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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난 사람들 >
이스라엘과 한국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양쪽 사람들이 두건이든 모자든 머리에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도 닮았고 슬플 때에 굵은 베옷을 입고 통곡했다는 것도 닮았고 음력 8월 15일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킨다는 것도 닮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오랫동안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아온 역사적 운명이 같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왕하 17:21) 솔로몬 왕이 죽은 BC 931년에 나라가 분단된지 70년만에 남의 여호사밧 왕과 북의 아합 왕이 대화를 시작하여 서로 사돈까지 맺었으나 민족의 통일은 이루지 못했다. BC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으니까 분단된지 209년 만이었고 345년만인 BC 586년에 남왕국 유다가 멸망했다. 우리가 이스라엘과 닮았다고 해서 이런 것까지 닮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썩 낙관적은 아니다.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38도선을 그어 놓고 남과 북에 진주한 때부터이니까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그 징벌로 분단되었는데 한국은 두 강대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것이 다른 점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도 공산주의다, 민주주의다 해서 갈라졌으니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사 59:7)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어떤 사상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사상을 주장했으나 모두가 무책임하여 무죄한 피만 흘렸을 뿐이었다.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양쪽을 다 두려워했다. 공산주의 세상이 되면 그나마 있는 것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았고 자본주의가 득세하면 윤리적 규범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나치와 파시스트의 민족주의였으나 많은 피를 흘려 가장 먼저 죄악의 사상임을 입증하며 사라졌다. 20세기 말에 서로 싸웠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도 역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박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이며 권력 장악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공산주의는 이념으로 인간을 압제하고 자본주의는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그런 사상들 때문에 갈라섰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한국 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다. 그것은 한국의 조상들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운 이래로 가장 부끄러운 전쟁이었다. 사람들은 한국을 가리켜 예절 바른 나라라고 했고 중국의 사서 회남자는 군자의 나라라고 했으며 인도의 시인 타골은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던 한국사람들이 한 유대인 몽상가가 골방에서 생각해낸 사상과 장사꾼들이 만들어낸 제도를 위해 피를 흘리며 서로 싸웠기 때문이다.
부모의 유산을 탐내어 형제가 서로 싸웠다면 욕심이 지나쳐서 그랬다고 보아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상이란 본래 그것을 만들어낸 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미혹되어 그대로 해본 쪽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듯 정체 모를 사상에 팔려 서로 죽였고 지금도 대치하고 있으며 눈물 뿌리며 생이별을 한 이산가족 의 1세대가 한을 품은채 죽어가고 있다.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우리는 그렇게 자책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우리 조상들이 위대했다고 말하며 우리가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더라도 그것은 한국 전쟁 하나만으로 여지 없이 무너진다. 그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못난 조상을 두었고 지금도 우리는 못났다. 많은 칼럼을 쓰면서도 왜 남북의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느냐고 가끔 독자들이 물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쓸 것이 없다.
조국의 통일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대화를 하자고 나서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이나 그들에게 전혀 진심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객기와 자만과 명분과 고집만이 가득할 뿐이고 정권을 운영하는 쪽이든 정권에 반발을 하는 쪽이든 통일 자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자기 집단에 돌아올 득실을 따질뿐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그러므로 우리가 조국의 남북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한국 민족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과연 한국 민족은 어떤 민족이며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의미가 있는 나라일까? 필자는 이스라엘과 한국 사이에 또 하나의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처음 세운 나라 조선에도 이스라엘처럼 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위서(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고조선)
여기 나오는 단군(壇君)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을 의미한다. 그 다음의 ‘왕검’에는 임금 왕(王)자가 들어 있어 학자들이 ‘임금’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왕검은 그저 첫번째 제사장의 이름일 뿐이다. 고려시대에 없애버린 고대 사서들을 적당히 기억하여 써낸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사서에는 단군이 47대까지 있고 제1대 단군의 이름이 왕건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처럼 고조선에도 제사장만 있고 왕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BC 1050년에 처음으로 사울 왕을 세웠는데 우리 역사에서 왕이 등장한 것은 BC 57년 신라의 혁거세가 처음이고 BC 37년 고구려를 세운 주몽 그리고 BC 18년에 백제를 건국한 온조가 그 다음이다. 즉 우리 조상들은 이스라엘보다 천년이나 더 신정국가를 유지했던 것이다.
< 평강의 길 >
스스로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우리같은 민족을 학자들은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였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사 64:8)
단군이라는 호칭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제사장이라는 직책명인데도 단군을 신처럼 모시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하나님과 어떻게 같으냐고 반박한다. 그러나 1997년 창조사학회의 학술탐사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우랄 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지나 바이칼 호수에서 송화강 지역을 모두 답사하면서 우리 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동해온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 증거들은 창조사학회가 펴낸 ‘한민족기원대탐사’라는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아사달을 잇는 연결 고리들은 수 없이 많다. 환저형 토기와 삼족기 그리고 우리 민족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생활 도구들이 그 모든 경로에 남아 있고 SOV형의 교착어와 홍수의 설화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웅녀에 관한 설화 등이 각처에 남아 있으며 이것은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연결된다.
특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은 흑요석(Obsidian)의 유물이다. 전세계에서 흑요석이 나오는 곳은 아라랏 산 일대뿐인 것이다. 또 무궁화(학명: Syriacus Hibiscus)는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메시야를 상징하는 꽃이며 영어로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라고 하는데 이에 관한 유적이 모든 지역에 남아 있다. 무궁화는 지금도 중동과 터어키와 아라랏 산을 넘어서 한국까지 피고 있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영히 있도다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시 111:4)
더 확실한 증거는 지금이라도 마니산에 올라가보면 안다. 마니산의 본래 이름은 ‘마리산’으로 모든 산의 머리라는 뜻인데 제1대 단군인 왕검이 그 산의 정상에 천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 천제단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왜 조선의 첫번째 제사장인 왕검이 서쪽을 향해 제물을 드렸을까? 그들이 서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왔으므로 서쪽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이다.
중국의 산동성은 동이족에 속하는 소호(少昊)의 자손들이 살았던 땅이고 태산은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성산이었으며 중국의 학자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태산 서쪽의 가상현에 있는 무씨(武氏)의 사당에 ‘환웅천강도’라는 화상석이 보존되어 있다. 그 화상석에는 사람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곰과 호랑이가 싸우다가 호랑이가 지는 장면도 들어 있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했다.”(‘삼국유사’ 고조선)
이스라엘과 비교하여 우리가 자랑할만한 것이 또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풀 때 그 나라에는 군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정부 관서 명칭들이 나와 있다.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 이들 중 어디를 봐도 군대를 훈련시키고 전쟁을 관리하는 국방부가 없다. 제사장 왕검이 나라를 열고 백성을 다스릴 때에도 환웅의 정부 체제를 이어받았을 것이므로 역시 군대가 없었을 것은 당연하다. 우리 조상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나라는 군대가 필요 없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기록된 욥의 성품을 생각나게 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우리 조상들은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평화를 사랑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은 왜 서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도 처음에는 서로 싸우지 않았다. 서쪽에서 귀신을 섬기게 된 주(周)와 동이족을 혐오했던 진(秦)과 공자의 학문을 변질시켰던 한(漢)의 세력이 넘어들어오자 자위책을 위해 세 왕국을 세웠을뿐 서로 싸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남과 북으로 갈라졌듯이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죽이고 땅을 빼앗으며 싸우기 시작한 것도 역시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에는 청소년들이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선인’제도가 있었고 신라에는 ‘화랑’제도가 있었다. 늦게까지 그 제도를 유지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나 신라도 역시 하나님을 버려서 멸망했던 것이다.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사 57:3-4)
그러나 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은 한국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오셨다. 특히 일본의 지배로 수모를 당하면서 한국 사람은 거듭나기 시작했고 부끄러운 전쟁을 겪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는 동안 한국 교회는 기적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에 1만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한국의 무역 규모는 세계 11위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이것은 곧 우리 조상들이 후손에게 당부했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일 것이다. 지금 한국의 통일은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재통일 역시 심각한 지정학적 딜레마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미 국의 군사력이 통일 한국에 그대로 남게 된다면 그것은 중국인 입장에서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중국이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통일을 묵인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Zbigniew Brzezinski ‘The Grand Chessboard')
그러나 아직도 한국에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한국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며 세계의 어둠을 밝히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역사의 막이 내리기 전에 한국이 기적적으로 통일되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실지도 모른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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