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금관의 이세벨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4-06-07 |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감동하는 것은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이 나라들의 흥망이나 역대 왕들의 모습을 적으면서 그 역사의 이면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서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나라들을 보면 그 생성과 소멸에 모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 역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역사에 등장했던 나라들 중에서도 특히 가야의 역할과 사명은 큰 것으로 보인다. 중국 대륙에서는 나라들의 분쟁이 격렬해지고 그 군사적 위협이 동방에까지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도 없이 경건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은 지역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에 수로왕이 한반도에 들어왔고 인도로부터 허황옥 공주가 들어와 새로운 소망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야 사람들은 제철 기술의 명인들이었고 조선 기술이 발달하여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를 건조했다. 왜국에서는 이러한 배가 없었으므로 대륙과의 무역에 금관국의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가야는 왜국의 은인이 되었고 왜국으로 하여금 나라의 모양을 갖추고 그 산업이 발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지의 위지(魏志) 왜인전은 왜의 초기 국가형태를 이루었던 야마다이국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왜는 30여국의 작은 나라들이 비미호(卑彌呼)라는 여무(女巫)를 세워 연맹체를 이루었으며 AD 239년에 위와 통교하여 친위왜왕의 칭호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비미호의 기사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아달라 이사금 20년(AD 173)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이 비미호의 비밀을 찾아 연구와 답사를 거듭했던 시인 이종기(1929-1995)는 이 비미호가 가야 출신의 여인이었다는 결론을 얻었고(이종기 ‘춤추는 신녀’)동경대 이노우에 교수의 글로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했다. “비미호는 무녀였다. 신공황후(神功皇后)도 또한 탁선의 경우를 보면 무녀로 나타난다. 비미호는 조선과 관계를 가진 여성이었다.” ( 井上光貞 ‘일본국가의 기원’) 상시 가야와 신라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왔었다는 것을 가정하면 왜국에 가서 그들에게 철제 농기구를 공급해주고 그들을 가르친 비미호는 허황혹 공주와 마찬가지로 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라는 이렇게 삼국뿐만 아니라 왜국에까지 진출하여 그들을 지도했던 존경받는 나라 가야를 공격하여 그 항복을 받아냈던 것이다. 종교를 바꾸어 가야를 공격했어도 백성들을 납득시키고 그것을 정당화하기가 어려웠는지 신라는 진흥왕 때에 역사의 기록을 다시 정리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진흥왕 6년(AD545)에 이찬 이사부는 사기(史記)의 수찬(修撰)을 건의하였고 왕은 대아찬 거칠부에게 국사의 수찬을 명하고 있다. 진흥왕은 7세에 즉위하였으니 이 때는 그가 12세 때였으므로 사기의 수찬은 이사부, �릴부 등이 주도한 것이다. 이 거칠부가 사기를 수찬하면서 무슨 일을 했을까? “파사이사금 23년(AD 102)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안강)과 실직곡국(悉直谷國:삼척)이 서로 지경을 다투다가 왕에게로 와서 이를 판결하여 달라고 청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금관국의 수로왕은 연로하고 지식이 많으므로 그를 불러서 묻자 하고 곧 그를 초빙 하였는데 수로왕은 의론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그들이 서로 다투는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그러나 이 기사의 말미에는 갑자기 수로왕에 대한 험담이 나온다. 왕이 육부(六部)에 명하여 수로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중 오부는 이찬급으로 접빈주를 삼았으나 오직 한지(漢祗部)부만 벼슬이 낮은 자를 보냈으므로 진노한 수로왕이 좌우에 명하여 그 접빈주를 죽이고 돌아갔으며 그를 죽인 자가 음즙벌국으로 도망했기 때문에 신라왕이 음즙벌국을 정벌하자 실직곡국도 덩달아 항복했다는 것이었다. 파사 이사금의 존경을 받던 수로왕이 접대자의 계급이 낮아서 화를 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런일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 일로 인하여 신라 왕은 화해시키려고 애쓰던 두 나라를 한꺼번에 정복해 버렸다니 그것은 더욱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기를 수찬한 거칠부가 금관국 정복의 명분을 얻기 위해 수로왕을 비인격자로 매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신라본기는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거나 가야가 신라를 침공해왔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삽입해 놓았다. 주로 거칠부의 사기를 기초로 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사기에 그런 기록들이 나오는 것이다. “파사이사금 27년(AD 106) 왕이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였다.” “지마이사금 4년(AD 115) 가야가 남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지마이사금 5년(AD 116) 왕이 정병 1만을 이끌고 가야국으로 쳐들어갔으나 오랫동안 비가 오므로 군사를 돌렸다.” “나해이사금 6년(AD 201) 가야국이 화친할 것을 요청하였다.” “나해이사금 14년(AD209) 포상팔국이 가야를 치려하여 가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므로 왕이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나해이사금 17년(AD 212) 가야에서 왕자를 보내어 인질로 삼았다.” “소지마립간 18년(AD 496) 가야국에서 꿩을 보내왔는데 꼬리의 길이가 5천이나 되었다.” 가야는 본래 신라와 친한 사이였고 또 철의 생산국이기 때문에 신라는 가야의 고객이었다. 그런 가야가 다른 나라와는 갈등이 없었는데 유독 신라와만 사이가 나빴을 리가 없으며 더구나 왕이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비가 와서 되돌아 왔다는 것은 사기에 기록해 놓을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대목은 바로 거칠부가 가야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적어 넣은 것이다. 또 거칠부는 가야에 관한 기록에서 가야 왕조의 역사라든가 그 문화적 경제적 업적이며 왜국을 지도하고 개척한 사실들을 모두 다 말소해 버렸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가락국기’가 있어서 겨우 가야사의 편린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그나마 가야사를 장황한 불교 이야기로 메워 놓아 그 실상을 알아보기가 어려우며 이러한 기록의 공백 때문에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만한 빌미를 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라와 가야의 관계는 오히려 가야에서 흰 꿩을 선물로 보냈다는 사실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우호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존경을 받던 하나님의 나라 가야는 왜 멸망했을까? 신라의 법흥왕과 거칠부가 아무리 명분을 만들어 공격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셨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가야의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제 6대 좌지왕(坐知王, AD 407-421 재위)은 즉위하여 용녀(龍女)를 취하고 그 여자의 당(黨)으로 벼슬을 시키니 국내가 요란해졌다.”(삼국유사 가락국기) 이 ‘용녀’가 어떤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의 신하 박원도가 간하기를 ‘하늘이 없어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을 보전 하겠습니까’라 한 것을 보면 이 여자가 바로 가야의 왕을 미혹하고 나라를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한 가야의 ‘이세벨’ 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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