이 책은 어리석고 악한 자들을 지혜롭고 선한 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선한 자들을 더욱 지혜롭고 선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설령 우둔한 자와 젊은이가 이 훈계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또 그것으로 더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혜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지혜는 비록 저자 바닥에 앉아 있는 자녀들로 인해서는 그 정당성이 입증되지 못하더라도 지혜 자신의 자녀들에 의해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비록 지혜있는 자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들어야 하며, 자기들 스스로가 너무 지혜로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혜있는 자는 자기 자신의 결점을 인식하고 있다(plurina ignoro, sed ignorantian mean non igncro-즉 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무지하다. 그러나 내 자신이 무지하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 앞으로 전진하는데 이는 "학식을 더 하기"위함이며, 더 많이 알고 더 잘 알고, 보다 명석하게 보다 분명하게 알며, 지식이 사용법을 보다 잘 알기 위함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모든 유용한 학식의 증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Qui non auget scientian, amittit de ea-즉 만약 우리 지식의 창고가 불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가장 위대한 랍비 중 한 사람이 했던 명언이다. 그리고 학식의 증가를 원하는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한다." 현명한 사람은 학식이 더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이득을 끼친다.

1. 상담자로서, 이 지혜의 교훈에서 "명철한 자"는 이 교훈 자체들을 서로 비교해 보고 또 자신의 관찰과도 대조해 봄으로써 점차적으로 "모략을 얻을 것이다." 그는 출세의 유망주로 등장하며 신탁의 상담을 받을 것이고 그에게 공무의 행정이 위탁될 것이다. 그는 "키잡는 자리에 앉게"될 것이다(말이 의미는 그렇다).

근면은 명예를 얻게 되는 첩경이다. 하나님이 지혜로 축복해 주신 이들은 자기들이 활동 영역에서 그 지혜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주의 자문역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 더욱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일이고, 욥이 자기 지혜로 그러했던 것 같이(욥 29:15,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었다") 불쌍한 자의 조언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자비로운 일이다.

2. 해설자로서(6절)-즉 "잠언을 이해하는" 해설자로서. 솔로몬 자신은 수수께끼를 해설하고 난문난제를 푸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기문난제 놀이는 옛날 동방의 군주들에게는 매우 인기 높은 오락이었다. 솔로몬은 바로 스바의 여왕이 그를 골려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낸 물음을 척척 알아 맞힌 장본인이었다. 이제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독자들에게 최선의 목적에 쓸모가 있을 바로 그 재능을 갖추도록 하려고 기도한다. "저들은 잠언과 심지어 그 해석(우리 성경에는  비유)까지도 깨달을 것이다. 해석을 못하면 잠언은 깨어지지 않는 호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지혜로운 말을 들을 때에 비록 그것이 비유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의미를 포착하게 될 것이며 그 사용하는 방법까지도 알게 될 것이다." "지혜있는 자의 말"은 때때로 "오묘한 말"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깨닫기에 어려운"것이 있다. 그러나 성서에 정통하여 "신령한 일을 신령한 것으로 분별"할 줄 아는 자들(고전 2:13)에게는 그런 말씀도 쉽고 든든한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을 깨닫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예, 주여"하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직한 자들이 깨닫는 자가 될 때 그것은 기독교의 명예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사람들은 총명한 자가 되도록 해야하며, 자기들의 "지식이 증가되도록 하기 위해 이리저리 달려야 하며"그 수단의 이용에 고심해야 한다.

    
경외함과 공경(잠언 1:7-9)

 

"젊은이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가르치려고" 기도하였던 솔로몬은 그 목적을 위해 여기에 지켜져야 할 두 가지 일반적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이 두가지 기본 도덕률로 자기의 금언을 시작하는데 그중 전자는 극히 타락된 표현으로 되어 있다. primum, deos immortales cole, parensque hmora-즉 첫째, 죽지 않는 신들을 경배하라. 그리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젊은 사람들은 바람직한 모습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도록 해야 한다.

 

Ⅰ.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기들의 지존자로서 존중하게 하자.

1.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진리를 기록하고 있다(7절). 난외주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주요 부분"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지식의 머리인 것이다.

(1) 즉 알려진 모든 일 중 극히 명백한 것은 "하나님은 경외 받을 분이시며" 존중받고 섬김을 받고 경배 받을 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식의 근원이 되며, 따라서 이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2) 온갖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극히 필요한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성스런 경외감으로 사로잡혀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생각이 그에게 복종하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어진 교훈으로 유익을 얻을 자격도 없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훈에 대하여 알 것이라"(요 7:17).

(3) 우리의 모든 지식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에서 비롯해야 하듯 모든 지식은 신의 경외를 지식의 완성과 중심으로서 지향해야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자들은 충분히 아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매사에 있어서 그를 기쁘시게 하기에 전력하며 어떤 일에 있어서 그를 노엽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것은 지식의 "알파요 오메가." 즉 지식의 전부이다.

2. 우리이 모든 지식 추구에서 지향하고 편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이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 그는 "미련한 자(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무신론자들)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또 그의 은총도 갈구하지 않는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진로를 피하고 그의 은총을 획득할 수 있는지 말해 준다고 해도 감사해 하지 않을 것이다. 전능자에게 "우리로부터 떠나가시오"하고 말하며, 그를 경외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에게 반항하는 자들이 설사 하나님의 길에 관한 지식을 원치 않고 그 훈계를 무시한다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성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은 미련한 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기지에 대한 예찬론자인 척하더라도 실제로는 지혜에 생소한 자들이고 지혜의 적인 것이다.

 

Ⅱ. 청년들로 하여금 부모를 자기들의 선배로서 존중하게 하자(8,9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어라."

그가 의미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자녀가 그를 주시하고 자기 말을 준수하며, 자기 문하생들과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모든 자들이 자기를 저희 아비로 존경하며 자녀의 심정으로 자기 교훈에 주목해야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자녀가 자기들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며 율법의 제 5계명을 따라서 부모가 베푼 고결하고도 경건한 교육에 순응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1. 그는 부모들이 자기들이 모든 지혜로 자녀를 훈계하며 자기들의 모든 권위로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법을 베풀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지사로 여긴다. 자녀들도 이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부모는 그들에게 훈계없이 율법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즉 인간적인 줄로 그들을 끌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가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할 때 그 이유도 함께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고 방종하기 쉽다. 따라서 훈계와 함께 법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뿐만 아니라 명령도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자기 자녀들의 훌륭한 교육을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한다해도 충분치 못한 게 자녀 교육인 것이다.

2. 그는 자녀들에게 부모가 주시는 좋은 교훈과 법을 받기만 할 뿐 아니라 간직하기도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1) 부모의 교훈을 기꺼이 받아야 한다.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 그것을 듣고 주의를 기울이라. 듣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라."

(2) 굳은 마음으로 그것을 보유해야 한다. "저희 법을 떠나지 말라. 네가 장성하여 가르치는 자들과 다스리는 자들 아래 더 이상 있지 않을 때가 되더라도 너는 자유분방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네 어미의 법은 네 하나님의 법을 따른 것이므로 결코 파기되어서는 안 된다. 너는 네가 마땅히 가야만 할 길로 훈련을 받아 왔다. 그러므로 네가 늙더라도 너는 그 길에서 떠나면 안 된다." 혹자는 이방인의 윤리와 펠샤인과 로마인의 법이 자녀의 그 부친에게 대한 공경만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하여 하나님의 법은 어머님의 존경도 확보해 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3. 그는 이것을 매우 은혜롭고 우리에게도 명예를 가져오는 일로 권장하고 있다. "네 부모와 훈계와 법을 주의 깊게 지키며  그에 따라 살아 간다면 그것은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 될 것이요(9절),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귀한 장식물이 될 것이며, 그것은 저희 목에 금사스를 매단 사람들처럼 너를 매우 돋보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명령을 우리의 관리 되게 하며 제 1급 기장인 SS목걸이가 되게 하자. 우리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탐내야 한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관이나 목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세상이 재물이나 지위로 보다는 자기들의 미덕과 경건으로 스스로를 가치있게 하는 자들은 참으로 가치있는 자들이며 소중히 여겨질 것이다.


악한 자의 유혹에 대한 경고(잠언 1:10-19)

 

여기에서 솔로몬은 청년들에게 그들의 지혜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일반적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곧 나쁜 친구의 함정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잠언도 역시 이런 경고로 시작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활기찬 신앙과 일상적 생활에 대하여 이보다 더 파괴적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10절). "내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며 네게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 악한 자(혹은 죄인)가 너를 꾈지라도 너는 �지 말라."

이 말씀은 부모가 자식들을 세상에 보낼 때 할 수 있는 좋은 조언이다. 사도 베드로도자기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같은 말을 하였다(행 2:40).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악인들은 타인들을 멸망자의 길로 유혹하기에 얼마나 부지런한가. 그들은 꾀고야 말 것이다. 죄인들은 죄를 지음에 있어 동반자를 희구한다. 타락한 천사들은 죄를 짓게 되자 곧 유혹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위협하거나 논쟁하지 아니하고 아첨과 아름다운 말로 꾀는 것이다. 그들은 갈고리에 미끼를 달아 가지고는 방심한 청년을 낚아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저히 악업에 딴 사람들을 끌어들여 동업하게 하고, 말하자며 그 죄에 같이 착고를 차게 만들어 놓고서도, 자기들은 보다 적게 응징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인 것이다. 그들은 그 청년에 대해 한층 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2. 청년들은 그 악인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너는 �지 말라(동의하지 말라는 뜻임). 그렇다면 그들이 너를 꾀기는 하나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듯이 말하지 말며, 그들이 행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네게 원하는 대로 행하지도 말라. 또한 그들과는 교분을 갖지도 말아라."

 

Ⅰ. 이 경고를 강력히 하기 위해 그는 죄인들이 유혹할 때 사용하는 현혹적인 설득의 수법과 불안정한 영혼을 기만하기 위해 구사하는 감언이설의 기교를 폭로하고 있다. 그는 자기들의 패거리에 끌어 넣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는 노상 강도를 묘사한다(11-14절). 그들이 여기에서 청년에게 무슨 행동을 바라고 있는지 살펴 보자. "우리와 함께 가자(11절). 우리와 교제하자." 처음에는 그들이 이것 이사 더 요구하는 것이 없는 것같이 보이나 교제의 요구는 점점 더 높아진다(14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자. 들어와 우리 함께 손잡고 네 힘과 우리 힘을 합치자. 그리고 같이 살고 같이 죽기를 맹세하자. 너는 우리와 꼭 같은 대우를 받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 함께 전대를 하나만 두어 우리가 함께 번 것은 다 같이 즐겁게 쓸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그들이 노리는 바이다. 그들은 두 가지 부당하고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도모하며 그것으로써 저희 희생물을 함정에 빠뜨릴려고 유혹한다.

1. 그 한가지는 그들의 잔인성이다. 그들은 피를 갈망하며 자기들에게 아무런 화를 끼치지 않는 순결한 자들을 증오하는데, 이는 그 결백한 자들이 정직함과 근면함으로 자기들을 부끄럽게 하며 죄를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만히 엎드려 그들의 피를 기다리며 그들은 숨어 기다리자. 결백한 자들은 아무 죄도 자각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위험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무장하지 않은 채 여행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해치기는 훨씬 수월하다. 오! 그들은 산채로 삼키면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12절) 이들 잔인한 자들은 굶주린 사자가 어린 양을 삼키는 만큼이나 탐욕스럽게 이 일을 행할 것이다. 만약 "피살자의 유류품 때문에 살해자들의 정체가 탄로날 것이다"라는 이의가 제기된다면, 그들은 "그럴 위험성은 없어 우리는 그들을 매장하듯이 통채로 삼켜 버릴테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딴 사람을 멸하는 게 즐거움이 될 정도록 인성이 타락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 또 하나는 그들의 탐욕스러움이다. 그들은 그 일로 훌륭한 노획물을 얻었으면 하고 바란다(13절). "우리는 이 사업에 종사함으로써 온갖 보화를 얻으리라. 그 일로 우리 목을 건다고 한들 어떠랴? 우리는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세상 물질에 대해 그들이 품는 생각. 그들은 그것을 "보화"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은 실체도 아니며 귀중하지도 않다(보화라는 말은 원문에서 영어로 precious substance라고 번역되 있는데 substance는 실상, 실체, 물질의 뜻임:역자주). 그것은 그림자요, 허사이며 특히 강탈로 획득한 것은 더욱 그러하다(시 62:10).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사람에게 아무런 확고한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값싸고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의 재물을 보배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자기들의 목숨까지, 아마 영혼까지도 거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귀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을 "보화"로 간주하는 오산을 범하여 파멸에 이르게 된다.

(2) 그들이 기대하는 재물의 풍부함.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집을 채우리라."

죄악으로 장사하는 자들은 큰 매매를 고대하고 그 거래가 무한한 흑자로 될 것을 바란다(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시험하는 자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먹는다는 꿈"만 꾸고 있다. 따라서 지붕꼭대기이 풀과 같이, 온 집안에 그득한 것 같던 것이 거의 한 웅큼도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Ⅱ. 그는 우리가 왜 그들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써 이 길의 유해성을 제시해 준다(15절).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그들과 연합하지 말라. 너는 가능한 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그들의 본을 받지 말며 그들이 하는 대로 행하지 말라." 우리 발이 죄의 길을 밟기 쉽다는 것이 바로 우리 본성의 타락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길을 향해 한치라도 발을 떼는 날이면, 우리발을 금하고 우리 스스로를 견재하기 위하여 필요한 강제력을 사용해야 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들의 길은 그 본질상 얼마나 해독을 끼치는가!(16절)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하나님께서는 불쾌하고 인류에게는 해로운 악에게로 달려가는데, 이는 그들이 "피흘리는 데 빠르기 때문이다."

죄의 길은 내리받이 길이다. 그 길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멈추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길로 계속 행진하기를 오래하면 할수록 그들에게는 더 빠른 가속도가 붙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나쁜 짓을 충분히 범하지 못하게 될까봐 전전긍긍이라도 하는 듯이 속히 행하며,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작정이나 한 듯 한 가지 범죄가 끝나기 무섭게 다음 행악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한가로이 진행할 듯 말했지만(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피를 흘리자, 11절) 우리는 그들이 아주 급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사탄이 "저희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그 결과는 유독(有毒)할 것인가! 그들이 이 악한 길이 정녕코 그들 자신의 파멸로끝날 것이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길을 고집하고 있다.

(1) 이 일에서 그들은 자기를 잡으려고 펼쳐져 있는 그물을 보면서도 아무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미련한 새와 같다. 그 새는 미끼에 유혹되어 그 물 속에 들어가고 자기 눈이 주는 경고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17절).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참새 몇 마리보다 더 귀한"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새보다 더 많은 지각이 있어야 하고 더 신중히 행동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중의 새보다 더 지혜롭게 만드셨다"(욥 35:11). 그렇다면 우리가 새처럼 어리석어서야 될 것인가?

(2) 그들은 새보다 못하며 우리가 때때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못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다. 새잡이는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인 줄 알기에 새를 기만하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자기의 길 끝에 있는 파국을 본다. 살인자나 도둑은 자기들 앞에 도사린 교도소와 교수대를 바라본다. 아니,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지옥도 볼지도 모른다. 저희 파수군들은 그들이 필경 죽으리라고 경고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들은 죄악으로 뛰어들고 군마가 전장으로 질주해가듯 죄악 속으로 돌진한다.

그들이 굴리는 돌은 실제로 그들 자신에게 떨어질 것이다(18, 19절). 그들은 타인의 피와 생명을 빼앗기 위해 가만히 엎드려서 숨어 기다린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들 자신의 피와 그들 자신의 생명"을 노린 결과가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수치스런 종말에 다다를 것이다. 그들이 설사 치안 책임자의 칼날을 모면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신의 응징(천벌)이 있을 것이다." "복수"는 그들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무엇을 얻으려는 저희의 탐심은 저희에게 반나절의 생명조차 허락하지 않거나 저희의 월수(달수)를 중간에서 끊어버릴 행위도 서슴치 않고 해치우게 만든다. 그들은 "주인의 생명을 잃게 하고" 나서 딴 주인에게로 넘어가 버리는 그러한 재산을 자랑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일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천하를 얻어도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그는 그 이상 더 세상을 즐길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는 일이야 말해 무엇하랴! 많은 자들이 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러하듯 영혼이 멸망과 파멸 속으로 익사해 버리고 만다면 얼마나 무익하랴! 솔로몬은 노상에서 강도짓하려는 유혹만 예시했을 뿐이지만, 이것으로 죄인들이 사람을 꾀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악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술취한 자와 음란한 자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여기 이 땅에서의 파멸과 영원한 파멸을 초래하는 쾌락 속에 탐닉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도 또한 좇지 말아야 한다.

    
지혜에 대한 주목을 촉구(잠언 1:20-33)

솔로몬은 이제까지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주었는데 이제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부르심을 경청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위험스런 일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솔히 여기다가는 영원히 그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 보자.

Ⅰ.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가?-즉 "지혜를 통하여." "밖에서 부르"는 것은 바로 "지혜"이다. 이 단어는 "지혜들"(wisdoms)이라고 복수형으로 표기돼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무한하신 지혜가 있음과 아울러 "온갖 지혜"가 있는 까닭이다(엡 3:10).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지혜로써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모든 의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말씀에도 권고가 있으시다.

1. 인간의 오성은 지혜이며, 본성이 빛이요 법이며, 이성의 능력이요 기능이며, 양심의 직분이다(욥 38:36).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며 타이르신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인간은 어디로 가나 자기 뒤에서 "이것이 길이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그것은 항상 작은 소리로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 그것은 부르짖기도 한다.

2. 시민의 정부는 지혜이다. 지혜는 하나님의 율례이며 장관들은 그의 대리인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오만한 자에게 오만히 행치 말라"(혹은 "우매자에게 우매하게 행치 말라"). 말씀하셨던 것이다(시 75:4). 법정이 베풀어지던 "성문 어귀"에서 국가의 지혜인 재판관들이 하님의 이름으로 악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며 개심시킨다.

3. 하나님의 계시는 지혜이다. 계시의 모든 훈령과 법은 지혜 그 자체와 꼭같이 지혜롭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에 의하여서나, 우리에게 축복과 저주를 제시하는 모세 율법에 의해서, 또 지식을 담고 있는 제사장의 입술로나 자기 종된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 말씀의 모든 사역자들을 통하여 자기 마음을 죄인들에게 선언하시고 길거리나 사법 재판소에서 소리 높여 선포하듯 명백히 그들에게 경고를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말씀 안에서 사건을 상의하실 뿐만 아니라 인생들과도 그 일에 대해 토론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

4.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지혜"이시고, 또 "지혜들"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으며," 그는 모든 신적 계시의 중심이시고 "본질적 지혜"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죄인을 위해 변론도 하고 그들에게 판결도 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지혜"로 칭하신다(눅 7:35)

Ⅱ. 그는 우리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부르시는가?

1. 매우 공공연하게. 그는 말씀의 혜택을 받으려 하는 자는 누구든 환영하시고 또 모두가 다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관심을 가지셨으며, 귀를 가진 자는 누구든지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부르셨다. 지혜의 규칙은 "바깥 길거리에서" 공포된다. 비단 학교나 제왕의 궁전에서만 지혜의 비결이 전달되는 게 아니라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성문 어귀와 성중"을 오가는 갑남을녀에게도 선포된다. 이것은 고기가 많은 곳에서는 몇 마리라도 잡히라는 바램으로 편안히 던지는 복음의 그물이다. 이 일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는 성전이나 사람이 운집한 곳에서 공공연히 가르치셨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셨으며"(요 18:20), 그의 사역자들에게도 "집위에서" 그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부하셨다(마 10:27). "나는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노라"(사 45:19).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는 말이나 언어도 없다." 진리는 구석진 곳을 찾지 않으며, 미덕은 미덕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이다.

2. 매우 애처롭게 지혜는 "소리 질며," 간절히 바라는 자처럼 또 다시 "소리 지르고 있다.""예수께서는 서서 부르셨다." 지혜는 "그 소리를 발하며," 가능한 대로 분명하게 그리고 애정이 뚝뚝 떨어지게 "자기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듣고 귀 기울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Ⅲ.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1. 그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이 우매를 완고히 고집하고 있음을 꾸짖으신다(22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지혜가 여기서 꾸짖고 충고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그들은 "어리석은" 범주에 드는 자들로서 괄시를 받을 만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는" 그런 부류이어서 전혀 가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대해서 조차 어떻게 든 방법을 강구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부르는 대상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1] "어리석음을 좋아 하는 어리석은 자들." 죄는 어리석음이며 죄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게 행동하며 매우 우매한 짓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들의 상태는 매우 악화된 것으로서 그들은 어리석음을 사랑하고 선악에 대한 자기들의 우둔한 견해를 좋아하며, 하나님의 길에 대한 저희의 어리석은 편견을 애호한다. 그들이 능사로 알고 하는 것은 곧 넋빠진 일을 행하는 것이며, 기껏 잘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기만  속에서 희희낙낙하고 저희 악함 속에서 자화자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거만을 기뻐하는 거만한 자들." 그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소리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교만한 사람들이며, 모든 인류를 희롱하고 자기 구역에 들어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놀려대는 실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 지목하는 것은 신앙 생활을 비웃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가장 죄인들로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법에 승복하는 일을 우습게 알고 그의 말씀의 견책과 권면에 코웃음치며, 신성하고 진지한 모든 일을 무시해 버리는 데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자들이다.

[3] "지식을 미워하는 미련한 자들." 미련한 자 이외에 지식을 미워하는 자는 없다. 경건한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오직 종교의 적이다. 그리고 우매자들 중 가장 못된 자들은 훈계받고 개선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며 진지한 경건에 대해 고질적 반감을 품고 있는 자들이다.

(2) 책망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너희가 어느 때까지 그러하겠느냐?" 이것은 하늘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심과 개선을 바라시며 그들의 파멸을 원치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이 고집과 지체함을 즐거워하시지 않으시며, 은혜를 베푸시게 될 때를 기다리시고 이 사건을 그들과 기꺼이 변론하려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2. 그는 그들에게 회개하여 지혜자가 되라고 인도한다(23절).

(1) 그 교훈은 간명하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만약 우리가 악한 것으로부터 선한 것에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망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책망은 바로 돌이키라는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키라, 즉 너의 정상적 마음으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네 의무를 돌아서며, 돌아서서 생명을 얻으라.

(2) 주어지는 약속들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리석음을 좋아하는 자들은 자신이 자기 자신의 마음과 길을 변화시키기에 전혀 도덕적 무능력 상태하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신(영)을 부어 주리라.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에 착수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네안에서 나와 함께 작용하실 것이고 너로 하여금 선한 의지와 선한 행위를 아울러 소유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만약 이 은혜가 없다면 너는 능히 이것을 행할 수 없으리라."

네 스스로 도우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도와 주실 것이다. "네 마른 손을 내보이라."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손을 강하게 하며 고쳐 주실 것이다.

[1] 이 은혜이 공급자는 성령이시며, 또 그렇게 해 주실 것이 약속되어 있다.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기름처럼, 물처럼 부어 주리라." 너희는 성령을 충만 충만히 받을 것이며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요 7:38).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마다 성령을 주실 것이다."

[2] 이 은혜의 수단은 말씀이다.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돌이키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너희에게 알려지도록 하겠으며,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도록 해 주겠다." 진실된 참회에는 특별하신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는 그것을 정직히 구하고 그것에 승복하는 이들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주어질 것이다.

3. 그는 이러한 모든 은혜의 수단과 방법에 대해 계속하여 완강히 버티는 자들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규모가 크고 매우 무서운 것이다(24-32절). 죄인들을 돌아오라고 불렀던 지혜는 그 부름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살펴 보기 위해 잠시 숨을 돌이켜서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그러나 그들이 정직히 말하지 않으므로"(렘 8:6) 지혜는 그들에게 종국에 가면 어떻게 될지를 계속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1) 죄악이 상세하게 논술되는데, 그것은 극히 노엽게 하는 죄들이다.

저 큰 날에 주제넘은 죄인들에게 내릴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 본다며 그들이 그와 같은 일을 당해야 마땅하며 여호와께서는 그 일에 있어서도 의로우시다고 말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의 복음의 말씀들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율법"의 저주와 "죄의 율법"의 지배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마다 하였던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위험을 경고해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자기 손을 펼치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비참한 상태에서 구출해 내시려고 "자기 손을 내미셨으나" 그들은 거절하였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주목하지도 않았다. 또 어떤 자들은 악의에 차 있었고 고의적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단히 부인하고 배격하였던 것이다(24절).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좋아하셨으며 지혜있는 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회복시키려고 취하신 모든 방법에 대하여 한사코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부여하신 자비 속에 "그의 손을 펴셨다."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잘못을 고쳐 주려는 그 손의 역사를 원하지 않으니 모든 것은 허사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손의 운행을 그 입의 선포와 마찬가지로 간주하였고 그의 입의 선언을 거부하듯 이도 배척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충고하셨다. 그들이 잘못 행동한 데 대해 견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더 잘 행할 수 있도록 권면도 하셨으나(이들은 "교훈의 책망"이요 사랑과 호의의 표징이었다) 그들은 "그의 모든 교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멸시하였다." 마치 그에게 꾸중받는 일은 자기들의 체면에 손상에 가고 자기들답지 않는 일이라도 되며 자기들은 책망받을 만한 일이라곤 도무지 행한 기억도 없다는 듯이 "그의 책망을 받지 않았다"(25절). 이 말씀은 30절에도 반복되어 있다. "그들은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권면을 멸시하며 배척하였다. 그들은 책망을 비난이라고 불며 그것을 모욕으로 간주하였다.(렘 6:10). 아니, 그들은 내 모든 책망을 농담이라도 되는 듯이,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는 말인 듯이 모두 멸시하였다."

책망과 선한 교훈에 귀머거리가 되는 자들은 멸망의 낙인이 찍힌 자들이 되는 것이다.

[3] 그들은 정당한 이성이 지배와 경건한 신앙에 복종하도록 권면을 받았으나, 이러한 것에 모두 반감을 품었다.

첫째, 그들은 지식을 미워하였기 때문에(29절)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신적 진리의 빛을 증오하였던 까닭은 그 빛이 저희의 악한 행위를 그들에게 들어내 주기 때문이다(요 3:20). 그들은 자기들이 알면 견딜 도리가 없는 것을 듣기 싫어하였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경건한 신앙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저희 마음과 저희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하기를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항상 하나님을 두도록" 요구받았으나 그들은 오히려 그를 내�고 여호와의 경외를 "자기들 뒤에"두려고 하였다.

"여호와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에게 "지식이 없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2) 선고가 내려지는데 그것은 분명한 파멸의 언도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승복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정녕 그의 진노하심과 저주 아래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며, 복음 그 자체로도 그들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가 자기들 앞에 제공되었을 때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그의 공의의 희생물로 전락함은 당연하다(잠 29:1). 여기에 나오는 위협적인 경고는 저 큰 날의 심판에 가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며, 참회하지 않는 자들은 그 때에 영원한 불행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의 심판에서도 다소 그 전조를 보이고 있다.

[1] 목하 죄인들은 평온무사한 가운데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평안한 생활을 누리며 슬픔이나 근심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보라!

첫째, 그들에게 "재앙이 이를 것이다"(26절). 병이 찾아올 것이니 그 질병들은 바로 그들이 죽음의 구속 영장이나 명부의 사자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 밖에 마음이나 재산에도 여러 가지 재난이 덮쳐 하나님을 멀리 둔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줄 것이다.

둘째, 그들의 재앙은 그들에게 큰 공포를 가져다 줄 것이다. 불안이 그들을 사로잡아 그들은 일이 설상가상으로 악화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심판의 공의가 널리 발효될 때 "시온에 있는 죄인들은 두려워하며, 무서움이 사특한 자들을 놀라게 하리라." 죽음은 그들에게 "왕처럼 두려움"을 줄 것이다(욥 15:21  이하;18:11 이하). 이러한 불안이 그들을 끊임없이 고문할 것이다.

셋째,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로 두려움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임할 것이다"(그들이 불안해 하던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 두려움은 거대한 힘을 지닌 홍수가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 듯이 "광풍처럼 임하리라." 그것은 그들의 "멸망"이 될 것이며, 그들의 전체적이고도 최종적 멸망이 될 것이다. 그것은 "폭풍처럼" 임할 것이니 그것은 모든 겨를 갑작스럽고도 강하게 싹 쓸어가 버릴 것이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용납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공포에 무방비상태로 노출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두려움은 타당한 것이다.

넷째, 그렇게 되면 그들의 두려움은 절망으로 변할 것이다.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라"(27절). 그들은 자기들이 무서워하던 함정에 떨어졌고 탈출할 길도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사을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다(들었다)"(삼하 1:9)고 절규한다. 그리고 지옥에는 괴로움으로 "슬피 울며 이를 갊고 있고," 죄인의 "영혼에게는 환란과 곤고,"즉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열매가 있다(롬 2:8, 9)

[2] 지금은 하나님께서 저희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지만 그 때에는 "그들이 재앙을 마날 때에 웃으실" 것이다(26절). "너희가 나의 교훈을 비웃었던 것같이 나도 너희의 곤란을 비웃을 것이다." 경건한 신앙을 조소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온 세상 앞에서 스스로 조소당하게 될 것이다. 의인들도 "저희를 비웃"을 것이다(시 52:6).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웃으시는 까닭이다. 이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동정으로부터 영원히 차단되어 버릴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비에 대항하여 너무나 오랫동안 죄를 지었으므로, 이제는 그 죄 때문에 자비를 아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의 눈이 보아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도 않으실 것이다." 비록 저들이 "돌이켜서 살게"되기를 원하셨지만, 이제 그의 공의는 그들의 멸망으로 빛나실 것이며 그는 저희 파멸을 기뻐하시게 될 것이다. "아! 내가 내 대적들에게서 나를 편하게 하리라."

[3]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즉시 들으시며 그들이 자기에게 구하려 하기만 한다면 자비로써 그들을 기꺼이 맞으신다. 그러나 그 때에는 문이 닫혀질 것이며 소리쳐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28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라고.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다. 그 때에는 그들이 거절하고 경시하는 바로 그 자비에게 은혜입기를 사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겠노라. 이는 내가 부를 때 그들이 대답하려 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 때의 모든 대답은 한결같이 "내게서 떠나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가 될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사울의 경우에서처럼 이 생에서도 몇몇 사람이 당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림"이나 "선지자"로써도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 생명이 있는 동안엔 기도할 수 있는 여지와 행운을 빌 소망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마지막 심판 때의 가차없으신 공의를 언급하는 게 틀림 없다. 그 때에는 하나님을 멸시하던 자들이 "그를 이른 아침에(즉 부지런히, 열심히) 찾아도" 허사일 것이다. "그들은" 그를 만날 만한 때에는 그를 찾지 않았으므로(사 55:6)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지옥에 있는 부자는 구걸하였지만 거절당하였던 것이다.

[4] 지금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길에 열중하며 자신의 꾀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자업자득("제가 담근 술은 제가 마셔야 한다")이란 격언대로 그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던 것을 충분히 가지게 될 것이다(31절). 즉 그들은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그들은 노임은 그들이 한 일 그대로일 것이며 "그들의 운명"은 자신이 선택한 대로 "될 것이다"(갈 6:7, 8).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첫째, 죄는 멸망을 초래하는 자연적 경향성이 있다(약 1:15). 죄인들이 만일 오직 자기 행위의 열매"만을 "먹게"된다면 그들이 비참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

둘째, 망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하며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핑계를 돌릴 수 없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꾀"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계책을 자만하였는데 이제 그 결과도 자랑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혹(혹은 미혹)을 택하여 주신다"(사 66:4)

[5] 지금은 그들의 자신들의 세속적인 재산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것이 저희 파멸을 악화시킬 뿐인 것이다(32절).

첫째, 지금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외면하고 신앙 생활의 제한 조항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바로 그 일이 그들을 멸망시키게 되며 그것에 대한 기억이 그들의 마음을 찢어 놓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지금 자신의 안보와 육욕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킬 것이다"(난외주는 그렇게 해독한다). 그들이 보다 안전하게 느끼게 되면 될 수록 그들의 멸망은 보다 확실해질 것이며 보다 더 두려울 것이다. 즉 "미련한 자의 안일 (형통)은 자기를 멸망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교만심으로 자신의 번영한 모습을 뻐기고,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집착하고, 자신에게 욕망의 기름을 공급하고, 자신의 악의 길에서 마음을 더욱 강팍하게 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4. 그는 지혜의 훈계에 승복하는 모든 자들은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33절). "오직 나를 듣고, 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으리라."

(1) "그는 안전할 것이다. 그는 하늘의 특별하신 보호아래서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도 그에게 실질적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2) "그는 편안한 것이며 위험에 대한 어떤 불안함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재앙으로부터 안전할 뿐만 아니라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는 편안할 것이다." "비록 땅이 옮겨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우리는 악으로부터 안전하고 재앙의 두려움으로부터 편안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신앙이 언제나 우리를 지배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상담자가 되게 하라.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안연히 살게" 되고, 저 세상에서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편안"하게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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