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은바리라이프 2008. 6. 24. 18:38
집단의 미혹

나라와 나라가 무력으로 싸우는 것을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에는 주로 영토 확장 등 국익을 위해 공격하는 것과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있고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나라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종교 전쟁이 있다. 전쟁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왕들이 생기기 전에는 부족간의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전쟁이란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가장 선량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게 되면 갑자기 사나와지고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평소에 혼자 있을 때에는 말소리조차 크게 못낼 정도로 얌전하던 사람도 집단 속에 끼게 되면 갑자기 난폭해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모두 흩어져서 살라고 하셨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 9:7)
즉 시날 평지와 같은 제한된 장소에 모여 있지 말고 땅의 온 지면에 흩어져서 그 가운데서 충만해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흩어지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흩어지기 않기 위해 바벨탑을 건축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나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러나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그렇게 무서운 재난을 경험하고도 집단을 이루게 되자 하나님의 권고를 무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따돌리고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할 정도로 용감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 놓기 위한 대책을 세우셨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 11:7)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의 대명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면서 스스로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를 쓸 정도로 외로운 분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도 역시 어느 정도는 외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외로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흩어져 사는 외로운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거부하고 집단의 힘에 의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집단의 힘이란 허망한 것이다. 집단이라는 허상에 의지하며 객기를 부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보람된 인생을 가꾸는데 허용된 시간이 다 지나버려서 땅을 치며 후회해도 만회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집단이란 가장 큰 미혹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탑에 매달린 자들을 강제로 흩으셨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8-9)

이렇게 사람들은 집단에 끼면 심지어 하나님까지 따돌리고 도전할 정도로 기세를 올린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버리고 집단이라는 허상에 의지하는 가장 큰 미혹인 것이다. 사람끼리의 사회에서도 이런 집단의 횡포가 기승을 부린다. 어린 아이 때부터 벌써 집단을 만들고 거기 끼어들지 못한 아이를 따돌리고 학대하는 일이 시작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집단의 폐해는 심각해진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10-11)

직장이나 조직에서는 직책에 의한 부서보다 어느 비공식 집단에 속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조직에서 강력한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수단이다. 학연, 지연에 따라 모여드는 집단이 있고 이해 관계로 대립하는 집단이 있으며 이념에 따라 모이는 집단도 있다. 집단들은 모두 생존을 위한 수단이므로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모두 육체의 일이라고 말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19-21)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당을 짓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단정했다.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어른까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집단의 힘에 의지하려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집단은 곧 우상이며 더러운 것이고 시기와 투기 때문에 선량한 자와 원수를 맺는 것은 이단이며 음행이다.

강력한 집단이 생겨 약자가 밀리거나 제압되면 곧 학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상대방도 집단을 이루고 방어를 시작하면 음모와 분쟁이 시작된다. 조직의 집단은 상대가 무너질 때까지 서로 싸운다. 야쿠자는 일본도로 마피아는 기관총으로 분쟁을 끝내버린다. 분쟁의 규모가 커져서 나라와 나라 간에 벌어지면 전쟁이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용감한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대상 18:6)
지금도 전쟁의 틈바구니에 사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싸우고 계신다.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列國)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렘 25:31)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위해 열국과 싸워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창과 칼의 전쟁보다 더 중요한 싸움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며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엡 6:12)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악한 영과의 전쟁을 위해서 그 제자들을 군사로 모집했다.(딤후 2:3)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후 6:12)

고라의 장막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후에도 많은 시련을 겪었다. 사람이란 모두 자신의 의견이 있을 수 있으므로 많은 회중을 이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내 광야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장정을 계수했을 때 그 수가 603,550 명이었으므로 여자와 어린 아이와 노약자를 모두 합하면 2백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뜨거운 광야에서 우선 그들이 만난 것은 물과 식량의 문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라에서 쓴 물을 달게 하시고 엘림에서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시고 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며 르비딤에서는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오게 하여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40일간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모세의 형 아론은 백성들의 강요에 굴복하고 귀의 금고리를 모아 녹여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모두 송아지의 형상 앞에 번제를 드린 다음 먹고 마시며 일제히 춤을 추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들을 다 진멸하고 모세의 자손을 다시 길러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자 모세가 매달리며 간구하여 간신히 그 뜻을 돌이키게 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의 측근에서도 일어났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민 12:1)
이에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꾸짖자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다. 모세가 다시 하나님께 간청하자 진 밖에 이레 동안 가둬두는 것으로 벌을 대신하게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 두 명이 돌아왔을 때 생겼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했으나 나머지는 가나안의 견고한 성과 강력한 군대를 보고 비관적인 보고를 했던 것이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부르셨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

이번에도 모세의 간청 때문에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시내산 아래서 계수한 장정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나머지가 다 죽은 후에야 그 자손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단한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시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갔고 드디어 모세에게 반기를 든 사람들이 생겼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黨)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250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민 16:1-2)
모세와 고라는 사촌간이었다. 그는 같은 레위 자손으로 모세의 리더쉽과 아론의 제사권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
또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민 16:14)

이제 모세는 어느 쪽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증명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고라의 편에 서는 자는 그의 장막 앞에 모이고 모세와 아론을 지지하는 자들은 그들의 장막에서 떠나라고 했다. 모세를 지지하는 자들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을 떠나자 땅이 갈라지고 고라를 지지한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과 물건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따르게 되었다.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민 16:34)

그러나 고라의 그 지지자들이 고라의 장막 앞에 설 때에 고라의 아들들은 그 부친과 함께 서지 않았다. 모세가 받아서 전한 열개의 계명 중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친 쪽에 서지 않았다.
“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자러니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여호와께 패역할 때에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250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 26:10-11)

부친과 함께 서지 않은 고라의 아들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온당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라의 반역 때문에 그 자손들은 오랫동안 얼굴을 가리고 살았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았다. 고라의 자손 중에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지도한 선지자 사무엘이 태어났던 것이다.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대상 6:34)

그 사무엘은 에비아삽의 16대손이었고 고라의 17대손이었다.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요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며”(대상 6:37-38)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삼았으나 그가 교만해지자 다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로 하여금 열 두 지파의 왕이 되게 한 선지자였다. 사무엘의 손자인 헤만은 다윗의 성가대에서 찬양을 지휘하는 악장이 되었다. 하나님은 부친의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에비아삽을 기억하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자손들을 크게 쓰셨다. 나중에 바울은 부모에 대한 도리를 가르칠 때에 이렇게 말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즉 부모의 처사와 처신이 하나님의 길과 다를 때에는 에비아삽처럼 지혜롭게 판단하는 것이 옳다는 뜻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