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만리장성을 넘어서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4-05-25 |
중앙아시아로부터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 대륙에 진입한 아리안 족이 타락한 인더스 문명을 건설하고 있던 드라비다 족을 제압하고 그들을 영원히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 카스트라는 특이한 계급제도였다. 초기에 인도 사람들의 신분은 사제 계급과 지배 계급 그리고 평민 계급과 노예 계급 등 네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졌는데 이것을 영구화하기 위하여 윤회설이 사용되었다. 즉 사람의 신분은 전쟁의 업보에 의해 숙명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었다. 이 카스트 제도와 윤회설이 백성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하는데 효과적이었으나 개인의 자유와 능력이 억압되어 궁극적으로는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러한 카스트 제도의 엄청난 해독을 깨닫고 이에 저항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 마하비라(BC 540~468)의 자이나교와 고다마 싯달타(BC 566~486)의 불교였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라는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개인의 구원 또는 열반이 신분이나 계급과 관계가 없다며 만민 평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힌두교의 신들을 거부하다 보니 모두가 신이 없는 무신론의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선악을 판단하는 가치의 기준을 신이 아닌 업에 두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힌두교의 전통적인 윤회설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불교가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하게 된 것은 마우리아 왕조의 제 3대왕인 아소카 왕(BC 269~232)때부터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남겨 놓은 마게도니아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일어난 찬드라굽타가 셀류쿠스의 세력을 물리치고 인도 북부지역에 마우리아 왕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을 물려받아 인도 대륙을 거의 다 장악해서 통일 제국으로 만든 사람이 아소카 대왕이었다. 그러나 비록 초기에는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대제국을 건설했어도 안정된 세력을 구축하여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대외적으로도 국가의 위상을 높이려면 무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판단한 그가 덕치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불교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불교에 귀의하고불전을 정리하며 외국에 포교단을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포교에 힘썼다. “다르마(도덕규범)에 의한 공략 정책에 따라 아소카 대왕은 미개한 원주민에게 도덕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금가지의 군사 지도자들을 종교사절단으로 바꾸었다.”(조기태 ‘인도사’p107) 이렇게 해서 불교는 전 세계에 포교단을 파견했고 인도 국내보다는 오히려 국외에서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AD 67년에는 후한에 들어가 장안과 낙양에 포진했고 조조의 위와 사마씨의 진을 점령했다. 중국대륙에서는 이미 주의 때로부터 토속신과 지방신 섬기는 것을 허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고 한도 그것을 계승했기 때문에 불교의 진출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진을 뒤엎고 일어선 한은 동이를 포섭하기 위해 공자의 살아남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불타버린 책을 복원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내용을 주의 통치이념에 맞추도록 했는데 이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공자가 쓴 진본의 경서들이 나와서 문제가 발생했다. 전한의 경제때 노공왕이 그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의 집을 헐다가 그 벽에서 대나무쪽에 과두문자로 기록한 공자의 진본 경서 즉 고문상서(古文尙書)가 나온 것이다. 이 문제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졌으나 한의 황실은 물론 금문학파의 편이었다. 후한의 평제는 고문상서를 폐지해 버렸고 그 후로는 학자들이 복원했다는 금문상서만 남게 되었다. 그러게 해서 중국 대륙에서는 황실의 주동으로 조상신과 귀신을 섬기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논어는 공자의 가르침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논어 ‘述而’ 20) 이렇게 전한과 후한에 걸쳐 중국대륙의 유일신 신앙이 무너지고 토속신과 지방신을 섬기는 일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불교의 진출은 순조로웠고 그것이 다시 위와 진으로 자연스럽게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대륙을 쉽게 장악한 불교가 다시 그 포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군자의 나라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였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아직도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였고 특히 폐르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도마가 인도에 전한 예수의 복음이 가야를 통해 이미 들어와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으므로 불교는 한에 들어온 지 무려 305년만인 AD 372년에야 겨우 고구려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술한 대로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키 이전부터 포교의 불교의 침투는 시작되고 있었다. 삼국유사의 ‘홍법’조에는 김용행이 수찬한 아도본비(俄道本碑)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 비의 기사에는 위나라 사람 굴마가 고구려에 왔다가 도녕이란 여자와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도녕이 낳은 아이가 바로 아도였다고 적혀 있다. 아도는 16세에 그 아비를 만나러 위나라로 갔다가 고승 현창을 만나 불경을 배우고 돌아와서 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다시 진의 고승 지둔은 불교 문제에 관하여 고구려 국내 인사와 서신 왕래를 했고 또 진과 고구려 간에는 포교의 개방 문제가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 쪽에서 이를 선뜻 시행치 못하고 잇다가 백제군에 의해 고국원왕이 살해되자 그 아들 소수림왕은 조정과 백성들이 원통해하고 있는 사이에 불교를 공인하여 외교상의 난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보다도 더 어려운 상대는 신라였다. 고구려는 연과 힘든 대결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을 내세워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으나 신라는 반도의 구석에 들어앉아 있어서 그러한 정치적 또는 군사적 접근의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들의 신라 잠입은 꾸준히 시도되었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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