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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맹들로 꽉 찬 화사한 그 섬, 핀지랩

은바리라이프 2008. 7. 26. 16:48
  • 색맹들로 꽉 찬 화사한 그 섬, 핀지랩
  • 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지음|이민아 옮김|이마고|400쪽|1만4000원
  • 김수혜 기자 , goodluck@chosun.com
    • 여러분을 보석 같은 섬으로 안내하겠다.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1500㎞를 날아간 다음 존스턴 섬에서 잠깐 지친 날개를 쉬었다가 다시 2400㎞를 날아가야 하는 곳이다. 환영한다. 여러분이 방금 발을 디딘 ‘핀지랩’(Pingelap) 섬은 반짝이는 물을 차고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산호섬이다.

      1994년 여름, 올리버 색스(Oliver Saks·74) 미국 컬럼비아 의대 교수가 핀지랩 섬에 내렸다. 그는 신경학의 권위자이자 ‘의학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리는 문장가이다. 울창한 빵 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꽃과 바나나 이파리를 흔들며 뛰어나왔다. 태고의 숲에서 색스는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두려워 말라. 이 작은 섬은 소리로 가득하나니, 그 소리와 감미로운 공기는 기쁨을 줄 뿐, 아픔은 주지 않으리니.”(87쪽)

      그러나 색스는 하릴없는 휴양객으로 핀지랩에 날아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색맹(色盲)을 찾아 이곳에 왔다. 핀지랩은 전세계에 하나 뿐인 ‘색맹의 섬’이다. 이 색채 화사한 섬에 사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 700명 가운데 57명이 색깔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선천성 ‘전색맹’(全色盲)이다.
    • ▲ 일러스트=이마고 제공

    • 인간의 망막에는 원뿔 세포와 막대 세포가 있다. 망막 한 가운데 있는 원뿔 세포는 사물의 정교하고 미세한 윤곽과 색깔을 인식하고, 망막 전체에 퍼져있는 막대 세포는 빛을 인식한다. 선천성 전색맹은 날 때부터 원뿔 세포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세상이 흑백 TV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사물은 색채가 없다. 명암(明暗)과 농담(濃淡)이 있을 뿐이다.

      선천성 전색맹은 인구 3만 명 당 1명 미만으로 나타난다. 바깥 세상에선 이토록 희귀한 장애가 왜 핀지랩 섬에서는 12명에 한 명 꼴로 나타나는 걸까? 색스는 앞선 세대가 남긴 의학 저널을 꼼꼼히 읽고, 주민들을 진찰하고, 그들의 구전(口傳) 설화와 오래된 문헌을 대조한 뒤, “핀지랩이 색맹의 섬이 된 것은 1775년 이 섬을 덮친 태풍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태풍으로 인구 1000명 가운데 90%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나머지도 대부분 아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20여 명뿐이었다. 푸른 대양(大洋)으로 바깥세상과 격리된 산호섬에서 오랫동안 근친교배가 계속된 결과, 전에는 희귀했던 유전적 특징이 널리 퍼졌다.

      이 책은 색스가 핀지랩, 괌, 로타 등 태평양에 흩어진 섬 세 곳을 돌아보고 그곳의 풍광과 풍토병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지리적 고립은 이 세 섬에서 독특한 문화를 만든 ‘축복’이자 풍토병을 부르는 ‘저주’로 작동했다.

      핀지랩 주민들 중에 전색맹이 유례없이 많은 것처럼 괌과 로타에 사는 차모로 족(族) 사이에선 리티코-보딕 병이라는 희귀병이 빈발했다. 리티코 병은 어느 날 불현듯 사지가 굳기 시작하는 진행성 마비 질환이다. 마침내 호흡 기관까지 마비되면 죽음에 이른다. 고통이 극에 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환자의 정신은 맑고 또렷하다는 점에서 잔혹하기 짝이 없는 병이다. 보딕 병은 파킨슨 병과 비슷하며 왕왕 치매와 함께 나타난다.

      환자를 바라보는 색스의 시선은 한 인간이 고통 받는 다른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불치의 희귀병에 걸린 가족을 수십 년째 정성껏 돌보는 차모로 족을 바라보면서 색스는 17세기 스페인 선교사가 이 부족에 대해 남긴 기록을 떠올린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인정 많게 타고난 사람들이다. 가장이나 그 아내나 자식이 아픈 날에는 마을의 모든 일가친척이 끼니를 날라오는데 전부가 자기네 집에 있는 최고로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다.”(198쪽)

      색스는 “아픈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대신, 공동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차모로 족의 문화와 자신이 떠나온 뉴욕의 병원을 대비시킨다. 뉴욕에 있는 색스의 환자들은 최첨단 생명 유지 장치의 혜택을 받지만 가족에게 고립된 채 죽음을 맞기 일쑤다.

      이 책은 시선이 따뜻하고, 문장이 유려하며, 간명한 가운데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와 유머가 있다. 많이 읽고 깊이 성찰하고 널리 경험한 사람의 차분한 어투로 색스는 태평양의 풍광과 풍토병을 통해 그 이상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맨 뒤에 붙어 있는 95쪽 분량의 주석이 본문만큼 재미있다. ‘모비 딕’을 쓴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이 한때 태평양 마르키즈 군도에서 타이피 족(族) 추장의 양아들이 돼서 추장의 딸과 연애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셨는지? 타이피 족은 식인종이다(3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