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금갑을 쏘아라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4-06-01 |
삼국 유사의 ‘홍법’조에는 눌지왕 (AD 417-458)때에 이미 불승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善山)에 들어왔는데 그 곳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숨겨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때에는 이미 고구려에서 불법을 공인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인데도 묵호자는 떳떳이 들어오지 못하고 몰래 잠입할 정도로 불교에 대한 신라의 태도가 매우 완강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또 21대 비처왕(AD 479-500) 때에 아도(我道)라는 중이 들어왔는데 왕의 딸 성국 공주가 병이 들었으므로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해주니 왕이 매우 기뻐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 아도는 연대로 보아 굴마의 아들 아도가 아니고 소수림왕 때 들어온 중 아도(阿道)와도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연은 같은 삼국유사에 이와는 전혀 다른 기사를 또 적어 놓고 있다. “제21대 비처왕 즉위 10년 무진(戊辰:AD 488)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을 하여 가로되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라 하였다......” 왕이 까마귀를 따라가 보니 한 노인이 못 가운데서 나와 글을 올리는데 겉봉에 글이 쓰여 있었다.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으리라.” 왕의 생각에 한 사람 죽는 것이 두 사람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여 떼어보지 않으려 했으나 한 신하가 아뢰기를 ‘한 사람’은 바로 왕을 의미하는 것이니 떼어보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였다. 왕이 겉봉을 떼어보니 ‘(금갑을 쏘라)’ 이라는 글이 들어 있었으므로 곧 대궐에 돌아가 금갑을 쏘았는데 그 안에서 중과 왕비가 상간(相奸)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꺼내어 모두 처형했다. 본래 까마귀는 노아의 가족들이 아직 방주에 타고 있을 때 물이 마를 때가지 밖으로 날아다니며 상황을 알아준 고마운 새였고(창8:7) 셈의 자손들이 동방으로 이동해 올 때에도 그들의 길을 안내한 길조(吉鳥)였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그리고 일본과 북미대륙에 이르기까지 까마귀는 길조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려 고분에도 태양 속에 삼족오(三足烏)를 그려 놓아 까마귀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한국 사람들은 까마귀를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흉조로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신라 왕궁에 잠입했던 불승의 포교가 까마귀의 경고로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까마귀가 불길한 새로 낙인찍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보아 당시 왕궁 안에까지 잠입하여 궐 안의 여자들과 왕비에게까지 접근했던 불승들의 포교가 얼마나 집요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신라왕의 공인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39년이 더 지난 법흥왕 14년(AD 527)이었고 고구려에서 공인을 받는데 성공한 지 무려 155년 만이었다.삼국유사의 기사로 미루어 보아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매우 완강하게 불교 공인을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를 기록한 불승 일연은 이차돈(異次頓)이 불법 공행을 위하여 순교했기 때문이라고 적어 놓았다. “대왕이 분노하여 참하라고 명하매 유사가 관아로 묶어 왔다. 사인이 서문을 짓고 옥리가 그를 참하니 백유(白乳)가 한길이나 솟았고...” 이차돈의 성은 박(朴)이고 자는 염촉으로 본래 법흥왕의 당질이 되는 왕족의 청년이었으며 당시의 나이는 22세였다고 되어 있다. 그는 왕이 불법에 뜻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실행치 못하고 있음을 보고 한가지 계책을 건의했다. “신이 거짓 왕명을 유사에게 전하여 불사를 창설토록 하겠으니 왕께서 거짓 왕명을 전한 죄를 물어 신을 참하시면 이변이 있을 것이요 신하들이 그것을 보고 왕명을 받들 것입니다.”(해동고승전) 이것이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설화의 내용이다. 그러나 왕과 이차돈이 밀약하여 이런 극적인 일을 연출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일을 이병도는 그의 저서 ‘한국 고대사연구’에서 달리 해석하고 있다. “영이(靈異) 설화와 같은 것은 불교관계 고전에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인물을 신격화하기 위한 조작에 불과한 것이다. 이차돈과 왕과의 밀약 설화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동p663) 오히려 그는 법흥왕의 불교 공인을 그의 왕권 강화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법흥왕은 그 부친 지증왕의 영향을 받아 권력지향형의 인물이었다. “지증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왕의 음장(陰長)이 일척 오촌이나 되어 배우자를 얻기 어려우므로 사자를 삼도에 보내 구하였다.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 아래에 이르러 본즉 개 두 마리가 큰 북만한 똥덩어리 두 끝을 물고 싸우는 자라...그 집을 찾아가보니 여자의 신장이 칠척 오촌이었다. 그녀를 맞아들여 황후를 삼으니 신하가 모두 하례하였다.”(삼국유사) 이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며 주군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하였다. 그의 아들인 법흥왕도 율령과 공복(公服)을 제정하여 역시 왕권 강화에 힘썼다. 그러므로 불법 공인도 역시 그의 왕권 강화 과정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차돈은 실제로 왕명을 사칭하여 불사를 추진했으며 왕은 그를 왕명사칭죄로 처형함으로서 중신들을 위압했던 것이다. “이차돈에 대한 처형이 왕권 강화의 한 시위라고 본다면 그의 처형 후에 있어서의 배불파(排佛派)의 기세와 태도가 어떠했을까도 짐작할 수 있다.”(이병도 ‘한국 고대사연구’ p664) 즉 이차돈은 법흥왕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 왕이 불법을 공인한 것도 역시 이 문제를 왕권 강화에 이용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법흥왕의 불법 공인을 지지하고 그의 왕권 강화에 기여했을 인물이 하나 더 잇는데 바로 젊은 무관인 거칠부(居柒夫)라는 사람이었다. “거칠부는 어려서부터 유원한 뜻을 가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으로 유람하다가 고구려를 엿보려고 그 나라로 들어갔는데 법사 혜량(惠亮)이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불법의 강론을 들었다.....”(삼국사기 ‘열전’) 거칠부는 혜량의 권유를 듣고 신라로 돌아와 무관이 되었고 왕권강화를 위해 불법 공인을 추진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법흥왕은 불법을 공인한 직후인 AD532년에 금관국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신라는 그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가야를 스승의 나라로 받들어 왔는데 불법 공인으로 그 가야를 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던 것이다. “또 고승전에는 법흥왕이 21년에 정사가 완공되매 왕이 자리를 내놓고 중이 되어 법명을 법공(法空)이라 하고 왕비도 역시 중이 되어 법명을 묘법(妙法)이라고 하였다. 하나 사기에는 보이지 않는 말이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p666) 거칠부는 배후에서 지도했던 그의 스승 혜량(惠亮)은 나중에 신라로 귀화하여 진흥왕으로부터 승통(僧統)의 벼슬을 얻었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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