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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8:36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  

 백종호


들어가는 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된 이후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신앙 운동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 개혁과 오순절 운동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성령 운동이다. 그 중에서도 20세기 초에 시작된 오순절 신학과 운동의 여파는 아직까지 식을 줄 모르고 줄기차게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본 글은 성령 운동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의 기원과 특징들을 인물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비록 비 오순절 계통에 소속되어 있으나 성령 운동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한국의 신학자 즉, 차영배 교수와 안영복 교수의 성령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성령 운동 개괄

오순절 운동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1901년 1월 1일 캔사즈주 토페가(Topeca, Kansas)에서 아그네스 오즈만 양이 방언을 말한 사건을 기점으로 한다. 1900년 겨울에 챨스 파함(Charles Parham)이 벧엘신학교 학생들에게 부과한 과제를 공동으로 함께 연구하던 중 방언이 성령충만의 증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그네스 오즈만 양이 파함 목사와 그의 동료 신학생들에게 방언을 기대하며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서 안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1901년 1월 1일 20세기를 시작한 첫날에 아그네스 오즈만 양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절실히 갈망하던 그것”이 바로 이 젊은 자매에게 나타났고, 이것은 즉시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1) 비록 이전에도 방언 현상이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고 19세기에는 미국에서 성령침례에 대해서 널리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오순절 운동의 기원을 여기서 찾는 것은 “방언의 현상을 개인적인 현상으로 축소시키지 않고 사도적 교회가 시작된 오순절의 체험으로 돌아가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진리에서 시작하여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는 사건”2)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오순절 운동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랍게 성장한다. 1900년 이전에는 단 한 명도 없었던 오순절 운동(1990년도 기준)은 1억 9천 4백만 명에 달하는 오순절주의자들에 1억 4천 1백만의 은사주의자들을 더하고, 거기에다 기타 숫자를 합하면 오순절 신앙을 추구하는 총 기독교인은 약 3억 7천 2백만 명이나 된다. 또한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여기에다 이방 종교인들이 복음에 의하여 매일 회심한 숫자는 약 1만 4천명에 달한다고 한다.3) 그러므로 이러한 추세를 감안한다면 전 세계 오순절 신앙을 가지고 있는 숫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와 궤를 같이하는 신유, 방언, 축사 등 능력사역을 가톨릭 안에서 추구하는 ‘은사주의 운동’(Charismatic Movement)과 복음주의 안에서 교단의 분리 없이 신유, 축사, 다양한 영적인 은사를 인정하고 실천하는 ‘제3의 바람’(The Third Wind)과 같은 성령 운동은 21세기에도 줄기차게 확장되어 가고 있다. 별 이변이 없는 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제3의 바람은 계속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에는 성령 운동을 하는 그룹의 신학과 기존 보수주의 신학을 접목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운동을 하는 그룹들의 역동적인 신앙과 기존 보수주의의 체계적인 신학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Brand-New) 신학4)을 창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전 세계를 복음화하는 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1.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

한국 교회사에서 성령 운동이 미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의 성령 운동의 시작을 1970년도부터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의 성령 운동의 뿌리는 훨씬 이전이다.
1970년대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오순절 운동이 한국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요인은 이미 한국 교회사에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성령 운동의 색채를 띤 부흥운동과 부흥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1907년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이다. 비록 미국에서 일어난 성령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때는 1928년이었으나,5)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의 기원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오순절적인 사건에 둔다.
1907년에 일어났던 대부흥 운동의 시작은 19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화이트(Miss M. C. White)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된 때에 맞추어 함경남도 원산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 기도회는 점점 장로교, 침례교 등 초교파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던 중 이 기도회에서 남 감리교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강원도에서 수년 간 선교를 해왔지만 괄목할 만한 열매를 얻지 못한 하디(R. A. Hardie) 선교사가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 이 부흥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선교사들 앞에서 자신의 죄와 무력함을 고백하며 회개할 때 오순절적인 강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내가 성신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의 부끄러움과 혼미에 찬 얼굴로 나의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함과 또 그 상태가 빚어낸 모든 결과를 자복하니, 회중은 강한 죄의식과 회개의 신앙생활 체험상의 작용[회개체험]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단순한 신앙으로 내가 성신의 은사를 받았음을 알려 주었다6)
또한 당시 기도회에 참석했던 캐나다 럽(A. F. Rubb) 선교사와 전개은, 전춘수와 같은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충만의 경험을 하게 된다.7) 이러한 기도 운동은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의 인도로 시작된 새벽 기도회로 이어진다. 1906년 가을부터 길선주 장로는 같은 교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국가를 위해 새벽에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길선주 장로와 백치록 장로가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동의하는 교인들은 함께 새벽 기도에 동참하게 되고 급기야 300명에서 500명까지 숫자가 늘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새벽기도회의 시작이다.
이러한 기도운동은 결국 1907년 정월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남자도 사경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낳게 한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 N. Blair)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지체들이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나자 교회는 성령의 강한 임재를 느끼게 되었다. 이 상황을 직접 목격한 영국의 세실(William Cecil) 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가 ‘나의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자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은 듯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이 힘의 나타나심을 폭공적(暴恐的)이라고 기술하였다. 거기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애절한 침통(沈痛)에 사로잡혔다. 각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의 죄가 자기 생활에 정죄 판결을 선언하여 주는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자백할 기회를 얻어 털어놓고 양심의 안정을 얻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말없이 있었으나, 북받치는 괴로움을 억제할 바가 없어 주먹을 쥐고 머리를 땅에 찧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죄과를 폭로하려는 거동을 막으려는 다른 힘과 싸우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의 엄청난 죄의 고백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를 만큼 놀라기도 하고 또 이러한 기사를 생기게 한 능력이 강림하심을 보고 떨면서 자신들이 평소에 사랑하던 한국인 제자들의 참회의 고통에 동정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후에 어떤 이는 기도하면서 또 어떤 이는 심각한 심령의 싸움을 겪으면서 많은 한인 신자들이 온 밤을 새웠다. 다음날 선교사들은 이 사태가 지나가고 거룩한 위로의 교훈으로 지난 밤의 상처를 싸매게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또 다시 이와 동일한 통회와 이와 동일한 죄의 자백이 되풀이되었으며, 이러한 사태는 여러 날 더 되었다8)
또한 이때에 일어났던 성령의 강한 역사에 대하여 블래어 선교사와 헌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때에 교회를 평안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성령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오순절 날 하늘로부터 부어진 주님의 성령만이 한국 교회를 큰 시련에서 구할 수가 있었다 … (1907년 1월). 월요일 정오, 우리 선교사들은 함께 모여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우리들은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고는 떠나시지 못하게 했다. 그날 밤은 아주 달랐다.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충만함을 느꼈다. 선교사들뿐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다고 말했다. 나는 원산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 사람들 가운데 내려오셨을 때 그곳에 가까이 계심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 그 기도는 많은 물이 쏟아지는 것같이 들렸는데 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리는 기도의 바다였다. 그것은 한 성령 안에서 태어나서 한 아버지께로 향하는 하나의 기도였다. 마치 오순절 날처럼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나고 그곳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 위에 가득했다9)
초기 한국 교회사에서 이러한 오순절적인 성령의 역사가 이단시되지 않고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 때문이었다.
1909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39명의 선교사들 중에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들이 16명이었고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11명이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핫지(C. Hodge), 워필드(B. B. Warfield)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는 사도시대 이후로 중지되었으며 역사적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적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맥코믹 신학교 선교사들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연속적으로 역사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기에 이들은 한국의 오순절적인 성령의 역사를 수용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지지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우연일지는 몰라도 맥코믹 신학교는 본래 무디(D. L. Moody)의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시카고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시카고의 부흥운동에 익숙해 있었던 경험으로 자연히 한국의 부흥운동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10)
2. 한국 교회사에서 성령 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인물들
이러한 초기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성령 운동은 신유의 이적으로 성령 운동을 주도했던 김익두 목사, 1930년대의 회개 운동, 기도 운동으로 폭발적인 성령 운동을 일으켰던 이용도 목사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면면히 흘러오던 오순절 신앙과 신학은 마침내 조용기 목사로 말미암아 폭발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오순절 신앙과 신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김익두 목사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坪村)리에서 부친 김응선, 모친 전익선(全益善)의 독자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13세에 부친을 여의고 상업에 종사한다.11) 20세 이후 청년시절 술과 기생에 잠시 빠져 방황하다가 27세에 소안련(Swallen) 선교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몰래 참석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다.
그러나 입교한지 3개월 되던 날 옛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기생을 회롱하는 죄를 범하고 크게 뉘우치며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성령 침례를 받는다. “땅 바닥에 쓰러져 눕고 있은지 얼마만에 비몽사몽간에 큰 불덩이가 떨어져 가슴에 꽉 안기우는지라 대노대호왈, ‘아이구 벼락이야’ 소리쳤다. 안방에서 이 소리에 놀랜 모부인이 달려와서 ‘이게 무슨 일이냐’하고 부루깨워 주심을 받아 일어나니 벼락이 불 세례였다.”12) 그후 김익두 목사는 1901년 1월 마지막 주일에 소안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1906년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평양신학교 제3회로 졸업하고 목사로 장립한다.13) 그는 한국 교회사에서 치유와 이적을 통해 일제의 압제 속에 눌려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는 능력집회를 주도했다. 그는 자신이 기도를 통해 신유의 이적을 체험했다. 그의 부인이 목에 종양이 생겨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두 부부는 평소에 가던 산에 가서 5일간 금식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은 김익두 목사에게 비몽사몽간에 소원대로 되리라는 음성을 여러 차례 들려 주셨다. 그 뒤 그는 부인의 병이 완쾌된 것을 확인했다.14)그의 신유의 이적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 교회에서 턱이 늘어져서 말도 못하고 음식을 씹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자 늘어진 턱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이 이적을 시작으로 경산교회에서는 한꺼번에 중풍병자와 혈루병에 걸린 사람들이 나음을 입었고, 대구 집회에서도 앉은뱅이가 걷고, 김해군 진영리에서는 23년된 혈루증 걸린 여인이 나음을 얻게 된다. 또한 평양에서는 11년간 벙어리 된 여인이 김익두 목사의 기도로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적이 나타나자 황해노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1923년 총회에 우선 장로교 정치 헌장 제3장 제1조의 문구수정안을 헌의하였다. 그 조항에는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란 글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추진시킨 임택권, 장흥범, 유만섭, 김용승, 오득인 등은 이적증명회(異蹟證明會)를 만들어서 3년간 김익두 목사의 이적 사실들을 다 수집 망라하여 「조선 예수교회 이적 명증」이라는 책자로 발간하게 된다. 총회는 1923년 이를 채용하여 각 노회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 헌의는 1924년 총회에서 부결되었다.15) 비록 지금도 장로교 헌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유와 이적은 정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이 한정해둔 테두리(Boundary)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시다. 그를 환영하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마음껏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이적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2) 이용도 목사

이용도 목사는 1901년 4월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에서 빈농 이덕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신앙이 없었으나 모친은 시변리 전도부인으로 활동할 만큼 신앙이 두터웠다. 이러한 그의 모친의 영향으로 어린 이용도는 신앙을 갖게 된다. 1919년부터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 4차례나 체포되고 3년 동안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이용도 목사는 1924년 봄에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25년 겨울 폐결핵 3기의 선고를 받아 고향인 평남 강동에 가서 요양하다가 뜻하지 않은 부흥회를 인도하게 된다. 첫날 부흥회의 찬송은 이용도 목사가 인도하고 설교는 이환신이 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의 체험은 청년 이용도를 예수께 몰입되게 한다. 그날에 사회를 보던 이용도 목사가 찬송를 하면서 울자 온 회중도 함께 운다. 마침내 온 교회당 안이 울음바다로 변했다. “이 찬송을 몇 번 거듭해서 부르는 동안에 회중은 그냥 통곡을 계속하며 통회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 이환신의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이 계속 울고 있었다.”16)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 후로 이용도 목사는 곧 건강을 회복하여 신학교에 복학하고 이어 졸업을 하게 된다. 그 후로 그의 삶은 온전히 예수께 미쳐버린 삶, 성령께 완전히 굴복하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하여간 미치자! 크게 미치자! 그 후에 쓰게 되면 쓰고 부르짖게 되면 부르짖고 침묵하게 되면 돌같이 고요할 것이요, 어쨌든 진리에 미치는 것만이 급무였으니”17)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의 신앙은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미쳐서 합일되는 것이었다. 이용도 목사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회개 운동, 기도 운동, 방언과 같은 은사들이 집회에 나타난다. 특히 그의 기도생활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갱신과 부흥을 가져오게 했다.
그는 장로교나 감리교나 다른 교파를 초월해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신학교 부흥회 때에는 신학생들이 너무 기도에 몰입하자 신학교 교수들이 기도를 말릴 정도로 그가 가는 곳마다 기도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그가 한국교회에 기여한 것은 1928년에 처음으로 기도원을 세운 일이었다”18). 그후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을 찾아 기도와 금식으로 뜨거운 영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의 집회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방언 현상이었고 그는 방언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사로 이해한다. “오순절의 성령의 힘은 첫째로 사람의 혀를 붙잡아 조종하시어 다른 방언을 말하게 하시었는데 그 말이 보통 말이 아닌 점에서 그것은 방언이나 그것이 성령께서 하게 하셨다는 점에서 성언(聖言)이다”19)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는 자주 방언을 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931년 겨울 평양 명촌 교회에서 밤 예배가 끝나고 나서 교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를 기도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렸고, 그후 산정현 교회에서도 역시 울음 섞인 열정적인 기도를 높은 소리로 외치는 기도 속에 의미 모를 외침이 상당히 들려왔다”.20) 일생을 이용도 목사의 변증에 생을 바쳤던 변종호는 이용도 목사에 대하여 평하기를 ‘그는 오순절교단 운동의 선구자요 개척자로서 그 오순절교단 운동이 받을 바 비방을 도맡아 받았고 그 교단운동이 당할 바 고난과 풍파를 혼자서 뒤집어쓰고 애쓰며 싸우다가 올라간 선진이었다’라고 했다.21) 이용도 목사는 열렬한 기도, 회개, 성령으로 말미암은 방언 등과 같은 오순절 운동의 색채가 잘 나타난다. 여기에 대하여 빈 사이난(Vinson Synan)은 이용도 목사를 오순절주의자로 분류한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므로 그를 “한국의 오순절주의의 아버지”라고 일컫기도 한다.22)
3) 조용기 목사

조용기 목사는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 운동의 대표적인 목회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세계 최대의 오순절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지금도 왕성하게 사역하는 현역 목회자다. 그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고등학생 시절 늑막염과 심장병으로 사경을 헤매다 예수를 믿게 되었고, 부산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로 사역하던 루퍼 리차트 선교사를 만났다. 그를 통해 신앙 생활을 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성령충만함을 받게 되어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다.23)그는 1957년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서울 불광동 빈민 지역에서 천막교회를 개척한다. 개척한 지 3년 만에 출석 성도가 3백여 명으로 성장하고, 1961년 10월에는 서대문에 순복음중앙교회를 건축한다. 그후 1964년에는 성도 수가 2천 명에 이를 정도로 가히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순복음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1994년에 등록교인수가 70만 명을 기록하게 된다.
조용기 목사는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실천한다. 그의 신앙과 신학의 중심축에는 중생의 복음,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 등 이른 바 ‘오중 복음’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그는 “신유와 방언, 적극적 사고와 현세적 축복”24)을 강조한다. 그는 또한 기존 정통신학의 성령론을 고스란히 인정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기존 한국 내에서 개혁주의로 자처하는 그룹들은 성령의 위격과 존재는 인정하나 성령의 현재적 사역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의 현재적 사역으로 말미암은 은사들은 초대 교회와 사도시대 이후로 정지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임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입장은 1900년 초에 일어났던 오순절 운동이나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은사주의 운동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는 보수주의에서 중생과 성령침례를 동일하게 보는 것과는 달리 중생과 성령침례를 구분한다. “중생과 성령세례는 분명히 다른 별개의 체험입니다. 물론 두 개의 체험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어떤 기간을 두고 일어날 수도 있으나 분명히 다른 체험인 것입니다.”25) 그는 “중생은 성령과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고 새 생명을 받아들이는 체험이고,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놀라운 봉사적 권능을 얻기 위하여 성도들이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한다.26)그는 오순절 운동의 특징인 방언을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로 이해한다.

사도행전적 성령충만의 외적 표적의 공통 분모였던 방언이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충만의 체험을 가진 것을 보여 주는 외적 공통된 표적이 된다고 말해서 거스림이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물론 방언자체가 성령충만은 아니다. 그러나 방언은 성서적으로 확증된 성령충만한 체험의 강력한 외적 표적인 것이다27)일명 ‘번영신학’으로도 불리우는 오순절 운동이 현세적인 축복과 신유를 강조하는 것이 밝은 면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 속의 십자가를 무시하도록 만들 수 있는 어두운 면이 항상 공존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오순절 ‘신학’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오순절 신학이 안고 있는 ‘신학의 부재’, ‘신학의 결여’라는 신학적 배경의 빈약함에 있다.
조용기 목사는 최근들어 그가 주장했던 중요한 신학적 논점들을 수정했다. 성령충만의 외적증거가 반드시 방언이 아니라는 것,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병이 다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4차원의 환상을 품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입장, 심지어는 그의 신학적 뿌리인 알미니안주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28) 그의 신앙과 신학은 더욱 변화되고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아직 미완이다. 여러 가지 그의 신앙과 신학의 논점들이 명확하지 않고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세계 오순절 교회와 한국의 오순절 운동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3. 비 오순절 계통으로서 성령 운동을 지지하는 신학자들
오순절 신앙과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과 비견될 정도로 세계 교회와 신학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1900년 초에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 운동, 1960년대에 가톨릭에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며 부상했던 은사주의 운동, 1980년대에 ‘교회 성장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를 중심으로 미국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난 ‘제3의 바람’과 캐나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신유와 축사를 동반한 능력사역인 ‘빈야드 운동’ 등 이러한 신앙과 신학운동들은 전 세계 신학계를 뒤흔들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을 신학적 배경으로 하는 이러한 능력사역이 응당 한국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비록 비 오순절 계통의 입장을 취하나 오순절 신앙과 신학을 지지하는 한국 내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살펴볼 것이다.

1) 안영복 교수

안영복 교수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보수주의 교회들이 침체를 면치 못하는 이유가 성령의 역사를 약화시키고 소멸시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나 미국 프린스턴의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의 신학의 경계선(Boundary)보다는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침묵하고 성경이 말하는 곳에 말한다”라는 개혁주의 신학 원리에 충실할 것을 역설한다.
그는 첫 번째로 오순절 운동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생과 성령침례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만일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한다면 오순절에 와서야 성령의 세례를 받은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예수의 제자들이 중생하였음을 명시한다(요 15:3; 17:9, 마 16:16)29)
중생과 성령침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중생이 비체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데 반해 성령침례는 분명히 체험적으로 임한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 또한 중생의 목적은 신자에게 새 새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인 데 반해 성령침례의 목적은 능력을 힘입어 담대하고 능력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주장한다.30) 두 번째로 오순절 사건의 단회성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성령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종전의 견해는 요엘이 만민에게 부어 주겠다는 예언의 약속이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으로 성취 완료되었으므로 그 단회적 사건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엘을 통해서 예언된 성령 부어주심에 대한 약속이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함으로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후에’라고 한 때를 ‘말세에’(마지막 날들, 행 2:17)라고 밝히고 있다. 이 ‘말세에’는 오순절 사건부터 예수의 재림기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시대도 ‘말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31)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이지 않고 반복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종전의 견해는 “성령의 은사들을 특수은사와 일반은사로 나눈 다음 특수은사(방언, 기적, 병고침, 예언 등)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지금은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은사들을 두 종류로 분류함은 부당하며 모든 은사들은 지금도 성령의 주권에 따라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32)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주장은 그가 가르치던 부산 고려신학교와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차영배 교수

차영배 교수는 그의 일생을 성령론을 연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령론을 깊고 넓게 연구한 보기 드문 성령 신학자다. 그는 전술한 바, 안영복 교수와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
종전의 견해는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은 이미 이 땅에 오셨기에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성령은 지금도 계속 나오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영원히 나오시는가? 그렇습니다. 성령은 영원히 계속 나오십니다! ‘나오신다’라는 원어가 현재 미완료 곧 ‘현재진행형’ 시제이므로, 신조는 ‘영원히 나오신다’고 한 것이다. ‘나오신다’라는 우리말도 현재미완료(現在未完了)로서 진행의 의미가 있다”33). 그러므로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은 단회적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에게서만이 아니라 아들에게서도 계속 나오신다는 ‘휠리오쿠베’(Filioque) 교리를 지지한다.34) 또한 그는 중생과 성령침례를 구분한다.

개혁 신학계에서 이미 인정된 사실이지만 “중생시기의 불활실성”에 비추어 볼 때, 구원의 서정상 성령침례의 시기도 확정지을 수 없다. 혹자는 믿는 즉시로 혹자는 믿은 후 1년 후에 혹은 10년 후에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도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침례는 적어도 중생 후에 주 예수를 확실히 믿고, 목마르며 갈급하게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35)
또한 그는 오순절 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그것은 “오순절 운동이 객관적인 원리에 의존하는 내적 신앙보다는 그 신앙의 결과로 얻어지는 은사에 치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객관적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이 결핍된 것”36)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뒤에 오순절 교회에 속하지 않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오순절 운동에서 주장하는 성령침례나 신유에 대한 말씀을 무시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Ⅲ. 나아가는 글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신학 운동과 성령 운동은 서로 다른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다. 장로교의 교리신학을 중심으로 한 신학운동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신앙과 신학을 회복하고자 하는 교리 중심의 신학이다. 그 중심된 교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 즉 ‘이신칭의’(以信稱義)다. 가톨릭이 평신도들로부터 탈취했던 성경을 되돌려주고 또 구원이 행위로 주어지거나 면죄부로 사면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구원의 복음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에 기여한 것은 성경을 만인에게 열려지게 한 것과 성경의 신적 권위를 회복한 것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회복한 점이다.
그러나 이 신학이 한국 교회에 해를 끼친 것은 지나친 성령의 사역에 대한 무관심과 불균형적 취급이다. 그 이유는 한국의 신학 운동이 자생적으로 생겨나지 못하고 서구 신학에서 이식되었기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칼빈, 핫지, 워필드, 카이퍼 등은 성령의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에 정지되었다는 ‘은사중지론’(cessation theory)을 주장한 신학자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학을 이식한 한국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그대로 주장한 것이었다. 이종성의 말대로 이러한 신학은 결국 한국 신학의 고사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개혁 신학은 개혁되었기에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그들의 신학원리를 망각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다행히 최근에 이르러 안영복 교수와 차영배 교수는 오순절 운동과 신학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지지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 침묵하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곳에 말한다”라는 성경해석 원리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 개혁주의 신학은 오순절 운동과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대하여 더욱 열려야 한다.
김익두 목사는 장로교 헌법 3장 1조에 “금일에는 이적을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는 문구를 사문화(死文化)시킬 정도로 그의 신유의 은사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가 죽자마자 이러한 은사 운동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카리스마를 통한 은사 운동이 갖고 있는 단점은 제자를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후에 이러한 신앙운동들은 스스로 소멸해 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은 개인의 카리스마가 대단히 강력하게 부각될 뿐 그 운동이 지속되지 못하고 한 개인의 운동으로서 끝날 때가 많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당연히 병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막 16:14). 이것을 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능력의 보편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에도 이러한 능력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제자를 삼는 이들이 있다. 미국의 경우 모리스 세룰로, 존 윔버, 프란시스 맥너트, 찰스와 프란시스 헌터, 빌 해몬 등이다.
또한 이용도 목사는 조금은 기독신비를 넘어서 신비주의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조용기 목사는 신학은 칼빈주의를 표방하고 현상적으로는 오순절 운동을 표방한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은 객관적인 계시에 의존하기보다는 주관적인 개인의 체험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조용기 목사는 여러 차례 그의 신앙노선을 변경한 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은 성경신학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령과 성경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계시만 중요시하여 그에 따르는 현상을 부인하는 그룹과 개인의 신앙체험을 중심으로 객관적인 계시를 등한시하는 것이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전반적인 흐름이다. 여기에 말씀과 성령을 조화시키고자하는 신앙 운동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성경을 닮고 성령의 조명을 받는 신학”37)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인 것이다.
- 계속 -


주)

1) J. Roswell Flower, “Birth of the Pentecostal Movement,” Pentecostal Evangel, November 26, 1950, p. 3. Vinson Synan, 『20세기 성령 운동의 현주소』 국제신학연구원 역 (서울 : 도서출판 예인, 1995), p. 78에서 재인용.
2) 이재범, 『성령 운동의 역사』(서울: 보이스사, 1985), p. 113.
3) Ibid., p. 32.
4) 19세기 성령 운동의 역사와 신학적 뿌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미국 드류대학교(Drew Univerisity)의 조직신학자인 도날드 D. 데이튼 박사는 베뢰아대학원대학에서 ‘21세기 선교와 오순절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세미나(1999.1.9)에서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의 신학적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정립된 복음주의와 연합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brand-new) 신학적 패러다임을 시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5) Vinson Synan, 『20세기 성령 운동의 현주소』 국제신학연구원 역(서울: 도서출판 예인, 1995), p. 240.
6) The Annual Report,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for 1905, pp. 39-44.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4판;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 168에서 재인용.
7) 이한수, 『한국 교회와 성령 운동의 변천(Ⅰ)』, 『神學指南』 1992년, pp. 142-143.
8) “The Sprit among Pyeng Yang Student”, The Korea Mission Field(May 1907), pp. 65-67.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4판;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 170에서 재인용.
9) The Korean Pentecost (The Banner of Truth, 1910, 1977), pp. 61, 71. 김명혁, “한국 교회와 성령론”, 『神學正論』 제12권, (1994년·가을호), p. 174에서 재인용.
10) 심창변, “한국장로교내의 오순절 운동의 평가”, 『神學指南』 제245호, (1995년 겨울호), pp. 183-184.
11) 민경배, 『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서울: 기독교문사, 1991), “김익두” 항목.
12) 이덕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서울: 도서출판전망사, 1990), p. 354.
13) 김명혁, “한국교회와 성령론”, 『神學正論』, 제12권, 1994년, p. 179.
14) 신창변, “한국장로교내의 오순절운동의 평가”, 『神學指南』,제245호, (1995년·겨울호), pp. 181-18215) 『朝鮮예수敎長老會 第12回 會議錄』(1923). p. 35. 김인수,『한국기독교회사』(4판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 232에서 재인용.
16) 변종호, 『이용도 목사 연구 40년』(서울: 장안문화사, 1993), p. 19.
17) 변종호, 『이용도 목사 연구 반세기』(서울: 장안문화사, 1993), p. 43.
18) 빈슨 사이난, 『20세기 성령 운동의 현주소』 국제신학연구원 역 (서울: 도서출판 예인, p. 242.
19) 변종호, 『이용도 목사 연구 반세기』, op. cit., p. 5420) 변종호, 『이용도 목사 연구 40년』, op. cit., p. 5421) 변종호, 『한국의 오순절 신앙 운동사』(서울: 신생관, 1972), p. 85.
22) 빈슨 사이난, op. cit., p. 242.
23) 김진환, 『한국 교회부흥운동사』(서울: 크리스챤비젼사, 1976), p. 241.
24) 김명혁, “한국 교회와 성령론”, 『神學正論』, 제12권, 1994년, p. 203.
25) 조용기, 『순복음의 진리 上』(4판; 서울: 서울서적출판사, 1988), p. 219.
26) Ibid., p. 221.
27) 조용기, 『성령론』(8판; 서울: 서울서적출판부, 1982), p. 167.
28) 김명혁, “한국 교회와 성령론”, p. 208.
29) 안영복, 『성령론의 바른 이해』(3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 50.
30) 안영복, 『성령론, 무엇이 문제인가』(서울: 성광문화사, 1993), pp. 31-31.
31) Ibid., p. 43.
32) Ibid., p. 117.
33) 차영배, 『성령론』(서울: 엠마오 서적, 1997), p. 39.
34) Ibid., p. 33.
35) 차영배, 『성령론』(4판; 서울: 경향문화사, 1992), p. 185.
36) Ibid., p.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