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미련한 여인은 집을 허물고

은바리라이프 2008. 6. 25. 10:02
미련한 여인은 집을 허물고
1994년 9월 세계 그리스도교 명상 공동체라는 단체가 그들이 주최하는 죤 메인 세미나에 티벳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여 ‘선한 마음’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부탁했다. 런던의 미들섹스 대학에서 열렸던 이 세미나에서 달라이 라마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강의하는 도중에 이렇게 말했다.
“창조주는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로렌스 프리먼 신부도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진리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진리의 주인이시며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의 법칙이 아니라 그 법칙의 주인이 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행 14:15)

살아계신 하나님

BC 605년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할 때 끌려간 다니엘은 그 학문과 지혜를 인정받아 총리가 되었다. BC 539년 페르샤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에도 다니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그가 하루 세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알고 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30일 동안 어느 신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금령을 내려 어기는 자는 사자굴에 던질 것을 품신했다.

왕은 그 말대로 조서에 도장을 찍었는데 그들이 노렸던대로 다니엘이 그 금령을 위반하고 기도하여 걸려들었다. 그제서야 왕이 잘못을 깨닫고 다니엘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왕명의 권위를 세우라는 신하들의 성화를 어쩔 수 없었다. 왕이 모든 것을 다니엘의 하나님께 맡기며 그를 사자굴에 던져넣게 하고 새벽에 일찍 가서 보니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라 그를 꺼내주면서 기뻐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서나게 하셨음이니라”(단 6:26-27)

이렇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므로 가만히 앉아 계시거나 관망하시거나 생각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끊임 없이 움직이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구름의 펴임과 그의 장막의 울리는 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그가 번개 빛으로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이런 것들로 만민을 징벌하시며 이런 것들로 식물을 풍비히 주시느니라”(욥 36:27-31)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일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이 다스리는 세계가 죽은듯이 정체되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쉴새없이 움직이고 흐르고 물결치며 새로와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

그래서 하나님은 사색적이고 소극적인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활달하고 모험심이 강하고 진취적인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고 되어 있다. 즉 아담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공의가 남아 있었고 여자에게는 하나님의 역동성이 부여되어 서로 돕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간교한 뱀은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여자를 먼저 붙잡고 유혹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먼저 그 열매를 따먹고 또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역시 먹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러자 아담이 대답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거기서부터 이미 남자와 여자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남자는 자신이 먹은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고 그 때로부터 남자와 여자는 돕는 배필이 아니라 서로 적이 되어 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덴 동산을 나오면서 남자와 여자의 덕목도 빛갈이 바뀌었다. 아담에게 남아 있던 공의는 명분을 고집하는 회칠한 무덤이 되어버렸고 여자의 모험심은 파멸을 재촉하는 타락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남자와 여자를 연결해 주는 고리는 사랑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연결될 때 그들의 공의와 모험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줄기찬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단은 사람을 미혹하여 사랑을 음란의 뜻으로 바꿔버렸다. 그래서인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쓰는 나라는 이혼율이 높다. 미국이 50%로 세계 1위를 달리더니 한국이 47%로 그것을 바싹 뒤쫓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전쟁은 이미 남자들의 패배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여성들이 진출하기 시작했고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 산업이 1,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인 서비스 업종으로 전환되면서 인구의 70% 이상이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산업 구조를 선진국형이라고 말한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3차 산업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사 3:12)
역사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빨라지게 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명분과 권위만을 움켜쥐고 앉아 있던 남자들은 진취적인 여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미 3차 산업의 중요한 자리들을 여성들이 장악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속절 없이 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장차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을 필요로 하는 군대나 노동 같은 것이 고작일 것이다.

바람을 잡으려고

사회의 변화가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있다. 그리고 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세력과 급하게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 빨리 바꾸자며 재촉하는 쪽을 진보 세력이라 하고 어지럽다면서 버티고 있는 자들을 보수 세력이라고 한다. 보수는 안정을 추구하고 진보는 개혁을 주장한다. 그리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들의 쟁점은 거의가 보수와 진보의 충돌이다. 누가 더 강하여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그것은 소모전일 수 밖에 없다. 보수가 이기면 사회는 더욱 숨막히게 되고 진보가 이기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또 다른 보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많은 진보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보수보다 더 무서운 독재가 되는 것을 우리는 수 없이 보았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위로자가 없도다”(전 4:1)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처럼 보수와 진보는 서로 도우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개의 바퀴와 같다. 너무 빨리 달리면 수레가 부서지고 움직이지 않으면 썩어서 무너지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힘써서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수와 진보는 사회를 역동성 있는 생명체로 창조해 가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수와 진보도 사랑으로 함께 굴러야 한다.

그러나 이미 사단이 그 연결의 고리를 끊어 놓았다. 그 사이에 사랑은 없고 야합만이 있다. 공의와 모험이 아니라 탐욕과 투쟁만 가득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플래카드와 현수막을 읽어보면 그것을 곧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시위의 배후는 집단 이득이다. 자기네 집단의 이득을 위해서 도로를 점거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른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환자들을 볼모로 하여 의사회와 약사회가 서로 싸우고 어린 학생들을 볼모로 하여 교총과 전교조가 서로 다툰다. 순수한 열정을 내세우며 투쟁하던 학생 시위의 주동자들이 나중에 보면 어느새 부패한 정치판의 철새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독재 타도를 외치며 투쟁하던 자들이 더 무서운 독선의 화신으로 변해버린 모습들도 목도하고 있다.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전 5:16-17)
나이가 삼십에 이를 때까지 나사렛 마을에서 목수 일만 하고 계시던 예수께서는 요단강으로 내려가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다.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본래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4-5)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난 하나님의 독생자로 죄가 없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동역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요 1:1-3) 모든 사람이 죄에 빠진 것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잘못된 것을 개혁하러 오신 분이었다. 그분이 오셨을 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모두 썩어 있었다. 사두개파는 로마의 세력을 추종하며 종교적 권력과 안일 속에 빠져 있고 로마에 저항하는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에 빠져 백성들을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 속에는 하나님도 없었고 생명도 없었다. 오직 시체가 썩는 냄새만 나고 있을 뿐이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과 맞서서 싸우지 않았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예수께서 오직 한번 분노를 행동으로 나타내신 적이 있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사람들을 목격했을 때 채찍으로 소와 양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외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의 지도자들이 썩었다고 해서 그들과 싸우거나 때린 적은 없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하나님도 평강을 바라시고 사람도 그것을 원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하나님이 지면을 흔들어 새롭게 하시듯이 사람도 필요할 때 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은 모두 집을 세우기 위한 것이지 집을 허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이 없으면 명분과 개혁은 함께 집을 망하게 한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 14:1)

예수께서는 바로 그 모범을 보여 주셨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모두 썩어서 회칠한 무덤 같이 된 것을 지적하시고 경고하셨으나 그들을 때리거나 죽이지는 않으셨다. 집을 허물지 않고 차라리 자신의 몸을 허물기로 했던 것이다. 정의와 개혁을 외치면서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자는 모두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말하는 자요 형제를 죽여서 자신의 명성을 차지하려는 살인자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