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적 단절의 정치사극, <대왕세종> | ||||||||||||||||||
[조민준의 TV읽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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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왕실은 발칵 뒤집어지지만, 이를 알 바 없는 왕자는 내관 장원과 함께 민정 시찰에 나선다. 시전에서 장사를 하며 먹고사는 백성들의 고충을 몸으로 느끼게 된 충녕은 직접 신문고를 울리고, 무사히 돌아온 삼남을 맞아 그의 넓어진 견문을 듣게 된 태종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득하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여느 사극에서 다루어 왔던 여느 영웅의 성장담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부터 <대왕세종>은 의외의 길을 걷는다. 태종은 내관 장원을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로 처벌하여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고, 그 과정을 충녕에게 똑똑히 봐두도록 한다. 왕자의 신분으로 백성들을 위해 마련한 신문고를 격에 어울리지 않게도 울린 탓에, 충녕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신료들의 목소리가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태종은 이 같은 극약처방을 통해 그를 잠재워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충녕의 총명함이 더 빛을 발하게 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형제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그 스스로가 이미 겪어야 했던)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태종은 충녕에게 ‘왕위 계승서열 3위’ 왕자의 현실과 함께 정치판의 무서움을 직시하게끔 해 준 셈이다. 하여 어릴 때부터 서충(책벌레)이라는 별명으로 이미 많은 것을 ‘머리로’ 깨친 충녕은 그 진리가 현실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자비하게 깨질 수 있는지를 ‘몸으로’ 겪으면서 성장하게 되고 <대왕세종>의 전반부는 그 과정을 묘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며, 권력의 운용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타협의 묘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사극에서 이토록 현실적인 권력자의 성장담을 만난 적이 없다. <대왕세종>의 이 같은 단절적인 혁신성은 단지 충녕 캐릭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이 드라마를 처음 접하는 시청자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가 바로 ‘조정 대신들이 누구 편인지 모르겠다’는 점 때문인데, 그만큼 <대왕세종>에 등장하는 신료들의 캐릭터는 각자의 욕망에 따라 첨예하면서도 복잡하게 벼려져 있다. 공식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란에는 신료들을 편의상 ‘양녕대군 지지파’와 ‘충녕대군 지지파’로 나누어 놓았지만, 입장이 바뀔 때도 있는데다 그들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른 파벌이라 할 수 있는 까닭에 명확한 구분도 아니다. 그런고로 드라마의 프로타고니스트(고대 그리스극의 주연배우. 현재는 극적 작품의 중심 인물)인 충녕대군의 지지 세력이라 하여 도덕적으로 옳은 인물들도 아니며 안타고니스트(주인공에 대립하는 악역)인 양녕대군 지지 세력이라 하여 비도덕적인 인물들이지도 않다. 결국 그들 모두가 자신 혹은 가문의 영달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이들인 만큼 극중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황희 정도를 제외하면 양녕대군 지지파건 충녕대군 지지파건 보여주는 행태는 대동소이한 것이다. 이 또한 현실정치와 그리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아니다. 물론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판타지의 제공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여 고래의 정치사극들 속 주인공들이 선한 의지를 결단력있게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어 고전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왔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단지 그 판타지의 반복 재생산만으로 연명해 왔던 우리의 정치사극은 어느덧 내적 생명력을 가지기 힘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법은 결국 리얼리티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며, <대왕세종>은 거기에 근접한 답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월간 판타스틱 편집장·드라마비평가 | ||||||||||||||||||
최초입력 : 2008-03-12 16:5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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