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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저작에 나타난 보혜사 연구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8:42
요한 저작에 나타난 보혜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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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호


요한 저작에 나타난 보혜사 연구



1. 여는 글

본 글의 목적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나타난 보혜사 개념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보혜사에 해당하는 ‘파라클레토스’는 요한복음(14:16, 14:26, 15:26, 16:7~11)과 요한일서(2:1)에서만 나타나고, 다른 신약성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파라클레토스’는 특정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소위 ‘고별설교’(요 13~16장)에만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에서 고별설교(13~16장)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선행연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단어(text)의 바른 의미는 문맥(context)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기존의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어원학적 연구보다는 ‘고별설교’라는 문맥을 중심으로 파라클레토스를 다루려고 한다.
논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첫째, ‘파라클레토스’란 단어가 그레코-로만(Greco-Roman) 시대에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이를 요한은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파라클레토스’가 어떤 문맥에서, 어떤 개념으로 사용되었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라클레스토’를 관계론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즉, 세상과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 제자와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 예수와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다.


2. 파라클레토스의 개념

2.1. 요한의 성령 이해의 특징

요한은 바울과 누가와 더불어 신약성서 성령 이해에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중에서 한명으로 평가된다. 이 가운데 요한복음(요한일서)은 바울서신과 누가문서(누가-행전)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어떤 신약성서 저자보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자신의 신학적 전망과 교회적 삶의 정황에 일치하도록, 가장 신학화시켜 이해한 신약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1)
바울이 성령을 ‘구원론적 기능을 담당하는 영’2)으로, 누가는 성령을 ‘교회의 구성원들이 선교를 담당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은사들을 수여하는 예언의 영’3)으로 이해한다면, 요한은 성령을 법률적인 배경에서 나온 보혜사(paracletos)라는 술어와 관련시켜 제시한다는 점에서 바울과 누가와는 차이가 난다.4) 그렇다면 왜 요한은 성령을 설명할 때, ‘파라클레토스’란 용어를 사용했을까? 또 그 당시에 이 용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일까?

2.2. 파라클레토스 개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약성서는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로 기록되었기에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면, ‘그 당시’라는 의미론의 장(semantic field)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사실, 래드(G. E. Ladd)의 지적대로, ‘파라클레토스’의 본질적인 의미는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5) 그러나 이 칭호에 대한 어떤 언어적, 종교사적, 전승사적 배경이 있는지에 대해서 아직도 명쾌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벰(Behm)의 지적대로 ‘파라클레토스’는 “신약 밖에서 알려진 헬라어와 헬라어 관용법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난 이 용어의 발달사는 현대적 의미의 법정에서 존재하는 법률 고문, 조력자, 변호사에 대한 분명한 상을 제시한다.”6) 즉, 피고를 변호하고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법정에 출두한 사람을 ‘파라클레토스’라고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한은 단순히 이 의미만을 사용하지 않고, 다의적으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파라클레토스’개념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변호자(advocate)로서의 ‘파라클레토스’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형식적으로 ‘수동태 동사-형용사’로 특별히 법정에서 어떤 적대적인 상황에서의 자문, 후원, 지지해 주는 목적으로 ‘곁으로 부름을 받은 자’를 뜻하는 법률적 배경을 가진 단어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를 ‘변호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파라클레토스’의 법정적인 개념은 제자들의 증거와 관련되어(15:26), 세상임금을 심판하고 세상을 책망하는 본문(16:8~11)에서,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성도를 변호하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사용된다. 둘째, 위로자(comforter)로서의 ‘파라클레토스’다. 이는 ‘위로하다’ 혹은 ‘격려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파라칼레인(parakalein)과 명사 파라클레시스(paraklesis)에서 ‘파라클레토스’가 유래한 것으로 보아, 위로자로 보려는 것이다.7) 셋째, 돕는 자(helper)로서의 파라클레토스다. 이 외에도 상담자로서의 파라클레토스의 개념도 나타난다.

2.3. 다층적인 개념으로서의 파라클레토스

이렇게 요한복음과 성경 이외의 문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 개념은 단일하지 않고 다의적이며 다층적이다. 즉,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은 변호자, 위로자, 돕는 자, 상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더욱이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14:16), 모든 것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며(14:26), 예수를 증거하며(15:26),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실상을 밝히고(16:8~11), 모든 진리로 인도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선포하신다(요 16:13). 비록 파라클레토스가 성경 외 문헌에서는 법적인 개념으로서의 ‘변호자’로 주로 사용되지만,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 용어를 다양한 맥락에서 그 역할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 개념 가운데 파라클레토스의 가장 본질적인 개념은 무엇일까? 이한수는 파라클레토스를 ‘변호자’(advocate)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보혜사의 포괄적인 기능들을 온전하게 대변하는 술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그 법률적 배경에 착안하여 그것을 변호자로 번역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 것”8)이다.
브라운(R.E. Brown)도 역시 파라클레토스를 법정적인 의미로서의 변호자로 이해하기를 선호한다. 특별히 브라운은 요한복음 전체가 법정적인 분위기에서 기록되었다고 본다. 즉, 요한복음은 침례 요한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 재판에 이르기까지 법정에서 고발자(accuser)와 변호자(advocate)와의 치열한 논쟁과 공방 분위기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9) 하지만 브라운은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법정적 상황에서 변론하는 변호사(defense attorney)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검사(prosecutor)의 의미가 더 많다고 주장한다.10) 또한 모리스는 요한복음에서의 보혜사를 “법정에서의 친구”11)로 묘사한다.
차후에 다루겠지만, 요한복음에서의 보혜사는 세상, 제자, 예수와의 관계에서 그 개념이 파악된다. 파라클레토스는 세상에 대해서는 책망하고 고소하는 검사의 역할을 수행하며, 제자들 사이에의 파라클레토스는 가르치며 깨닫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하여는 그가 진리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변호하신다. 단, 중요도에 따라 세상과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 → 제자와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 → 예수와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변호하고 증거하는 파라클레토스의 사역이 요한의 큰 관심이었다는 것은 ‘증거하다’에 해당하는 ‘말튀레오’()의 빈도수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말튀레오’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각각 1회 등장하고, 마가복음에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33회나 등장한다.12) 즉,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세상을 대하여 고소하고 책망하며, 제자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며 알게 하지만, 먼저는 증거하는 사역이 그 중심에 있다. 이제 고별 대화(13~16장)와 요한일서 2장 1절에서의 파라클레토스에 대해 알아보자.


3. 요한복음에서의 고별 설교(13~16장)

요한복음에서 ‘파라클레토스’는 13~16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그 외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론의 자리는 요한복음 전체라기보다는 ‘고별설교’에 제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고별설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그 의미에 대해 탐구해 보고, 파라클레토스가 언급된 본문을 주석해 가면서 그 본 의미를 연구하고자 한다.

3.1. 유언문학으로서의 고별설교(13:31~16:33)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은 네 덩어리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첫째 덩어리는 ‘서론’13)(1:1~51)으로, 두 번째 덩어리는 ‘표적의 책’(2:1~12:50)으로, 세 번째 덩어리는 ‘영광의 책’(13:1~20:31)으로 네 번째 덩어리는 ‘부록’(21장)으로 불리운다. 이 가운데 파라클레토스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바로 ‘영광의 책’(13:1~20:31)이다. 그리고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파라클레토스는 이 가운데서도 ‘고별설교’(13:31~16:33)에서 나타난다. 그럼, 이제 고별설교 자체로 들어가 보자.
고별설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난다고 한 것에 대해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위로로 주어진 말씀이다. 고별 설교의 글쓰기 방식은 유대교 문헌과 그레코-로마 문헌 모두에서 죽어가는 영웅의 이별 장면을 기록한 유언문학에 속한다. 그 당시에는 흔히 죽어가는 영웅적 인물로서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이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14) 하지만 고별설교의 틀(frame)이 그레코- 로마 문헌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죽음을 앞둔 야곱이 아들들에게 유언했고(창 49장), 모세도 모압 평지에서 백성들을 향하여 유언적 설교를 했다(신명기). 신약에서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설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고별설교는 유대교와 구약의 유언 문학과는 달리,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구약과 유대교 유언문학은 주로 축복을 언급하지만, 요한복음의 고별설교에는 위로가 중심주제다. 둘째, 구약과 유대교 유언문학에서는 선생 혹은 영웅의 부재를 전제하나, 요한복음의 고별설교는 보혜사 대신, 다른 보혜사가 올 것이라 말한다. 셋째,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서는 선생 혹은 영웅의 죽음을 말하나, 고별설교는 죽음을 이긴 부활을 말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를 갖는다.15)

3.2. 영광의 책(13:1~20:31)에서의 고별설교(13:31~16:33)의 위치

고별설교(13:31~16:33)의 대상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예수의 말씀이다. 이전까지는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면(1~12장), 고별 설교(13:31~16:330)와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16)(17장)는 제자와 아버지와의 대화와 기도로 구성된다. 즉, 고별 설교를 중심으로 이전(before)의 예수의 삶은 ‘수평적 차원’으로 세상을 향한 것이라면, 이후(after)는 ‘수직적 차원’으로 17장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복음서가 진행되면서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상승하는 곡선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별 설교(13:31~16:33)는 ‘세상을 향한 사역’(2~12장)과 ‘아버지를 향한 간구’(17장) 중간에 끼여 있다. 즉, 세상을 향한 사역(2~12) → 제자들을 향한 유언(13~16) → 아버지를 향한 유언(17)으로 도식화 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파라클레토스가 등장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 고별설교를 중심으로

고별설교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총 4회 등장하는데, 14:16, 14:26, 15:26, 16:7절에서 언급된다. 그런데 4회에 걸쳐서 나타나는 파라클레토의 역할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이제 본문을 통해 파라클레토스의 개념과 기능에 대해 탐구해 보자.

4.1. ‘이미’와 ‘아직’ 사이의 파라클레토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도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예수께서 처음으로 파라클레토스를 언급한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14장 16절이다. 하지만 16절은 17절과 연결되어 한 문장을 이룬다. 여기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세 가지의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파라클레토스는 세상에 대해 자신을 전혀 계시하지 않지만, 제자들에게는 자신을 알리시며 영원토록 함께한다. 예수는 세상과 제자들을 선명하게 구분하신다. 예수는 세상이 성령을 받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함으로 삼중적 부정()을 통해 세상과 성령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비슬리 머리(G. R. Beasley-Murray)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된 “‘받기,’ ‘보기,’ ‘알기’는 모두 신앙 용어로 각각 ‘계시를 받아들임,’ ‘예수 안에서 구체화된 것을 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수반하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관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고 본다.”17) 반면, 제자들은 성령을 알고 있고, 성령은 이미 그들과 함께 하고 있으며, 미래에 그들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함으로 성령과 제자들의 친밀도를 언급한다.
둘째, 파라클레토스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계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에서 두 개의 동사가 나온다. 첫째는 ‘구하다’라는 헬라어 ‘에로테소’()로 이 동사의 시제와 시상은 미래-능통태다. 둘째는 ‘주다’라는 헬라어 ‘도세이’()로 이 동사 역시 시제와 시상이 미래-능통태다. 즉, 예수께서 가까운 미래에 ‘다른 보혜사를 구할 것이고 주실 것이다’는 애기다. 더욱이 그 파라클레토스는 이미 제자들과 함께 하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너희 안에 계실 것이다. 여기 ‘거하심이요’()는 현재형이요 반면, “계시겠음이라”()는 미래형이다. 이때 ‘너희와 함께’()란 말은 동행의 의미(with you)이고 ‘너희 속에’()는 내주의 의미다.18) 이렇게 요한은 성령의 동행과 내주를 구분하여 설명한다.19)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후기 사역에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만(마 16:16), 요한복음은 초반부터 나다나엘(1:49), 사마리아 여인(4:25), 마르다(11:27)가 예수에 대한 완벽한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기록한다. 아직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완벽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고 요한은 보도한다.
셋째, 여기에서 파라클레토스의 파송은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된다.20) 아들은 파라클레토스를 구하는 분이요 아버지는 파라클레토스는 파송하시는 분이요, 파라클레토스는 오시는 분이시다. 파라클레토스의 내주는 독단적으로 이루어지 않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성취된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다른’ 보혜사다. 요한은 ‘다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로스’()와 ‘헤테로스’()를 의도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21) 요한에게 있어서 ‘알로스’는 “같은 종류 중에서 다른”(another)을 뜻한다. 더욱이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예수를 ‘보혜사’로 칭한다. 이와 같이, 보혜사이신 예수와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기능적으로 동일하신 실체다. 계시는 본질과 기능이 동일한 실체에 의해서 계시된다. 즉, “계시의 제1원칙은 계시자(the reveler)는 계시되는 자(the reveled)와 같다.”는 것이다. 실례로,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설령, 아무리 원숭이가 사람과 99% 같다 해도, 다른 1% 때문에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22)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알려지듯, 보혜사는 다른 보혜사에 의해서 알려지고 계시된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 14:16~17절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된다.

4.2.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니라(14:26).

이 본문에서도 역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오신다. 단, ‘내 이름으로’() 오신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나타난다(5:43; 1:25). 역시 이 본문에서도 파라클레토스는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된다. ‘파라클레토스’는 ‘아버지’로부터 오시되, ‘아들’의 이름으로 오실 것이다.
그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은 두 가지로 집약되는데, 그 대상은 오직 제자들이다. 첫째는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이요 두 번째는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두 동사 ‘디닥세이’(), ‘휘폼네세이’()는 둘 다 미래형이다. 이 본문에서도 성령은 아직 내주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별히 파라클레토스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기억나게 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형태인 ‘휘폼네세이’()는 요한복음 내에서 여기에서만 나타난다. 파라클레토스는 자신의 것을 말씀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보혜사로서의 성령은 오직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기억나게 하신다. 다른 보혜사로서의 성령은 오직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역할과 예수의 계시를 회상시키는 일을 하신다. 여기에서 보혜사와 다른 보혜사인 예수와 성령은 기능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26절의 ‘파라클레토스’는 철저하게 ‘기독론적 파라클레토스’(Christological Palaclte)다.

4.3. 예수를 증거하는 파라클레토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15:26).

이 본문에서의 파라클레토스의 주된 기능은 ‘나에 대하여’()에 변호하고 증거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파라클레토스는 다른 본문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기독론적으로 이해된다. 파라클레토스의 일은 세상을 향하여 책망하고(16:8), 제자들 안에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지만(14:26), 이 본문에서는 예수에 대해 변호하실 것이다. 더욱이 이 증거의 기능은 성령만이 아니라 제자들까지 포함된다. 여기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세상과 맞서 그리스도를 위해 소송 사건을 담당한다는 것이다.23)
여기에서 동사가 총 5개 나온다. 즉, ‘보낼 것이다,’‘ ‘나오시다,’ ‘올 것이다,’ ‘증거하실 것이다,’ ‘증거한다.’이다. 이 가운데 ‘보낼 것이다’(), ‘오실 것이다’(), ‘증거하실 것이다’()는 다 미래형이다. 반면, ‘나오시다’(), ‘증거하다’()는 현재형이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파라클레토스는 아직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않았고 아직 오시지 않았으며 아직 증거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파라클레토스는 이미 아버지로부터 지금도 나오고 계시며 제자들은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시는 것과 나오시는 것을 시간적으로 구분하신다. 성령이 나오시는 것은 현재형(엑포뤼에타이)으로 지금도 나오시나, 아직 오지(엘테)는 않았다. 여기에서도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독특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즉, 이미 나오시고 계시나 아직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already but not yet). 성령은 지금 아버지로부터 계속 나오고 계시나(감동, 동행), 아직은 제자들에게는 오지 않았다(내주). 성령은 가까운 미래에 오셔서 증거하실 것이요 제자들은 이미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이미 나오시는 분이시며 또한 미래에 오실 것이다.
역시 이 본문에서도 파라클레토스의 파송은 삼위일체론적이다. 아들은 파라클레토스를 요청하는 분이요, 파라클레토스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다.

4.4 책망하시는 파라클레토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7~11)

이 본문이 요한복음에서 파라클레토스가 마지막으로 언급된 부분이다. 이 본문은 보혜사가 언급된 다른 본문과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로, 파송자로서의 하나님이 제외되어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가심과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부정 조건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가지 않으면 보혜사는 올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셋째, 성령의 사역이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기능이 나온다. 이 외의 본문에서는 파라클레토스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시며, 예수를 변호하는 일을 수행하시나, 이 본문에서는 고발하여 정죄하는 ‘검사’(prosecutor)의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파라클레토스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여기에서 ‘책망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렝크세이’()는 미래 능동형으로 원형은 ‘엘렝코’()이다. 이 단어는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즉, 뷔흐셀은 이 단어가 호머(Homer)에게 있어서 엘렝케인()은 ‘경멸하다,’ ‘창피를 주다’를 의미하며, 보다 후대의 문서에서는 폭로, 적대에 의해 ‘부끄러워하게 하다,’ ‘비난하다,’ ‘폭로하다,’ ‘반대하다’라는 뜻을 의미한다고 보며, 특히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그의 죄를 제시하며 회개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24)고 본다. 이러한 책망의 대상은 죄와 의와 심판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카이아즘 구조(Chiaism structure)와 같은 요한의 문학기법을 발견하였다. 8절에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AXA、, 8절)라고 언급하되, 다시 9~11절까지 더욱 심화하여 재설명한다. 즉,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A. 죄에 대한 파라클레토스의 책망(9절)
X. 의에 대한 파라클레토스의 책망(10절)
A、. 심판에 대한 파라클레토스의 책망(11절)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요한일서 2장 12~14절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요한은 요일 2:12~13절에서 요한은 자녀들에게(A), 아비들에게(X), 청년들에게(A、)에게 권면한다. 나이별로 한다면, 당연히 자녀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아비로 가야되는데, 요한은 순차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아비의 신앙을 가운데로 배치한다. 그것도 11~12절과 13절에 다시 반복하면서도 이 틀을 그대로 유지한다.

A. 죄 사함을 받은 아이의 신앙(12절)
X.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의 신앙(13절 전반절)
A、. 악한 자를 이기는 청년의 신앙(13절 후반절)

이 두 개의 구조를 합해 본다면, 죄와 죄 사함을 받은 아이의 신앙이 상응하고(AA), 의와 태초에 계신 이를 아는 아비의 신앙이 상응하며(XX), 심판과 악한 자를 이기는 청년의 신앙(A、A、)이 서로 상응한다. 이 두 개의 구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X에 해당하는 의와 관련된 아비의 신앙이다.
그렇다면 파라클레토스가 책망하는 정확한 대상은 누구인가? 세상인가? 아니면 세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제자들인가? 9~11절을 보면, 파라클레토스의 책망의 대상이 ‘세상’이 아니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오해하는 제자들의 ‘생각’임을 알 수 있다.25) 그래서 9~11절을 말씀하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그 대상이 제자들로 바뀌어져있다(9~11절). 즉,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오해하는 것들의 실체에 대해 밝히시는 것이다. 첫째로, 죄는 더 이상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둘째, 의란 율법을 지켜서 얻어지는 공적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심으로 아버지께로 가셔서 그가 죄인이 아니요 의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의다. 셋째, 심판은 인간이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26)
특별히, 9절의 ‘믿지 아니함이요’에 해당하는 동사 ‘피스튜신’()과 10절의 ‘보지 못함이요’에 해당하는 ‘테오레이테’()는 모두 현재형이나, 11절의 ‘심판을 받았다’는 ‘케크리타이’()는 완료시제로 기록되었다. 즉, 죄와 의에 대한 것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지만,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은 이미 완료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의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은 다층적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삼위일체적 구조에서 파송 받는 분이시다.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가 하신 모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 즉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실상을 말씀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성령은 현재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나, 미래에 그들 안으로 내주할 것이다.


5. 요한서신에서의 파라클레토스

요한일서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일서 2장 1절에 단 1회 나오는 ‘하팍스레고메나’(hapax legomena)이다. 요한일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요한복음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전부 다 성령을 지칭하나, 요한일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요일 2:1)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은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분으로 묘사되나, 요한일서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는 이미 ‘아버지 앞에’() 지금도 있는(에코멘, ) 분이다. 요한복음에서의 성령은 예수를 변호하는 보혜사이시나, 요한일서에서의 예수는 그의 성도들을 변호하신다.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아버지 앞에서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위해 변호하신다. 여기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성도를 위하여 늘 간구하시는 분으로, ‘구원론적 파라클레토스’다(Soteriological Palaclete).


6. 관계개념으로서의 파라클레토스

우리가 살펴본 대로, 파라클레토스의 사역과 기능을 한 가지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파라클레토스의 다양한 기능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탐구해 볼 것이다.
첫째는 세상과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이다. 요한복음은 의외로 세상이란 헬라어 ‘코스모스’()를 상당히 많이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마태복음은 9회, 마가복음은 3회, 누가복음 3회 나타나나, 요한복음에서는 무려 78회나 나타난다. 요한은 세상 용어에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즉, 사랑을 받고 긍휼을 받을 대상으로서의 세상(3:26, 6:33, 13:1)과 자기를 배척하고 예수와 본질적으로 다른 장소를 언급할 때의 세상이다(1:10, 8:23, 17:11, 요일 2:15). 하지만 대체적으로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파라클레토스와 연관되어서 세상은 더욱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세상은 능히 파라클레토스를 받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14:17). 더욱이 세상은 세상 임금인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공간이기에 그 안에서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실상이 모호해지기에 파라클레토스는 그것에 대한 실체를 밝히 드러내신다(16:7~11). 특별히, 성령은 세상임금이 이미 심판받았음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단순히 여성적 이미지로 보려는 최근의 시도들은 적절치가 않다.27) 세상과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직접 개입하고 참여하기보다는 견제하고 거리를 두신다.
둘째는 제자들과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곧 미래에 그들 속에 거할 것이다(14:16~17).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고 예수의 모든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더욱이 예수의 부재 시, 그 파라클레토스는 예수 대신 그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며 앞일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다(요 14:26). 그리고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실상에 대해서도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16:7~11). 또한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에 대하여 변호할 것이다(15:26). 이렇게 요한복음에서의 제자들과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매우 친밀하게 나타난다. 마치 선생처럼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그들을 이끌어 가신다. 마치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랍비’로 불렸듯이 말이다. 세상과의 파라클레토스가 적대적이라면,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친밀하다. 세상을 향해선 자신을 공개하지 않으시나, 제자들을 향해선 그들과 함께하시고 영원토록 그들 안에 거하신다(14:16~17).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역할을 통해서 파라클레토스를 ‘구원론적 파라클레토스’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28)
세 번째는 예수와의 관계에서의 파라클레토스다. 요한복음의 파라클레토스는 예수의 고별설교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고별설교에서 파라클레토스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의 부재를 자리매김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그 파라클레토스이기 때문이다. 즉, 파라클레토스는 예수의 뒤를 이어 그를 계승하는 일을 수행하신다. 비록 파라클레토스가 세상과 제자들을 향해서 나름대로의 기능을 수행하시나, 그 일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일을 하기 위함인 것이다.


7. 닫는 글

세상을 향한 파라클레토스가 적대적이고, 제자들을 향하여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 안에 거하시며, 어디까지나 성령과 제자들은 별개의 실체로 존재한다(롬 8:16~17). 즉, 성령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와 성령, 그리고 하나님은 ‘일체’(unity)가 되신 분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삼위일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를 변호하는 보혜사이요 성령은 아들을 변호하는 다른 보혜사이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발생하시고, 성령은 그분으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다.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은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고 요한복음은 일관되게 증거한다.
사도행전에서 드러난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그를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초기교회의 강력한 케리그마(Kerygma)를 선포케 하시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의 본질적 개념은 ‘예수를 변호하고 증거하는 사역’ 즉, 케리그마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증적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구령의 열정이 생긴다. 구령할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뜨거운 열정이 일어난다. 그것은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의 충만함, 그것은 곧바로 영혼 구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파라클레토스의 개념이 ‘세상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예수에게로’ 이행하면서 그 기능이 더 깊어지며, 파라클레토스의 본질적인 사역이 바로 ‘예수 증거와 변호’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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