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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기원과 성경적 의미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8:37
성찬의 기원과 성경적 의미  
성찬의 기원과 성경적 의미  

 신 기 석


Ⅰ. 들어가는 글

성찬은 기독교회에서 중요한 의식 중 하나다.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가 있어 일생에 한번으로 족하지만, 성찬은 생애가 다하도록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 침례와 성찬은 둘 다 주님의 명령으로서 그 중요성에 차등을 둘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따라 침례는 침례만의 전통을 존중하며 따르려 한다. 거기에 비하면 성찬은 동일한 주님의 명령으로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신앙고백임에도 침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이에 필자는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재확인하고 그 의미에 대해 각도를 달리하여 살펴봄으로써 중요성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성찬이 주 예수의 명령인 것을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보도를 비교하여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과 유대 명절인 유월절과의 상관관계에서 주께서 보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 하신 사실을 살핀 후에 이어 그와 관련된 의미를 하나님의 의도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성찬에 대한 일반적 개괄

1. 성찬의 유래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

지금까지 기독교에서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가지신 “최후의 만찬”을 성찬식의 역사적 뿌리로 삼아 왔다. 이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사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 26장 26∼29절, 마가복음 14장 22∼25절, 누가복음 22장 14∼20절,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 등 네 곳에 나타난다.
그러면 과연 이 성찬을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정하신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구약의 유월절 관습의 연장이라는 견해와 유대인의 일반적 만찬인 키두쉬에 불과하다는 견해 그리고 예수 당시의 이방 풍습을 따른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각 견해를 이유와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찬은 유월절 만찬의 연장이라는 견해

상호 보완적인 네 곳의 보도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성찬을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기 전에 제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성례가 유월절 식사의 중심적 요소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1)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다(출 12:1∼20). 이 유월절이 축제가 되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의식으로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니산월(출 12:2) 초 십일에 1년 된 어린 양을 택하여 14일 저녁에 잡고(출 12:6, 레 23:5, 민 9:3) 만찬을 먹는 것으로 시작된다. 축복기도와 찬양을 하며 유월절이 왜 특별한 날인지 묻는 아이에게 조상이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이라고 말해주고(출 12:27), 빵과 쓴 나물을 나누어 먹는다. 이 유월절 만찬은 예수께서 최후에 행하셨던 만찬과 시기(저녁), 음식(빵과 포도주), 형식(축복기도와 나눔) 등에 있어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유월절 만찬을 성찬의 기원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의 근거가 된다.

2) 성찬은 최후의 키두쉬(Kiddush)의 연장이라는 견해

최근에는 유대인의 유월절 관습 중에 키두쉬가 성찬의 형식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도 한다.2) 유대인의 풍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성찬과 유사한 형태의 키두쉬라는 만찬이 대표적으로 유대인 공동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예의 주시한다.
맥스웰(W. D. Maxwell)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당시 유대인 랍비와 그 제자들이 작은 그룹을 지어 매주일 가졌던 식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늘 키두쉬를 가졌는데, 유월절에 행한 것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최후의 키두쉬’라는 의미에서 ‘최후의 만찬’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을 키두쉬의 일종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요한복음서의 기자가 최후의 만찬에 대해 시간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얻는다.3) 만일 최후의 만찬이 키두쉬가 아니라 할지라도 형식적인 면에서 키두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3) 성찬은 희랍의 신비종교에서 유래했다는 견해

근대에 이르러 교회가 시작된 한참 이후에야 성경이 기록된 점을 중시, 성경의 사실성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가 시작되면서 성찬을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독일의 종교사학파는 신약성경의 성찬에 관한 네 가지 보도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그 보도들 사이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예배의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그 문장이 하나의 공식으로 다듬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4) 예를 들어 공관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 서신의 만찬에 대한 기록은 이야기 형태를 가지고 있고 문장이 비교적 세련되지 않았으나 마가복음의 보도는 세련되어 있으며 문장이 하나의 공식으로 다듬어져 있다.5) 게다가 종교사학파는 당시 그리스의 여러 가지 신비 종교들을 연구한 결과 그 종교들도 자체적으로 그 속에 기독교의 성찬식과 매우 유사한 종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가령 어떤 종단에 가입하거나 특별한 종교예식을 거행할 때 기독교의 성찬식과 거의 같은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트만(R. Bultmann)과 같은 학자도 성찬식은 본래 예수로부터 유래했다기보다는 기독교가 희랍의 종교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았다.6)이와 같이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희랍의 신비종교나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성찬식을 설립하였고 이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세운 것처럼 네 가지 보도를 썼으나 각 보도는 초기 기독교의 여러 가지 방향을 가진 공동체들의 예배 의식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 표현과 내용에 있어 다르다는 것이다.7)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유대인의 일반적 풍습으로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 시대 이방의 관습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데 비중을 두는 견해가 있으나 아직은 그 의미나 형식에 있어서 유월절의 연속적 이해에 해당하는 전통적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면 성찬은 과연 유월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만 하는가?
2. 성찬에 관한 보도와 유월절과의 관계

기독교에서 성찬에 관해 공관복음과 바울의 텍스트를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 텍스트가 성찬의 근본 형태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시 기독교의 성찬은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인지라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고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사실 마지막 만찬에 있었던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신약의 설명들이 비록 그 내용에 있어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사도들의 전승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지막 만찬이 베풀어졌던 다락방에 참석했던 목격자들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 기록들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암송되던 마지막 만찬으로부터 인용된 것이다.8)그럼에도 최후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경의 네 가지 보도인 마태복음 26장 26∼29절, 마가복음 14장 22∼25절, 누가복음 22장 14∼20절,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 등을 역사의 예수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보고 성찬의 역사적 근원이라고 믿는다. 이 보도들이 성찬에 대해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를 비교해 보기로 한다.


1) 성찬에 관한 네 가지 보도와 분석

다음 표는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승하고 있는 네 개의 본문을 비교한 것이다.

2) 분석

네 개의 보도를 비교하면 누가의 본문은 마태, 마가 유형과 바울 유형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태는 마가의 본문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두 본문 즉 마가와 바울 서신이 가장 오래된 보도라고 학자들은 본다.
이들을 마가와 마태, 바울과 누가로 나누어 분석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3) 유월절과 성찬의 공통점

일반적으로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 만찬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6장 6, 7절의 구원 약속과 연관지어 생각해 왔고 그래서 순서대로 마시는 잔을 출애굽기 6장 6절을 연관지어 ‘구원의 잔’이라고 불렀으나 예수는 출애굽기 6장 7절의 ‘완성의 잔’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9) 유월절 만찬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 사이의 공통점으로는 다음의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유월절 만찬은 예루살렘에서 하게 되어 있었다. 예수는 베다니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지만 마지막 만찬은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다(막 14:12∼16).
둘째, 일반적으로 본 식사는 늦은 오후에 먹게 되어 있으나 유월절 식사는 밤중에 먹는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도 밤중에 있었다(고전 11:23).
셋째, 유월절 밤에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마지막 만찬을 나눈 후 겟세마네(성읍 지역)에 머무셨다(막 14:26).10)4) 유월절과 성찬의 차이점

그러나 차이점도 표에 정리한 바와 같이 엄연히 있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예수는 일종의 비유적 행위를 통해 유월절 만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한다. 빵을 쪼개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참혹한 죽음을, 포도즙의 붉은 빛깔을 통해서 자신이 흘릴 피를 암시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슈툴마허(P. Stuhlmacher)는 예수의 마지막 만찬이 구약성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 마지막 만찬은 ① 출애굽기 12장 1절 이하와 관련된 유월절 만찬, ② 출애굽기 24장 1절 이하와 관련된 언약의 만찬, ③ 이사야 25장 6∼8절에 나오는 모든 민족의 만찬, ④ 이사야 53장 11절의 성취를 말하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만찬 등과 연관된다는 말이다.11)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내리는 속죄의 사건으로 이해하신 것이다.
슈툴마허와 같은 접근은 역사의 예수와 무관하게 논의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약점이 있다. 예레미아스의 해석도 엄밀히 말해 유월절과 같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단지 기억 내지 기념하는 의미 정도로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

3.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성찬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당시 유월절의 내용과 형식면에서 유사성을 인정하여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단정지어 왔고 때에 따라 유대인의 관습의 한 종류나 희랍 종교 제도의 영향 등으로 보아왔다. 성찬은 그 모든 것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오직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성찬 보도에 나타난 최후의 만찬 시기와 그 정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 성찬에 대한 보도

우선 고린도전서에 말한 바울의 글이 성찬에 관한 기사 중에서 가장 먼저인 것에 착안한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식사를 하기 전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식사가 끝난 후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셨다.12) 다시 말해 떡을 먼저 나누고 식사를 한 다음 잔을 나누었다는 말이다. 이 순서는 당시 유대교적 풍습과 일치한다. 그런데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께서 떡과 잔을 연달아 나누신 것으로 표현하여 후기 기독교 공동체가 행하던 성찬의식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네 가지 기사들 중에서 바울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본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 이 성찬식에 참여할 때는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찬식을 예배의식으로 시행하고 있었고 이를 바울이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바울이 속한 기독교 공동체는 성찬식을 예수께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성찬식)은 주께 받은 것(성찬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찬식은 주님께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
동일한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삶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성찬에 담긴 의미를 유대인의 종교적인 풍습과 함께 거행하시는 것이 더 쉬우셨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을 비롯한 구약의 가르침을 전면 거부하시지 않으셨다.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고 더 온전하게 하신 것처럼 유월절이 밝히는 희미한 역할을 정리하시고 그것의 참의미를 뜻하는 상징으로 성찬을 행하고 계신 것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주후 50년 무렵은 당시 희랍의 종교적 영향을 받아들여 성찬식을 변형시킬 만한 여유가 없었을 때다. 또 당시로는 팔레스틴 지역을 기독교 공동체가 크게 벗어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울 당시의 성찬식은 희랍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마지막 만찬의 시기와 그 정황

예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신 것은 ‘유월절’ 때가 아니었다. 만찬을 마지막으로 행하신 시기로 보아 이미 죽게 될 것을 아시고 마지막 만찬을 행하신 것이지, 유월절 만찬을 염두에 두시고 의도적으로 행하신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유월절 만찬과 예수의 마지막 만찬을 동일시하는 것은 상당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월절은 연례 행사였다. 만일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을 고별 만찬으로 삼으셨다면 여기서 유래한 만찬 또한 연례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혹은 그보다 자주) 성찬을 거행한다.
둘째, 유월절은 온 가족(여자들과 아이들도 포함)이 함께 지키는 축제였다. 그러나 예수의 만찬 자리에는 열 두 제자들밖에는 없다. 예루살렘까지 따라왔던 여자들은 그 자리에 없다.
셋째, 성찬 제정의 말씀에도 유월절 만찬에 대한 암시가 없다. 따라서 마지막 만찬이 곧 유월절 만찬이라는 해석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성찬 제정의 말씀이 생겨났다고 가정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13)넷째, 예수는 유월절 이전에 죽으셨다. 연대기로 보면 요한복음의 연대기가 다른 복음서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인 니산월 14일 금요일에 죽으신다. 바울도 이 연대기에 긍정적이다. 유월절 양은 축제 전에 성전에서 도살되기 때문에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고전 5:7)라는 바울의 말도 예수께서 유월절 전에 죽었다고 추측하게 한다. 바울은 유월절 밤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이라고만 표현했다.
다섯째, 마가복음 14장 55절에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유월절 전에 예수를 제거하려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 축제 전에 죽는 것으로 묘사된 요한복음 18장 1절 이하의 보도와도 부합된다.
여섯째, 마가복음 14장 55절에는 재판을 유월절 당일에 행하는 것은 유월절 계명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을 했을 리가 없다.
일곱째, 마가복음 15장 6절로 보아 유월절 사면은 풀려난 죄수가 유월절 축제에 참여할 수 있어야 그 의미가 있다. 어느 나라든 기념일 특사는 그 기념일이 되기 전에 방면하는 것이 상례다.
여덟째,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은 밭에서 오는 길이었다.14) 분명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유월절 기간이라면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나르는 대단한 노동을 로마 군인에게 강요당한다.
아홉째, 마가복음 15장 42절에는 십자가 처형의 날을 ‘준비일’, 즉 안식일 전날로 기록하고 있다. 유대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축제를 겨우 안식일 ‘준비일’로 표현했을 리가 없다. 준비일이라면 유월절 준비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열째, 마가복음 15장 46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장사하기 위해 고운 베를 산다. 그런 명절에 물품을 파는 상인을 찾는 일이 그리 용이하지 않은데도 말이다.15) 이상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 아닌 것임이 분명해졌다. 예수는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으나 거기서 유월절을 맞기 전에 죽임을 당하신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면 그 위대한 명절을 ‘유언’의 틀로 삼았을 것이다.16) 누가는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원했다”라고 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눅 22:15).
여기서도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신 것’은 그 내용 자체에 유월절에 행하신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고 반드시 유월절 음식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모든 상황으로 보아 유월절에 음식을 나누는 것과 같이 만찬을 나누기를 원했다는 뜻으로 보아야 더 타당하다. 모든 진술들은 한결같이, 예수께서 그 만찬을 통해 앞으로 두고두고 중요성을 띠게 될 무엇인가를 제자들에게 남겨 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Ⅲ.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본 성찬의 의미

성찬이 내포하는 의미는 전통적인 견해로부터 종말론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찬을 예배의 핵심적인 순서로 삼아 성찬의 테이블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재현된다는 저스틴(Justin Martyr)이 있는가 하면, 사제자의 축사에 따라 성찬의 성물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한다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는 완전히 상반된 의견을 제시한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는 성찬 현장의 성물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신다는 기존 견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단지 그리스도 희생의 기념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말씀(설교) 중심의 예배가 등장할 수 있는 길을 텄다.
개혁자 루터(M. Luther)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눈에 보이는 그 성물 안에 그 성물과 함께 한다고 했고, 이어 칼빈(J. Calvin)은 성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므로 그 약속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말씀의 증거가 필수적이며 성물과 말씀에 성령의 사역이 동반될 때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체험하게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17)오늘날은 대개 칼빈의 주장을 따르기도 하나 예배 때마다 행하지 않고 연중 행사에 그치고 마는 것으로 보아 기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단지 기념적 의미에 불과할까? 여기서는 먼저 하나님의 의도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의 의미를 살펴보고 복음 중재적 의미를 밝혀 성찬이 성도의 신앙생활에 제시하는 복음적 가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1. 제3의적 의의 : 구속적 희생과 그 공로의 상징

벌코프(Louis Berkhof)는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의 성찬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첫째,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한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혹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등과 같은 성찬 제정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이루어진 희생적인 죽음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둘째, 신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에 의하여 확보된 유익을 상징적인 의미에서 자기 것으로 내면화시킨다고 말한다. 셋째, 성찬은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신자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믿음의 행동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영혼에 생명과 힘과 기쁨을 주는 효과도 아울러 가진다. 넷째, 성찬은 신자들 상호간의 연합을 상징한다.18)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지난 1982년 페루 리마에서 채택된 성찬 예식서에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전통적 이해가 다음과 같이 일치되게 정리되어 있다.19) 첫째,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마 26:26, 27)에서 비롯된 성부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찬. 둘째,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3∼26)에 근거한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찬. 셋째, 성령께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적 상징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성령 초대로서의 성찬. 넷째,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찬. 다섯째,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메시아의 향연에 대한 예형”인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찬 등 다섯 가지 조항은 기념과 임재, 희생의 포괄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을 위한 제물로서 희생된 것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유월절이라는 온 인류에게 은혜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일생 동안 경험으로 간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 된다.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은 어차피 비유와 상징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성찬의 역사적 근원이 단순히 최후의 만찬에 있다고 할 경우 오직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유월절 만찬이나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념만찬 정도로 축소되고 만다. 따라서 구속적 시각으로는 성찬을 유월절에 관련된 상징적 수준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최후의 만찬 속에 담긴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2. 제2의적 의의 : 하나님 나라의 선취

성찬은 단순히 예수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념만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앞당겨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1) 하나님 나라 잔치의 선취(先就)

예수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셨다. 그들은 율법이 없는 죄인들로 지칭되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셨고 먹기를 탐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자주 식사를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 혹은 만찬으로 비유하여 자주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1, 2),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마 8:11, 공동).
예수는 그 잔치의 신랑에 비유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이로 보아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의 만찬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의 만찬은 안식년과 희년의 법이 실현되어 모든 사람이 한 형제로서 한 자리에 앉아 평등하게 먹는 하나님 나라가 앞당겨 일어남을 뜻한다.20)
2) 하나님 나라 능력의 선취(先就)

차별이 없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억압이 없어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 소경, 절름발이, 앉은뱅이, 중풍병자 등 모든 사람들이 마귀에게 눌려 평등과 자유를 잃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맺힌 것을 풀어주셨다. 그런 영적인 해방과 평등이 없는 인위적인 구제와 선행은 종교적인 형식으로 전락하고 만다.21)세상의 임금인 마귀는 예수 앞에서 그가 하나님을 대적했던 존재인 것을 확연히 드러내고 그의 사망권세로 온 세상을 억압하듯이 예수를 억압하여 죽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그의 권세가 무용지물이고 그의 주장이 거짓이며 그의 존재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 증거로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셨다. 마귀의 세력이 추방당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 전에 미리 가시화·체험된 것과 같이 주의 만찬은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만찬의 가시화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수치와 눈물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만찬(사 25:6, 8, 계 3:20)이 이 최후의 만찬 속에 미리 실현되고 있다.

3. 제1의적 의의 : 종말론적 의미

오늘날에는 성찬에 관한 네 가지 보도에 담긴 종말론적 지평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22) 네 가지 보도에는 공히 종말론적인 구절이 들어 있다.23) 성찬에 대한 명령이 주 예수로 비롯된 것이 사실이고 이는 과거 지향적인 유월절 의미에서 미래를 향한 지평으로의 전개를 의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종말론적 지평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 메시지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24) 또 네 가지 보도가 전하는 역사적 예수의 성찬 행위는 절기와 관습을 따라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공생애가 선지자들의 수많은 예언을 다 이루신 적극적인 행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월절과 상관없이 종말론적인 지평을 성찬 속에 담아 두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의 평소 공생애적인 메시지와 삶의 과정 가운데 연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죽음으로 종료되었다면 예수의 만찬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것으로 그의 죽음이 평범한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수난뿐 아니라 그의 부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의 부활을 전하는 것이 성찬에 담긴 의미인 것이다.25)따라서 성찬은 단순히 옛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나 회상이 아니라 죽은 것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능력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막 14:24),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게다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 그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눈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나누시던 주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부활의 주가 되어 만찬을 나누시는 것이다.
겸손히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보좌에 앉으신 예수는 이미 아버지와 평등한 조화를 이루신다. 또한 예수는 겸손히 순종하며 끝까지 이기고 온 성도에게 그의 보좌를 주시고자 하신다. 성찬의 식사는 종말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자신 있게 기다리는 공동체다.26) 우리는 주 예수의 사랑에 대한 성도의 겸손과 순종의 섬김이 조화를 이루는 그때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때인 것을 알고 기다린다.

4. 복음 중재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자가 오랫동안 말해 온 바로 그분이시다. 그가 명하시는 것은 곧 진리다. 어떤 반복적인 행위와 경험도 진리와 상관있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이지 비유와 상징이 아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진리를 전해주는 복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일이므로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를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는 복음을 통해 각 사람에게 전해진다. 따라서 진리와 복음은 다른 것이지만 청취하고 수용하고 순종하는 과정에는 분리되지 않는다.
진리를 사람에게 깨우치는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은 다양하다. 예배, 기록, 인물, 침례, 절기, 영감 등 이 세상의 만물에 하나님을 아는 신성과 능력이 있으므로 모든 것이 중재의 목적으로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찬은 다음과 같은 복음 중재적 역할을 한다.
첫째, 성찬은 주님의 명령이다.27)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전인격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은밀한 하늘의 일일지라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후에 따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일을 알고 그것이 생명이 되는 선한 것임을 느끼도록 하여 각자 본인 스스로 의지적 결정을 하도록 명령하신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적인 명령이 아니지만 명령으로 받고 순종할 때 생명이 된다(요 12:48, 49). 그런 의미에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명령은 의식과 구분이 된다.28) 의식은 다분히 외형적이다. 의식을 중시하는 가톨릭은 예전이 예배의 중심이 되지만 주님의 명령을 좇는 개신교의 예배에 있어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게 하는 설교(말씀)가 중심이다.
둘째, 성찬은 주님의 새 언약을 말씀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약속이다. 구약의 율법은 모세를 통한 약속이며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이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는 성전 제의가 중심이 되었지만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허물어졌다. 예수께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너희에게는 이 빵이 지금까지 성전에서 먹던 제사음식,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몸을 대신할 것이다. 너희가 함께 마시는 이 잔은 새로운 언약, 즉 제사 없는 언약이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이 언약이 모세에 속하지 않고 전적으로 새 언약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이 갈보리에서 흘린 피로써 새롭게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이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세운 언약이 아니라 개인에게 세우는 언약이다. 성찬을 행함으로써 이미 그 언약 가운데에 참여하게 된다.29) 만약 그 잔을 부인하거나 거절하면 우리는 그의 새 언약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셋째, 성찬으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가 실현된 것을 경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제 비유가 아니라 명령으로써 진리 그 자체다. ‘내 몸이다, 내 피다’ 하시고 나누어 주셨다. 떡과 잔의 포도주가 제자들 몸 속에 들어갔다. 이로써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요일 3:24). 말하자면 떡을 먹은 제자들 속에 예수께서 들어가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떡을 먹은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그의 지체로서 모두 그 안에 속한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안에”가 실현된다. 물론 이것도 성령이 오셔서 증거하시게 된다. 성령은 결코 비유를 증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체험함을 의미한다. 체험되지 않는 믿음은 현상이 없으므로 관념으로 귀착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된 사실을 침례로써 체험하듯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성찬으로 체험한다.
넷째, 성찬은 교회의 본연의 임무(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를 제시한다.30) 주님의 지체가 된 성도들이 교회다. 교회는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감사하는 일과 다시 흩어져서 각각 기도하고 구령하는 일을 해야 한다.31) 모이는 교회는 한 주에 하루뿐이나 흩어지는 교회는 6일이나 된다. 모여서 떡덩이를 떼어 나눈 성도가 흩어져 자신을 떡덩이처럼 나누어주고 다시 돌아와 주님의 한 몸으로 모이는 이 반복의 명령은 예배와 전도가 곧 교회 본연의 임무인 것을 말하고 있다.



Ⅳ. 나아가는 글

모든 외식과 의식적 행위를 마다하신 예수께서 성찬을 반복하며 행하라고 명하신 것은 성찬이 우리를 역사적 예수와 직접 연결시켜 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32) 그럼에도 지금까지 유월절과 성찬을 연관지어 이해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럴 경우 단순히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구속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국한될 가능성이 짙다.
성찬에 담긴 의미가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유월절 만찬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출애굽의 상징적 사건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에 만찬을 가지신 것도 아니고 유월절 이전에 만찬을 하신 것도 아니다. 비록 유대인의 관습과는 유사한 만찬 모임이었다 할지라도 유월절 이전에 유월절과 상관없이 단지 그에게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새로운 신앙체험을 반복하도록 명령하고 계신다. 히브리인의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새 성전을 짓겠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유월절의 전통을 허물고 새로운 신앙경험을 명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각을 교정하면 달리 보인다. 이미 익숙하게 행하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인 제자들에게 율법과 전통적 관습을 다시 명하신 것이 아니라 성찬을 통하여 진리로 영생한 것과 그런 자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성찬을 행하면서 끝날까지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주)

1)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권수경�이상원 공역(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p. 911.
2) 안식일 전날 해가 지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가정에 모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특별히 준비된 안식일 옷과 모자를 착용하고 가족들과 함께 촛불을 밝힌다. 가장은 손을 씻은 후 할라(Hallah)라는 안식일 빵을 나누어 주며 키두쉬(Kiddush)라 불리는 의식을 행한다. 이는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면서 안식일이나 축일이 시작될 때 포도주 잔으로 축성하는 의식이다.
3)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성찬이 유월절에 행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도 요한은 유월절 24시간 전에 행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유월절 음식을 먹고 그 저녁에 체포되신 것으로 말하는 반면 요한은 유월절 전에 이미 체포되신 것으로 기록한다(요 18:28). 따라서 요한복음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만찬은 유월절 축제를 준비하는 종교적 성격의 ‘키두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 김균진, “성찬식의 메시아적 근원적 미래”, 『신학논단』 제18집, 연세대학교신과대학(1989), p. 148.
5) 막 14:22, 24에는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되어 있다.
6)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6. Aufl, S. 150. 김균진, “성찬식의 메시아적 근원적 미래”, 『신학논단』 제18집 (1989), 연세대학교신과대학(1989), p. 148에서 재인용.
7) L. Coenen, Art. Herrenmahl, in Theologisches Begiffslexikon zum Neuen Testament Ⅱ/1, 2. Aufl. 1970, S. 669.
8) 박명곤, 『신약신학개론』(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p. 474.
9) 이진희, 『유대적 배경에서 본 복음서』(서울: 컨콜디아사, 1997), p. 409.
10) G. 타이센, A.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역(서울: 다산글방, 2001), p. 608.
11) Ibid., p. 609.
12)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5).
13) G. 타이센, A. 메르츠, op. cit., p. 610.
14) ‘시골’(the country)로 되어 있는 ‘아그루’()라는 말은 ‘아그로스’()가 원형으로 시골 특히 가축을 모으는 들, 농가, 농장, 토지 등의 의미가 있다.
15) G. 타이센, A. 메르츠, op. cit., p. 611.
16) Ibid., p. 617.
17) 오연수, 『종교개혁사』(서울: 도서출판 한글, 2000), pp. 80-107.
18) 루이스 벌콥, op. cit., p. 914.
19) WCC,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111(Geneva: WCC, 1982).
20) G. Bornkamm, Jesus von Nazareth, p. 72. 김균진, “성찬식의 메시아적 근원과 미래”, p. 155에서 재인용.
21) 김균진, 『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5), p. 228.
22) J. 몰트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박봉랑 외 4인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 269.
23) 사도 바울은 “오실 때까지”, 마가복음에는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막 14:25)로, 마태복음에는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마 26:29)로, 누가는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로 보도하고 있다.
24) 김균진, “성찬식의 메시아적 근원적 미래”, 『神學論壇』 제18집(1982), p. 152.
25) 김기동, 『예수를 알자 (하)』(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9), p. 67.
26)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9), p. 107.
27) 김기동, “베뢰아아카데미강의녹취록”(20기), 제4권(제44강).
28) 김기동, 『말씀과 운동력(하)』(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9), p. 162.
29) 김기동, 『태초에 계신 말씀』(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2), p. 171.
30) 김기동, 『성도가 알아야 하는 교회론』(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5), p.138.
31) 김기동, 『이웃에게 전도하지 않는 죄』(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7), p. 53.
32) 윤철호, 『예수 그리스도(상)』(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p.93.



신기석 / 1960년 출생·공주사범대 졸업·베뢰아대학원대학교 졸업(M. Div.)·베뢰아대학원대학교(Th. M. 조직신학) 과정 재학중·베뢰아아카데미 13기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