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스며드는 용들

은바리라이프 2008. 6. 7. 01:13
제목 : 스며드는 용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4-04-27
후한 말기에 중국 대륙에서 패권을 다투던 세 나라를 통일한 것은 조조의 위를 계승한 사마염의 진이었다. 그러나 외척의 발호로 국력이 약해진 진은 AD 316년에 멸망하고 호족들이 일어나 오호 16국의 시대가 되었는데 이 때 사마예가 진의 계승을 명분으로 건업에 세운 나라가 동진이었다. 백제가 사신을 보낸 진은 바로 이 동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와의 분쟁 발생 이전에 고구려에서도 동진에 사신을 보냈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고국원왕 6년(AD 336)3월에 큰 별이 서북으로 흘러갔다. 사신을 진으로 파견하여 방물(方物)을 바쳤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당시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 있던 나라 연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연왕 모용황은 고구려를 정복하고 중원까지 도모하려는 야망의 사나이였다. 고국원왕은 즉위하자마자 북방에 신성을 쌓아 연에 위협을 가하는 한편으로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종의 합작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신이 동진에서 돌아온 후 고국원왕은 도읍을 북방의 환도성으로 옮긴다.
삼국사기에는 연의 장수 모용한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전략을 왕에게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동의 연이 고구려를 침공하려면 북쪽의 육로와 남쪽의 해로가 있는데 고구려가 북쪽의 방어에 치중하고 있으니 남쪽을 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고구려는 평양을 버려두고 북쪽의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일까?
고구려는 아마도 동진에 연의 해상 침투로를 봉쇄해 달라고 요청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연은 모용한의 작전대로 4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로를 통해 쳐들어왔고 고구려는 대패하여 그 왕모와 왕비를 납치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왜 동진은 연의 진로를 막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중국 대륙의 동부 지역과 고구려의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백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왜 백제는 또 같은 형제국인 고구려를 도와주지 않고 연왕의 고구려 침공을 방관했던 것일까? 도대체 고구려와 동진 사이에는 어떤 협상이 오고 갔던 것일까? 우리는 고구려와 동진을 있는 어떤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와 동진을 연결하는 사건은 오직 ‘고승전(高僧傳)’에 한 가지가 나올 뿐이다.
“지둔 도림이 고구려 도인에게 서신을 보내어 축잠(竺潛)을 찬칭했다.”(‘고승전’ 권4 축잠전)
이 지둔(AD 314-366)은 동진의 고승이었고 이 기사는 동진과 고구려 사이에 이미 불경의 교류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본래 불교가 중국 대륙에 전해진 것은 후한의 명제 10년 즉 AD 67년이었다. 그 후 이 외래 종교는 오호 16국 시대의 불안한 사회에 급속하게 번져나갔으며 각국의 군주들은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민심을 장악하려고 했다.
“서진 시대에는 180여개의 사원이, 동진 시대에는 1,768개의 사원으로 확대되고 승려도 3,7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이춘식 ‘중국사 서설’ p200)
이렇게 되면 우리는 고구려와 동진 사이에 있었던 한가닥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중국 대륙에 들어온 지 무려 3백년이 지나도록 불교는 고구려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이렇게 불교에 대하여 완강했던 것은 거기에 반드시 강력한 기존 신앙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웃 나라에 새로 들어와 유행되고 있는 종교가 3백년이 넘도록 들어오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가 동진에 협력을 요구했을 때 동진은 무엇을 요구했을까? 이미 동진의 지배층이 모두 열렬한 불교 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은 고구려에 신앙의 개방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백제는 고구려를 위해 연의 침입 루트를 막아주지 않고 오히려 동진을 봉쇄하여 연의 구구려 침공을 도와주었던 것일까? 그것도 역시 고구려가 삼국 공통의 신앙을 저버리고 불법을 들여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삼국사기는 고국원왕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소수림왕이 즉위하자마자 바로 불교를 공인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소수림왕 2년(AD 372) 전진(前秦)왕 부견이 사신 및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공문을 보내므로 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사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소수림왕 4년(AD 375)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건하여 중순도를 이 절에 두고 또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중 아도를 이 절에 두니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이다.”
이일이 끝난 후 소수림왕은 곧 한풀이라도 하듯 연이어 백제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림왕은 곧 한풀이라도 하듯 연이어 백제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림왕은 그 당대에 아버지의 원한을 풀지 못했다. 결국 이 한풀이는 고국원왕의 증손자인 장수왕 때에 가서야 겨우 실현된다.
“장수왕 63년(AD 475) 왕은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그 국도인 한성을 함락시켜 백제왕을 살해하고 남녀 8천명을 포획하여 갔다.”
결국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살해당한 지 104년만에 그 원수를 갚았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백제가 왜 고구려에게 패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놓고 있다.
“장수왕은 백제를 도모하기 위하여 간첩을 구하는데 중 도림(道林)이 자원하여 아뢰기를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는 이 때에 백제에도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고 전한다.
“침류왕 원년(AD 384) 9월에 호승 마라나타가 진으로부터 이르렀으므로 왕은 이를 맞아 궁내에서 예의로서 공경하였는데 불법이 이로부터 시행되었다.”
“침류왕 2년(AD 385) 2월에 불사를 한산에 창건하였고 도승 10명을 두었다.”
그러나 필자는 김부식이 전하는 이 기록에 찬송하지 않는다. 그는 마라난타를 호승(胡僧)이라고 썼는데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대륙에서 호자가 붙는 말은 호마, 호도, 호초, 호접무 처럼 모두가 페르샤나 로마 등 서역에서 들어온 문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승 마라난타는 페르샤에서 온 기독교의 선교사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이름 자체가 아람어로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이다. 어쨌든 백제에 불교가 있었다면 중이 간첩으로 들어갈 리가 없는 것이다.
백제의 개로왕은 바둑 두기를 좋아하였다. 본래 바둑의 고수인 도림은 백제 왕궁에 들어가 왕으로부터 상객의 대우를 받았다. 왕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한 도림은 그를 부추겨서 왕궁의 개축 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계속되는 공사로 마침내 백제의 국고는 바닥이 나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을 때 도림의 첩보를 받은 고구려 군이 백제를 들이닥쳤다. 백제는 신라의 원군을 청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성은 점령당했고 백제왕은 고구려 군에게 잡혀서 참살을 당했다. 백제에 정식으로 불교가 들어온 것은 그 후 66년이 더 지난 제 25대 성왕 때였다.
“성왕 19년(AD541) 사신을 양에 파견하여 불경과 공장과 화사 등을 청하였더니 양은 이 뜻을 따랐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3 >

'성경역사 > 성경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목 : 금갑을 쏘아라  (0) 2008.06.07
제목 : 만리장성을 넘어서  (0) 2008.06.07
제목 : 어느날 갑자기  (0) 2008.06.07
제목 : 내가 너를 던지리라  (0) 2008.06.07
제목 : 다시 들어온 여자  (0) 2008.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