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형 교수의 글에 대한 감상
- 성결신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성결과 새로움”, “소크라테스와 만난 성결”,
“플라톤의 오류: 이데아는 성렬한가?”, “아리스토텔레의 덕에 대하여”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에게서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재창조 활동에 참여해야 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완성되는 구원, 곧 성결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 성결은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받아 인간의 근본 목적을 완성하는 일로서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성결이란 그리스도의 정신과 속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적극적으로 새로운 도덕적인 생명을 나누어 얻는 것이다. 성결론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가르침이다. 존 웨슬리는 기독교의 사랑의 삶이 성결의 진수라고 역설했다. 이제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새롭게 하는 성결의 영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황덕형 교수는 이 과제를 먼저 성서에서 찾는다. 성서는 우리에게 성결, 곧 거룩하게 되는 사건을 두 가지 관점에서 제시하는 바, 첫째는 성령의 사역이며 둘째는 성령의 사역을 받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성령은 새로운 영이며 새롭게 창조하는 영이며 거룩하게 하는 영이다. 사람은 이 영의 현존 속에서 사랑과 정의의 사람으로 변하여 성결하게, 곧 거룩하게 된다. 성결은 삶의 일부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결신학은 ‘인간의 삶 전반을 포괄적으로 감싸는 해석학적 현실’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여기에 성결신학을 새롭게 세우려는 황 교수의 위대한 신학적 포부가 찬란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황 교수는 지성사와의 대화를 새롭게 시도하는바, 대화의 파트너로는 동서양의 정신사를 위대하게 만든 성현들과 사상가들을 두루 살피는 중이다. 그들은 인류의 지성을 풍부하고 아름답고 고결하게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결 사상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파문(波紋)의 가장자리가 우주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황 교수의 대화 파트너는 우선 고대 그리스의 삼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들(순교자 유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게네스)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기 위하여 이들 철학자들의 언어와 사상을 차용한 적은 있지만, 성결론의 새로움을 개척하기 위하여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황 교수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황 교수는 인간들 속에 존재하는 빛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빛은 진리의 빛 가운데서 변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신학과 철학의 대화를 통한 상호 유사성과 차이의 확인으로 만족하자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이해의 변증법을 통해 양자가 하나님의 진리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황 교수가 본 소크라테스의 삶은 인간 이상의 것을 살았던 사람이다. 여기서 ‘인간 이상의 것’을 살았다고 말하는 근거는 소크라테스가 평생 신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진실한 종교인으로서 신의 음성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의 삶은 죽음으로 신의 음성을 따른 성결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의 문제는 특수한 인간, 그리스도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문제이며 역사의 문제”라는 것이 확인된다. 성결의 요구는 인간의 보편적인 요구이다. 소크라테스는 야스퍼스의 용어로 표현하여 철학적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과 성결의 삶은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의 능력 속에서 완성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달리 그의 제자 플라톤은 성결의 주제와 관련하여 위험할 수 있다고 황 교수는 진단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플라톤이 새롭게 인식한 이데아, 선의 이데아는 현상세계를 떠나 참된 세계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신앙인들의 삶의 과제와 동일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양자가 과연 동일한 세계이며 신앙인들의 참된 세계는 보이는 세계를 떠날 때 찾아지는 것인가? 아무튼 황 교수는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통하여 신의 세계에 참여(methexis)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서도, 신앙인의 성결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름에 응답하는 책임이라면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너무나도 인간적이며 주관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플라톤의 손가락이 하늘의 이상을 가리킨다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의 현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황 교수는 성결의 신학은 현실변혁의 신학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신학은 땅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성결론은 그의 덕과 행복론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의 행복론은 상태의 언어, 존재의 언어이지 사건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를 노출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존재의 유비로써 이해하려는 사유체계는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황 교수는 하나님과 세계의 조화로운 연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절규를 강조한다. 그러나 성결의 이념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다면, 절규할 때 절규해야겠지만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제 우리 몸은 성령의 전으로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의 신의 소리,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에 모두 성결의 사상이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므로 그 이상의 어떤 것, 곧 하나님의 증거, 성령의 능력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황 교수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사상가들과 긴 역사적 간격을 뛰어넘어 굳이 기독교인이 만나려고 하는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 그 엄청난 지적 탐험에 비해 새로운 발견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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