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어느날 갑자기

은바리라이프 2008. 6. 7. 01:09
제목 : 어느날 갑자기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4-03-31
바벨탑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라랏 산을 넘고 러시아 평원을 지나 우랄 산맥을 넘어 다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만주 대륙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이동해 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든 경로를 답사하면서 줄곧 한 가지 의문이 필자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왜 한국인의 조상들은 도중에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동방의 땅 끝까지 옮겨 왔던 것일까?”
필자는 혹 그 해답이 우리 역사 속의 어딘가에 기록되어 잇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필자는 삼국유사의 ‘고조선’에 나오는 환웅의 정부 조직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풍백과 우사와 운사를 거느리고 곡, 명, 병 ,형, 선악과 인간 삼백육십여 사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의 정부 조직에서 그 핵심부서는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의 다섯이었다. 이중 주명과 주형과 주선악이란 주로 신탁과 신앙에 관계되는 일이었고 주곡과 주병은 민생과 관계되는 업무였다. 그런데 이들 부서 중에 국방과 관계있는 병(兵이)나 군(軍의) 부서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삼백육십여 사’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환웅의 정부에는 군대가 없었다!”
그것이 필자가 찾아낸 길고 긴 민족 이동의 이유였다. 동방으로 옮겨 온 한국인의 조상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형제들과 분쟁이 생기면 그들에게 땅을 양보하고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났을 것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우들에게 땅을 양보하고 떠났던 그 장자의 정신이 그들로 하여금 극동의 땅 끝까지 오게 했던 것은 아닐까?
이로써 필자는 역사학자들이 인류의 고대사를 연구할 때에 모든 문화적 현상을 투쟁과 전쟁의 모델로만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줄곧 군대가 없었고 그것은 대륙쪽의 변화 때문에 할 수 없이 왕의 제도를 도입한 삼국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대륙 쪽에서 귀신을 섬기던 주의 붕괴와 함께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이 계속되고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할 때에도 동방의 군자들은 군대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시황은 동방이 두려워서 만주 대륙과 중국 대륙의 경계선에 국력을 다 기울여가며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은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가?
BC 195년 한(漢)에서 망명해 온 위만은 요동반도 서쪽에 잇던 기자조선을 점령했는데 BC 108년 한의 무제가 다시 그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한사군을 설치했다(윤내현 ‘고조선 연구’ p394). 이러한 군사적 위협 때문에 만주대륙과 한반도에 흩어져 살고 있던 동방의 군자들은 자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적당히 그룹을 이루어 ‘지역 공동체를 결성하고 대표자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힘을 모으기로 했다. 사로국(斯盧國)의 여섯 장로는 혁거세를 뽑아 거서간으로 세웠고 졸본부여(졸본부여)는 주몽을 영입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주몽의 아들 온조는 남으로 내려가 백제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 세 나라가 성립된 것이 BC 57년 이후이니 대륙에서는 전한의 선제 때였다.
이들 세 나라는 비록 따로 지역 공동체를 형성했으나 실상은 모두 같은 말과 신앙을 가진 형제국이었고 서로 간의 다툼은 없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이들이 나라를 세운 후로 간혹 국경에서의 사소한 분쟁은 있었으나 거의 4백년간 큰 충돌없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도 중국 최고의 전략가였던 제갈량은 이들 세 나라를 가장 두려워했다.
“다스리는 자와 따르는 자가 화목하고 백성이 평안하며 항상 기쁨에 넘치므로 감히 건드릴 수없다.”(제갈량 ‘心書’ 동이편)
서로 사이좋게 지내던 이 나라들 사이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충돌이 크게 일어난 것은 AD 369년과 AD 371년의 일이었다.
“고국원왕 39년 9월 왕은 군사 2만명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41년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이를 막다가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돌아가시므로 고국원에 장사하였다.”(동상)
이 당시 양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서로 대군을 일으켜 큰 전쟁을 일으킬 만한 갈등이 별로 없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를 공격한 지휘자가 백제의 근초고왕이 아니라 왕자수였는데 그가 고구려 왕을 죽인 후 그대로 철수한 것으로 보아 이 전쟁의 이유가 영토의 분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백제를 공격했으며 백제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왕을 죽였던 것일까? 이 시기에 백제 쪽은 고구려나 또는 바다 건너의 중국 대륙과도 거의 문제가 없었다. 다만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왕을 죽인 백제 정부는 대륙의 진(晉)에 사신을 보내 그 경위를 해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근초고왕 27년(AD 372) 정월사신을 진으로 파견하여 조공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적인 사관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조공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당시 백제는 중국의 동부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다만 백제가 국제적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특사를 파견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조공이란 방문하는 쪽에서 의례적으로 지참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와의 분쟁 직후에 진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그 사건이 국제 문제화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미 진과 고구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당시의 고구려를 중심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당시의 국제 정세를 통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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