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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둘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한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었고 그녀와 정혼한 요셉은 본래 베들레헴 출신이나 나사렛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 시대에는 없었던 작은 마을이고 스불론 지역에 속한다. “스불론 자손을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의 경계는 사릿에 미치고 서편으로 올라가서.......”(수 19:10) BC 1406년 이스라엘 백성을 지휘하여 가나안 땅으로 진입한 여호수아는 그 땅을 제비 뽑아 열 두 지파에게 미리 분할했는데 납달리 지역을 갈릴리라고 했다.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수 20:7) 그러나 납달리와 스불론과 아셀 등 지파가 받았던 긴네렛 호수 서쪽의 지역을 모두 합하여 갈릴리 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BC 734년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Ⅲ세가 이 지역을 침입하여 점령한 때부터라고 추정된다.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자 유다 사람들은 북의 도성 사마리아 주변 지역을 사마리아 땅이라 불렀고 그 북쪽을 갈릴리 땅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 지역의 이름이 갈릴리 땅으로 불리워지면서 긴네렛 호수의 이름도 저절로 갈릴리 호수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 호수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갈릴리 호수와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예수의 비유 32 가지 중의 19 가지가 갈릴리에서 말씀하신 것이었고 또 기록된 33 가지의 이적 중에서 25 가지가 갈릴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예수께서 탄생하기 730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메시야의 강림을 예언하면서 갈릴리를 이방의 땅으로 표현한 것은 그 땅이 이미 앗수르에 점령 당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람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으므로 갈릴리 사람들은 아람어를 많이 사용했고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에 남쪽의 유대인들이 많이 들어가 살게 되었던 것은 셀류쿠스의 시대였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수리아 지역을 통치한 셀류쿠스 왕조의 폭군 안티오쿠스 Ⅳ세는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의 피를 뿌리며 할례받은 아이들과 제사장들을 학살했다. 그의 학대에 못견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갈릴리에서는 바리새파나 열심당 같은 투사형의 세력들이 태동했다. “갈릴리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투사이며 그 수가 많았다. 그들은 결코 소심하지 않으며 인구가 감소되는 일이 없었다.”(요세푸스 ‘전쟁기’ 부기 2)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은근히 멸시했다. 그들이 볼 때 갈릴리는 이방과 혼합된 땅이었고 그곳 사람들이 셀류쿠스 왕조의 학대를 피하여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떠났다 하여 인정해 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고 갈릴리 사람이라 불리워졌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그를 멸시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 7:41)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는 예수에 대하여 편들어 말하다가 핀잔을 맞았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요 7:52) 그러나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 중에서 열 둘을 사도로 택하셨다.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그들을 세우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 6:14-16) 예수께서는 그 때 어떻게 기도를 하시고 어떤 응답을 받으셨을까? 열 둘의 이름을 응답받아서 택하셨다면 예수를 팔게 될 가룟 유다가 들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 누군가 그분을 팔게 될 것이라 하더라도 ‘십자가의 드라마’를 위해 미리 그런 자를 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기도하고 응답받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열 두 명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수도 있다. 그들 중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고 바돌로매와 빌립과 도마도 마찬가지이다. 셀롯이란 열심당이란 뜻이며 시몬뿐 아니라 그의 친구 다대오 즉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가룟 유다도 모두 열심당 출신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다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는데 세리 출신인 마태의 부친도 알패오이며 그들은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열 두 제자를 성분별로 나누어보면 어부 출신의 서민 일곱과 열심당 출신 셋과 멸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세리를 포함한 둘이 된다. 예수께서 열 둘을 택하실 때 기도하여 응답 받으신 것은 바로 그 일곱과 셋과 둘의 비율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살피는 비중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열 둘은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공통점이었던 것이다.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막 14:70) 이 갈릴리 출신의 열 두 명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분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 열 둘은 모두 그분의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눅 9:46) 예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자기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 그런데도 제자들은 더욱 오만하고 배타적으로 되어 갔다. 그들 중의 요한은 예수께 나아와서 자랑스럽게 보고를 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눅 9:49)
우리 친구 나사로
예수께서 세우신 열 두 제자는 모두 갈릴리 사람이었고 나사렛 사람이라고 알려진 예수 자신도 갈릴리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셨으나 중요한 절기 에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 그러나 그 일행이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므로 예루살렘에서 숙식할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마을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영접해 주었다.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눅 10:38-39) 그 후로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그들 자매의 집에 들러 신세를 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연고자가 없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차츰 문제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 자매에게는 나사로라고 하는 오라비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와 가까이 하시는 것을 보고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나사로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경쟁자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러던 중 유대인들이 수전절에 성전 앞에서 말씀하시던 예수께 시비를 거는 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서에 있는대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하시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가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며 돌로 치려했던 것이다. 예수와 그 일행은 그곳을 빠져나와 요단강 건너편으로 내려가 머물고 있었다. 그 때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연락이 왔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요 11:5-6)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했다. “유대로 다시 가자.” 그러나 제자들은 펄쩍 뛰며 그를 말렸다. “유대인들이 우리를 돌로 치려 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제자들이 가려 하지 않자 그는 또 말씀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렇게 말씀한 것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태평이었다.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답답해지신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그러자 도마가 나서며 그의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필자는 처음에 이것을 읽고 그래도 도마는 훌륭한 제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결의에 찬 말이 아니고 선생께서 죽은 나사로 때문에 죽을 곳에 간다고 하니 우리도 죽으러 가자는 비아냥의 소리였다. 실제로 제자들은 베다니에 따라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 그곳에는 마르다 자매와 유대인들만 등장하고 제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요 11:18-19) 그러면 요한은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을 어떻게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 요한은 가끔 다른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은밀히 행동하곤 했다. 그는 제사장 가야바의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으며(요 18:15)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이 다 도망쳤으나 그는 골고다의 현장에 혼자 나타났다. 그는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실 때에도 그 뒤를 밟아 쫓아가서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나사로에 대한 시기때문에 베다니로 함께 가기를 거부했으나 나중에 에브라임 땅에서 그들의 스승과 다시 합류했다.(요 11:54) 예수께서 다시 베다니에 가셨을 때 그분을 위한 환영 잔치가 열렸는데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였다. 그 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 예수의 발에 붓고 씻어드리자 제자들이 화를 내며 말했다.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6:8-9) 그것은 꽤 유식한 사람이나 말할 수 있는 자선의 논리였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그만큼 유식하게 가르쳐 놓은 자가 가룟 유다였음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나서서 다시 제자들의 말을 대변하고 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3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그의 장사할 날을 위해 그리한 것이라 하시며 그녀를 두둔해 주셨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성경에서 사라진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도 거기 없었고 골고다의 현장이나 부활하신 무덤에도 가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의 명단에도 그들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자 대제사장들은 예수와 나사로를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다.(요 12:10) 그 때 헬라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와 위험에 처했음을 알리고 헬라로 피신하시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분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며(요 12:24) 그들의 제안을 사양하셨다. 아마도 이 때 예수께서는 자기 대신 나사로 일가를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갈리아의 루구두눔 즉 지금 프랑스의 리용 지방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리용에는 지금도 이들의 기념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예수의 제자들마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나사로 일가를 시기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역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되기가 어렵다는 것일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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