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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제대로 보고 있나요?

은바리라이프 2008. 7. 26. 16:58
당신, 제대로 보고 있나요?

색맹은 망막의 시세포에 이상이 있어 색깔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유전 형질이다. 부분색맹과 전색맹으로 나뉘는데, 부분색맹 중 적록색맹은 남성 20명당 1명꼴로 흔한 편이고, 빛을 받아들이고 색을 구별하는 시세포인 원뿔세포(추상체)가 없거나 거의 기능하지 않는 전색맹은 3만~4만명당 1명꼴로 희귀하다. 적록색맹이 ‘오렌지색 풀밭’처럼 붉은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전색맹은 세상이 온통 흑백사진처럼 보인다. 이쯤 들으면 “쯧쯧. 세상 살기 힘들겠네”라든지 “온통 잿빛이라니 무슨 재미로 살아?” 하는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신경학자인 올리버 색스의 생각은 다르다.

‘완전한 색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보는 세계는 어떨까? 그 사람들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할까? 그들도 우리가 보는 세계 못지않게 강렬하고 활기 넘치는 세계를 갖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명암과 질감과 움직임과 깊이를 뚜렷이 인지하는 능력이 더욱 발달해 어떤 면에서는 우리 것보다 더 강렬한 세계, 실체가 강조된 세계-우리로서는 위대한 흑백사진 작품 안에 담긴 울림을 통해서 어렴풋이 알아챌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사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사소한 것, 하나마나 한 것에나 한눈을 파는 우리를 도리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올리버 색스 지음 ‘색맹의 섬’, 이마고)

올리버 색스에게 이런 궁금증을 풀 기회가 찾아왔다. 태평양 미크로네시아의 섬 핀지랩. 선천성 전색맹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색맹의 섬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안과의사인 봅과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시각을 연구하는 생리학자이자 전색맹인 크누트가 동행했다.

색맹의 섬 핀지랩

특히 크누트는 일행에게 전색맹의 특징을 사전에 관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전색맹자는 태양 아래서는 이중삼중으로 선글라스를 끼고도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거나 찌푸리고, 경련을 일으킨다(안진증). 원뿔세포가 없기 때문에 시력이 정상의 10분의 1밖에 되질 않아 식당의 차림표를 읽으려면 4배율 돋보기를 꺼내 들어야 할 정도다. 대신 새벽과 저녁, 달밤에는 고양이처럼 편안하게 움직일 뿐만 아니라,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는 데 선수다. 이런 타고난 능력을 살려 크누트는 흑백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방문한 핀지랩은 적도 부근, 우리에게도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괌·사이판과 1946년에 원자폭탄 실험이 진행된 비키니 섬 사이의 산호섬으로, 폰페이 섬을 둘러싸고 점점이 박혀 있는 8개의 산호섬 가운데 하나다. 1775년 무렵 핀지랩 거주자는 1000명에 이르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섬을 덮친 태풍으로 인구의 90%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나머지도 대부분 굶주리다 죽어버려 몇 주 만에 생존자는 2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고립된 핀지랩 주민들은 불가피하게 근친교배로 인구를 늘려갔고,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색맹의 급증이다. 태풍 사건 뒤 200년 이상 지나자 섬 인구 700명 가운데 3분의 1이 ‘마스쿤(안 보인다는 의미)’ 보유자로 확인됐고, 57명은 전색맹이다. 다른 지역의 색맹 발생률이 3만분의 1 미만인 데 반해 핀지랩에서는 12분의 1이나 됐다. 이 사실만 봐도 핀지랩은 부인할 수 없는 ‘색맹의 섬’이다.

이런 영향은 1950년대에 핀지랩 주민들이 대거 이주한 인근 폰페이 섬에서도 나타났다. 핀지랩 출신이 모여 사는 만드에서는 지난 40여 년간 다른 마을과 접촉이 거의 없었던 탓에 전색맹 ‘마스쿤’이 핀지랩보다 더 흔하다.

핀지랩을 거쳐 폰페이 섬을 여행한 올리버 일행은 ‘색맹의 섬’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타고난 팔자를 탓하며 조상을 원망하는 원주민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마스쿤? 물론, 환한 곳을 기피하고 시력이 형편없는 마스쿤들은 글자가 코에 닿도록 바짝 다가가지 않으면 책이나 칠판 글씨를 읽을 수 없어 학습 장애가 되기 쉽고, 대낮에는 장님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야외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대신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하며, 커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처지에 놓인다. 또 이들이 낳는 자식도 같은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짝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여러분은 색깔만 보지만…”

그러나 그들이 늘 색맹을 탓하며 불행하게만 사는 것은 아니다. 마스쿤들은 형편없는 시력을 대신할 무엇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마스쿤 아이들은 누군가 책의 내용을 한두 번만 읽어주면 마치 직접 책을 읽는 것처럼 암송하는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한다. 노란색과 푸른색을 구별할 수 없다면 잘 익은 바나나는 어떻게 골라낼까? 정상인들 앞에서 단숨에 잘 익은 바나나를 골라낸 마스쿤 제임스(여행 안내자이자 통역)는 말한다. “색깔만 보는 건 아니에요. 우린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또 알아요. 여러분은 그냥 색깔만 보겠지만 우린 모든 걸 따지는 거지요.”

색맹 여인이 짠 깔개의 아름다운 무늬는 환한 세상으로 나오면 마술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들은 색채의 대조로 무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밝기를 이용해 섬세하게 무늬를 짜 넣기 때문에 환한 햇살 아래에서 정상인들은 바탕과 무늬를 구분해내기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무늬를 제대로 보려면 완전한 색맹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마스쿤은 최고의 밤 낚시꾼이다. 물고기가 수면 아래 어두침침한 곳에 있다가 물 위로 뛰어오를 때 뻗는 지느러미가 달빛에 반짝이는 것을 누구보다 잘 본다.

‘색맹의 섬’ 여행에 대한 영감을 안겨준 프랜시스 퍼터먼(전색맹으로 태어난 여성)은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색깔이 빠진 삶’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색맹 같은 어휘는 우리에게 없는 것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가 보고 느끼며 우리가 이루는 그런 세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요. 저에게 해질 녘은 마법 같은 시간입니다. 극명한 명암 대비가 없어 시야가 확장되고 시력도 갑자기 좋아집니다. 제 인생 최고의 경험은 해질 녘이나 달빛 아래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저는 보름달 아래 요세미티를 돌아다녔고, 제가 아는 어느 색맹은 거기서 야간 경비로 일했습니다. 저에게 가장 행복한 추억은 거대한 미국삼나무 숲 속에 누워 별을 구경하던 그 순간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야간 시력의 삶(전색맹)이 주간 시력의 삶(정상시력)보다 불행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퍼터먼의 말대로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만 강조하는 ‘색맹’이라는 말은 다수의 횡포일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다수의 정상 시력인이 평생 느낄 수 없는 미묘한 명암의 세계를 분별하는 희귀한 능력의 소유자다.

올리버 색스는 ‘색맹의 섬’ 방문을 앞두고 H G 웰스의 공상과학소설 ‘눈먼 이들의 나라’를 떠올린다. 소설에서 어느 길 잃은 여행자가 남아메리카의 외딴 골짜기로 흘러들어간다. 그곳은 14세대 동안 시각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시각장애인의 마을’이었다. 본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뒤 그들은 더욱 섬세해진 귀와 손끝으로 새로운 상상력을 키워냈다. 처음에 여행자는 그런 장애인들을 바라보며 불쌍하게 여기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처지가 달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시각을 미망(迷妄)의 원천으로 여기며 이 여행자를 불쌍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 남자가 마을의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이 마을에 영원히 머물고자 했을 때 마을 원로들은 심사숙고 끝에 결혼 승낙의 조건을 제시한다. ‘눈을 제거한다면….’

눈먼 자들의 도시

한편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였다. 이 소설은 ‘우리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만이 보게 된다면’이라는 가설을 현실로 옮겨놓는다. 어느 날 신호대기에 멈췄던 차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순간, 차 한 대가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경적을 울려대고 고함을 친다. 마침내 멈춰선 차에서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절규한다. “눈이 안 보여!”

세상이 온통 캄캄한 게 아니라 너무 밝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실명(失明). 그 남자를 시작으로 주위 사람들이 차례차례 백색실명에 감염된다. 단 한 사람, 안과의사의 아내만 예외다. 그녀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작가는 그녀의 눈을 지켜주는 대신 ‘관찰자의 임무’를 맡긴다. 하지만 살인과 약탈로 아비규환이 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자신마저 눈이 멀기를 소망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이름도 사치스럽다. 그저 최초로 눈이 먼 남자, 그 남자의 아내, 의사, 의사의 아내, 색안경을 쓴 여자, 사팔뜨기 소년, 검은 안대를 한 노인으로 불릴 뿐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들에게 실명이 찾아온 것처럼 그들은 순식간에 시력을 회복한다. 이제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까.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아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의사의 아내는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색맹의 섬’과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무채색의 세계를 통해 유채색의 한계를 깨닫게 하며, 실명 체험을 통해 볼 수는 있어도 보지 않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말해준다.




신동아|기사입력 2008-01-25 14:12

가져옮: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262&aid=0000000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