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김 성 일 선을 행치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시고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여자는 뱀이 죽지 않으리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그것을 먹었고 그 남편도 주어서 먹게 했다. 그래서 사람은 죽게 되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8)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죽기 전에 먼저 살인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장남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으므로 그가 드린 제물은 농산물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기 때문에 그가 드린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큰 홍수가 있기 전까지는 곡식과 채소만을 먹고 살았으며 (창 1:29) 홍수가 끝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은 사람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창 9:3) 그런데 가인과 아벨이 살았던 시대는 홍수 이전의 시대였고 육식을 하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을 기른 것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가죽(창 3:21)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벨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그 대답은 자명해진다. 그는 가죽을 생산하여 형에게 공급하고 그 대가로 곡식과 채소를 받아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형이 주는 식량은 넉넉하지 않았다. 형에게서 받아온 식량은 먹고 사는데도 부족하여 제물로 드릴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벨은 그에게 있는 양이라도 드리면 비록 먹지 못하는 것이더라도 하나님이 받아 주시리라고 믿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의롭다는 뜻의 의(義)라는 글자가 양(羊)과 나(我)로 되어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아벨은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양을 드렸던 것이다. 아벨이 믿은대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아 주셨다. 그러나 가인이 드리는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우에게 정당한 분배를 하지 않은 형의 제물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인이 분하게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6-7) 가인은 아벨에게 식량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선을 행하지 않았으므로 안색이 변했던 것이다. 하와는 아들을 얻었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가인이라 했는데 그것은 즉 ‘소유’라는 의미가 되었다. 아벨의 이름은 ‘공허’ 즉 없다는 뜻이다. 가인과 아벨은 그 이름에서부터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갈라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가진 자들에게 못가진 자들을 위해 선을 행하라고 권하신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7) 가인의 경우 그가 농사를 짓게 된 것은 ‘기득권’이었다. 그의 부친 아담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는데 가인은 장자이므로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아 농사하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양 치는 자가 되었는데 곡식과 채소를 먹고 사는 당시로서는 불리한 분업이었다. 가인이 아벨보다 유리했던 것은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것 뿐이었다. 즉 자신의 노력과 상관 없이 그가 받아낸 기득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다.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하여 재물을 모은 사람도 있겠지만 돈의 속성은 돈이 있는 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별로 신통치도 않으면서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들이 오만한 태도로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꼭 빼앗는 것만 착취가 아니라 공정한 분배를 하지 않는 것도 곧 착취인 것이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또 불공정한 거래도 결과적으로 가난한 자를 착취한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사 1:23)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거룩하다 하심을 받으시리니”(사 5:16) 오늘날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기득권을 차지한 부자들의 방자함에 분노하여 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선다. 또 한쪽에서는 노동자들이 기업주의 횡포와 불공평에 맞서서 근로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의 갈등에는 이미 하나님의 조치가 내려져 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전 5:12)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부자에 대해서 단호한 판정을 내리셨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마 19:24) 그러므로 이미 부자에게는 그 갈 길이 정해져 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위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1-3) 이미 하나님이 부자에게 벌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아 놓았으므로 사람이 부자들의 오만한 행태에 눈쌀을 찌푸리거나 부자에게 화를 내며 큰 소리로 규탄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가난한 자들은 오히려 행복한 편이다. 하나님께서 늘 가난한 자를 눈여겨 보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또 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1-53) 부자와 가난한 자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가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렇게 시작된 말씀을 산상수훈(産上垂訓)이라고 한다. 산에서 가르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서서 많은 무리와 병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평지복음(平地福音)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평지에서 하신 말씀은 산에서 하신 말씀과 조금 다르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전제가 없어지고 그대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예수 그리스도의 판결은 너무 분명하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더 이상 부자와 싸울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하든지 아니면 그대로 부자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든지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하셨던 것일까? 가난이 무슨 특권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이 말씀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보아야 이해가 된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핥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19-21) 그런데 예수의 말씀대로 가난한 거지 나사로는 죽어 위로받는 곳으로 갔고 부자는 죽은 후 고통당하는 곳으로 내려갔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눅 16:22-23) 이 내용만으로 보면 부자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고 생활이 넉넉하므로 좋은 옷을 입었고 친지들을 자주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을 것이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열심히 일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거나 늘 기도를 하거나 남을 위해 봉사한 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천사들에게 받들려.........” 나사로가 잘 한 것은 무엇인데 천사들이 그들 데려갔을까?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엇을 때에 옷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1-43) 그들이 언제 그리 했으나고 물으니 임금이 말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거지 나사로는 한 부자에게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좋은 것을 누리지도 못하고 보람 있게 살지도 못하고 아픈 몸으로 평생을 한 자리에 누워 있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인생 전부를 희생으로 드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비유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실체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나는 정말로 가난한가? 세계식량기구는 지구상에서 매년 2만 5천명이 굶어 죽는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쌀이 남아 걱정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약 10억의 인구가 영양 실조 상태라는데 세계 2백개 국가 중에서 한국의 무역규모는 13위이고 OECD 30개국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나사로인가? 2003년 5월 1일 한국의 양대 노총은 서울 도심에서 노동절 기념 대규모 집회를 열고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날 노동 문제 전문 변호사였던 대통령이 TV 토론회에 출연했을 때 한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대책을 묻자 그는 답변 대신 노총의 조합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정말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픔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은 거지 나사로처럼 부자의 문전에 누워 있다. 그들은 동정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을뿐 그들에게는 투쟁할 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가난하다고 말하지만 지금 자기 이득만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상대적 부자’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고 한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예수께서도 항상 가난한 자는 있으리라고 하셨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 왜 하나님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가난한 자들을 남겨두시겠다는 것일까? 하나님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게 하심은 서로 나누는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그러므로 우리가 문전에 누워 있는 수많은 나사로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싸우고 있다면 지난날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똑 같은 질문으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창 4:10) † |
김성일 | No. 6, Read: 296, Vote: 4, Date: 2006/08/10 17: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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