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박진희
홈페이지: http://www.koreatheology.or.kr/
2007/11/14(수)
침례에 대한 성경적 고찰
박진희
박진희 / 1961년생·경희대 생물학과 졸·서울침례신학연구원(M. Div.) 졸·베뢰아아카데미 5기 수료
Ⅰ. 서 론
“침례인가 아니면 세례인가?”, “과연 침례는 구원의 필수인가 그렇지 아니한가?” 또한 “어떻게 받는 것이 가장 합당한가?” 등의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답을 하고 있는가?
사실 기독교 역사 이래 “밥티조”()는 끊임없이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분명한 것은 어떤 학자의 이론이나 교파의 교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바른 해답을 제시해 줄 것이다.1)
이제 우리는 교파적, 신학적 논쟁들은 모두 접어두고 좀 다른 관점에서 침례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 글을 전개해 나가면서 또 같이 읽는 분들에게도 끝까지 고집하고 싶은 한 가지는 “숲 속에 있는 나무 하나 하나에 매여 무엇이 중요한가를 놓치고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예수께서 하신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제정된 의식은 성찬과 침례 두 가지뿐이다. 이 침례는 복음 증거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의식으로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시행되어야 할 의식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자마다 순종하여 받아야 할 거룩한 의식이다.2)
필자는 미력하나마 본 글을 통하여 지금까지 요한의 침례에 대한 견해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침례의 의의 및 주님이 제정하신 침례의 의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하나님의 의도(意圖)에서 요한의 침례의 중요성 및 예수께서 받으신 침례의 참 뜻과 주님이 명하신 침례의 중요성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간단히 침례와 세례의 차이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Ⅱ. 침례와 세례, 어느 것이 합당한가?
침례와 세례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영어에서 “뱁티즘”(baptism)이라고 불리는 이 용어는 “침례”가 정확한 번역이나, 일반적으로 세례나 침례에 모두 사용되고있다. 실제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 ‘물 뿌림’ 받아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나는 침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에는 “세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는 교리가 있다. 이 교리를 “세례에 의한 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이라고 한다. 또 유아세례도 영어로는 “인펀트 뱁티즘”(infant baptism)이라고 한다. 유아에게 침례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그 말은 침례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말에서 침례나 세례라는 용어는 “단순히 물에 잠기느냐 물을 뿌리느냐 ” 하는, 방법에 따라 분류된 용어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더 깊은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먼저 “세례”라는 말을 자세히 보자. 한자로 이 말은 “洗禮”라 하며, 이 “洗” 자는 “씻을 세”이다. 세례는 물로 “씻는 예식”이라는 말이다. 죄를 씻는다는 것이다. 세례가 참으로 죄를 씻을 수 있는가?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따르면 물은 “표(表)” 곧 “믿음의 고백”일 뿐이지 절대로 누군가의 죄를 씻어주지 못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바, 누군가의 죄를 씻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이다.
“침례(浸禮)”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서 “浸” 자는 “담글 침” 자로서, “침례”를 정의하면 단순히 “물에 잠기는 의식”이다. 앞에서 제시한 베드로전서 3장 21절의 말씀에서도 보듯이, 이 침례에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단순히 잠기는 것이다. 도한호는 “침례의 성서적 의미”란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례(침례)식을 지적하는 어휘로 사용된 “밥티조”()의 원래적 의미는 침수에 의한 의식임을 입증해 준다. 헬라어에는 “씻는다”는 의미의 ‘루오’, ‘깁토’ 등의 동사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을 지적할 때는 “배가 침몰하다” 혹은 “염색하다”는 의미를 가진 밥티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 의식이 침수에 의한 것임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
예수께서 받으신 침례도, 믿는 자들에게 명령하신 것도 분명히 물 속으로 완전히 잠기는 침례다.
Ⅲ. 침례에 대한 고찰
1. 요한의 침례
성경에 기록된 침례 요한은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침례를 외치는 특수한 선지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침례는 그의 시대에 그리 새로운 형식은 아니었다. 침례 요한이 침례를 베풀던 당시 이미 유대인 사회에는 이방인 입교자들의 침례와 쿰란 공동체와 같은 유대 종파들의 결례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의 침례는 그러한 침례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유발시킨다.
램버트(Lambert)의 견해에 의하면 유대교 입교자에게 침례를 주는 목적은 의식적인 어려움을 제거함으로 집단의 반열 안에 있는 그의 정상적인 위치로 사람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반면에 요한의 침례는 이것에 복종하는 자들을 전혀 새로운 영역 즉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명확한 준비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4) 또한 벌콰우어(Berkouwer)는 회개와 침례를 부르짖은 요한의 침례를 강조하면서 요한의 침례는 이방인을 신자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기보다는 이스라엘 자신에 대한 침례였음을 지적하고, 바로 이것이 요한의 침례가 이방인 입교자 침례와 다른 이유라고 한다.5)
즉 요한의 침례는 즉흥적이거나 일시적인 이방 침례를 단순히 본딴 것이거나 유대인의 결례적 의식을 그대로 도용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그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적극적인 자세로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받은 확신을 심어주며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생생한 경험으로서의 침례를 베풀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베푼 침례는 과연 어떤 의미였는가?
1) 요한의 침례는 회개를 선포하는 의미의 침례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김기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요한을 특별히 침례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침례를 주는 직분을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에게 침례를 주기 위해, 다시 말하면 예수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예수께서 세상에 들어오시는 길을 여는 직분으로 왔기 때문에 침례 요한이라고 불리는 것”이라 한다.6)
요한의 침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왕이 오시는 시점이었고, 이에 앞서 예언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바로 예언된 엘리야가(말 4:5) 왕의 길을 예비해야 하는 침례 요한의 사역이었다(사 40:3, 마 3:3). 그 사역의 핵심은 왕이 임하시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가 침례를 행하기 전에 전파했던 것은 “회개”였다. 그리고 그 회개의 증거로 사람들은 침례를 받은 것이었다. 그 표로 침례를 줌으로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임하시기 전에 왕의 길을 닦아 놓는 사역이었다. 이 일은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왕으로 맞아들이는 준비이자 왕국이 임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었던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리기 위함
요한복음 1장 31절에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고 한다. 요한의 침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침례 받음으로 세상에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시고자 요한 앞에 오셨다. 요한은 침례로 예수를 세상에 알리는 임무를 띠고 왔기 때문에 요단 강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는 요단 강으로 침례를 받으러 가신 것이다.
드디어 요한은 침례를 통해서 예수를 발견하고 그를 이 세상에 알려 주는 일을 완성했다.7) 이 침례는 그리스도교의 원천이 되는 강력한 메시아적 각성 운동이다. 또한 하나님의 임박한 강림을 준비시키고 있다. 요한의 침례는 메시아 공동체를 모으기 위한 시발적 예식이다.8)
2. 예수께서 받으신 침례
예수는 “인자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39)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내신다. 그의 공생애의 시작은 왜 침례를 받으심으로 시작하셨을까?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1) 모든 의(義)를 이루기 위해 받으신 침례
성경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고 한다. 이 본문에 대하여 스탠리 E.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 받으신 것은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침례를 받으셨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침례가 어떻게 모든 의를 이루었단 말인가? 물 속에 잠기는 침례가 수침자를 깨끗이 하거나 어떤 죄를 씻어 없애는 것은 아니며, 그 이유로 예수께서는 씻어 없애야 할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침례는 어떤 사람도 깨끗하게 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벧전 3:21), 누구의 죄도 씻어 없애지 못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깨끗게 할 수 있으며(엡 1:7, 벧전 1:18, 19, 요일 1:7) 신약 성서에 누구도 침례가 구원을 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것은 그가 인간에 대한 구속 사업을 성취하시려고 십자가까지의 모든 과정을 다 겪으시겠다고 결심하시는 약속의 표시였으며,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눅 12:50)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모두 행하시고자 순종과 성별을 나타내신 것이다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하나님의 의(義), 법을 따르고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신다. 권위로 말한다면 침례 요한이 예수께 침례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요한의 임무인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스라엘에 나타내시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을 밟으셔야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활할 것을 명령으로 받으셨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심으로 침례를 받으시고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시게 된 것이다.
2)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받으신 침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으셔야 한다. 그러나 죄가 없으니 죽으실 수가 없지 않은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음으로 이때 인류의 죄, 세상의 죄를 담당하시게 된 것을 선포한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가 회개의 침례를 받으신 것은 아담의 죄와 연합함을 의미한다.10)
그러므로 그가 침례 요한에게 침례 받는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이때부터 고난을 짊어진 “고난의 종”으로서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광야로 보내졌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으로 죄를 담당하신 것을 나타내신다(고전 15:55, 56).11)
예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으신다(마 20:28). 예수의 죽음은 어쩔 수 없어서 마귀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사도신경(Apostolic Creed)에 언급된 것처럼 빌라도의 판결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면, 예수는 그들보다 낮은 권세를 가진 한낱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죽으시려고 성육신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죽고 부활하실 권세’를 받고 오신 분이시다(요 10:18).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빌라도와 유대인들 그리고 마귀에 의해서 예수의 죽음이 자행된 것으로 보이나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분은 자신의 죽을 권세로 죽으신 것이다.
3) 성령으로 침례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받으신 침례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 해도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자기 죄로 죽은 자나 다름없다. 그러나 물 속으로 들어가심으로 죄로 인한 죽음을 경험하고 물 밖으로 나옴으로 그가 부활하실 것을 선포하신다. 요한복음 1장 33절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언제 성령 침례를 주셨는가? 그가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영광을 받으신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면서 성령으로 침례 베푸실 자를 소개했다. 지금까지의 “물 침례”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구속과 사죄의 예표였다면 “성령 침례”는 언약의 성취로서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받으신 “물 침례”는 다른 차원에서의 의미가 있었다. 메시아로서의 공적 구속 사역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성령과 불로 침례 주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약속하신 성령(욜 2:28)이 바로 그에 의해 부어질 것이며 성취될 것이다.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 사역의 완성이다. 성령 침례는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 선물은 오순절날에 성취되었다. 오순절에 성령 침례를 베푸는 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요한의 예언은 바로 이 오순절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과 언약에 속한 이들에게 임재하여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12)
오순절날 사도들과 함께 120명의 신자들은 약속하신 성령(행 1:4)을 받았다. 성령 침례는 성령 속에 잠기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 침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했고 또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아 높아지신 후에 이루어지는 은사다(요 7:39). 하나님께서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며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 부어 주셨다.13)
3. 믿는 자의 침례
침례는 “중생”이나 “죄 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침례는 이미 발생한 일의 진상을 말하는 것이다. 즉 침례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내적 변화”에 대한 “외적 표시”다. 그의 내적 변화가 어떤 것이기에 외적으로 드러나는가?14)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침례를 받을 유일한 대상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침례를 받기 위해 나온 사람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 즉 구원 받은 것을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믿는 자의 침례”다.
1) 예수와 연합하는 의식(롬 6:1∼8)
침례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나타내는 표시다. ‘예수가 죽으면 나도 죽고 예수가 살면 나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를 받지 않는 것은 예수와의 연합을 거절하는 것이다.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갈 때는 죽음을 표시하는 것이요, 물 위로 올라올 때는 부활을 의미한다. 원래 침례는 “물 아래”라는 것이다. 침례는 예수와 연합하는 의식이다. “연합”에 대한 김기동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한다. 주란 그리스도란 말로 왕이라는 말이다. 왕이 항복하면 백성도 다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왕이 항복하지 않고 도리어 승전하게 되면 그 나라는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머리되시는 왕이요 주가 되시는 그가 이겼으면 우리도 이긴 것이고, 그가 죽었으면 우리도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은 몸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연합이란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된 것으로, 머리가 죽었으면 몸도 함께 죽은 것이고 머리가 살았으면 몸도 함께 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사람이 장사된 것으로 믿고, 또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사람이 산 것을 믿는 것이다15)
그래서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롬 6:3, 고전 12:13, 갈 3:27, 골 2:12, 벧전 3:21)으로 침례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나의 옛사람이 장사되었고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2) 예수의 명령에 순종함(마 28:19)
주님의 명령으로서 침례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그가 직접 명하신 것이다. 침례와 성찬은 주님의 명령이다. 주님의 명령이므로 초월할 수 없으며 순종만이 요구된다(마 28:19). 하지만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마 28:19, 막 16:16)하는 것이지 구원에 이르는 요건은 아니다(벧전 3:21, 롬 1:17).16)
그렇다면 언제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침례 받는 시기는 믿는 즉시(행 2:28, 행 10:48) 받을 수 있다. 구원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침례의 의미를 안다면(벧전 3:21) 구원 받은 후 즉시 받을 수 있으며, 일정 기간의 학습이나 문답, 혹은 교회 생활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행 8:35∼38).
침례는 그리스도인이 공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한 형태로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과 마음으로 살겠다는 믿음의 표시며, 순종의 표시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침례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침례는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에베소서 2장 8, 9절에서 침례를 포함한 어떠한 행위 없이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 받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오히려 구원이 침례를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마태복음 28장 19, 20절에서 침례는 지상명령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구원 받은 후 예수의 제자로 헌신하며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 우선 되어야 할 고백으로서의 침례는 영적 성장의 출발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배우는 것에 앞서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 만약 첫 번째 해야 할 것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다음에 순종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순종할 수 없거나, 하지 않게 된다(마 3:13∼15).
3) 옛사람을 장사 지내고 주님을 따라 산다는 고백
거듭나지 못한 옛사람을 장사하고 거듭난 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케 하는 침례며,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생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침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 받은 것(엡 2:8, 9)과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신다는 것을 확신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그의 변화된 삶을 시작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의 삶을 위한 첫걸음을 어떻게 내딛어야 하는가? 그 첫걸음은 자신의 믿음을 간증하고 침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 지내듯 침례를 통해 자기의 옛사람을 장사 지낸다는 의미다(롬 6:1∼3).
Ⅲ. 하나님의 의도로 본 침례
1. 하나님의 이름(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주신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위하여 침례 받으시고, 그 이름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하늘로 가시면서 그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다(요 17:11).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했던 사단을 멸하시고 이로써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얻으신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구원이 확정되었으며 큰 축복이 되었다.
주기도문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 다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작정된 대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내용으로 그 차례를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17) 예수는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라고 명령하신다. 곧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것이다.18) 예수와 연합하여 예수 이름으로 침례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와 연합한 자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사는 삶으로 의미 있게 하셨다.
2.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많은 선지자가 기다리면서 보고자 하고 듣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으로 오신 이의 모습을 침례 요한이 영접함으로써 선지자와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그때 하늘에서는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 17)고 하셨다. 그리고 성령이 그 머리 위에 임하심을 보고 요한은 “보라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친다. 수천 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줄이어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리면서 기다리던 자가 이스라엘에 나타남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임하신 이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성령과 아버지의 뜻으로 인(印)침을 받았으니, 마귀가 이끄는 세상에 심판이 시작된 것이었다. 즉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졌으니, 이로써 세상 심판은 시작되었다. 요단 강으로부터 올라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저주 받아 마땅한 마귀와 그의 부하인 귀신들의 악행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천사장이라 할지라도 감히 마귀를 직접 꾸짖지 못해서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기를 원하노라”(유 9)고만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마귀와 그 세력을 꾸짖으시고 제자들에게도 그 권세를 주셔서 마귀를 대적케 하신다(눅 10:17∼20). 마귀를 꾸짖을 권한이 오직 예수께만 있음을 나타내셨다. 침례를 받으심으로 창세 이후에 감추어져 있던 존재들을 다 드러내시고 세상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음을 선포하신다(요일 3:8). 또한 침례를 받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임을 고백한 자들에게도 동일한 권세가 있음을 인정하신다(막 16:17, 18).
3.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요단 강으로 나아올 때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그 개념이 분명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린양”은 죄 사함 받을 때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하나님이 받으시는 희생 제물”을 뜻한다. 예수는 우리가 이 땅에서 회개하고 자복하는 죄를 속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를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신 후에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가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은 부활 후 40일이 지났을 때였다. 그후 10일 만에 성령을 보내 주셨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자복하여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것은 제사장이 나와서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증거하는 것과 같다.20) 예수 그리도께서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마다 침례를 받는다. 믿는 자들이 받는 침례는 그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다─행위며, 자신이 예수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영광 받으셨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Ⅳ. 결 론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침례의 의미가 얼마나 왜곡되었고 변질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성찬도 가톨릭에 의해 ‘화체설’(化體說)로 그 의미가 왜곡되었고, 침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그 의미를 왜곡시키고 또한 그 은혜를 축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요한의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임하신 뒤 시작되었다. 침례가 바로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의 시작이며 마귀 진멸의 시작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한 행진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침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로우신 아들임을 증거하는 자며,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 마귀의 일을 멸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는 자임을,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사는 공생애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
1) ‘밥티조’()를 ‘침수례’(浸水禮) 로 볼 것인가 아닌가에 관한 논쟁은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밥티조’를 ‘침수례’로 보는 주장에 대하여 노시영은 그의 논문 “세례에 관한 석의적 고찰”(서울: 총신대신대원, 1984) pp. 35-48에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입장에서 오자흥 역시 그의 논문 “세례의 중요성과 그 적용” (대전: 목원대신대원, 1983), pp. 29-34에 기술하고 있다. 또 ‘침수례’를 주장하더라도 ‘밥티조’를 ‘세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므로 ‘밥티조’를 ‘침례’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세례’라고 부를 것인가의 문제는 어쩌면 한국 교회에 또 다른 짐을 지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예수가 받으신 ‘밥티조’는 ‘침수례’라는 데 동의하며 따라서 그가 명령하신 것 역시 ‘침수례’였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을 통하여 다시 한번 살펴 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밥티조’를 ‘침수례’로 인식하며 침례로 표기했다.
2) 김기동, 『인자의 날을 위하여』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3), p. 218.
3) 도한호, “침수례의 성서적 의미”, 『침신논집』 (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79). pp. 148-149.
4) Lambert, The Sacrament in the New Testament, p. 57.
5)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Grand Rapids: Eerdmans, 1969), p. 97.
6) 김기동, 『요한복음 강해 1』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1), p. 225.
7) Ibid., p. 235.
8) A. Opeke, “”, 『신약성서신학사전』, pp. 102-105.
9) S. E. 앤더슨, 『침례의 중요성』 이요한 역 (3판; 서울: 침례회출판사, 1990), p .44.
10) 정학봉, 『침례교인의 신앙고백』 (서울: 도서출판동서남북, 1990), pp. 179-182.
11) 신영길, “침례에 관한 연구” (학사학위 논문, 서울 침례신학교, 1992), p. 26.
12) Richard B. Gaffin, 『성령은사론』 권성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13) 차영배,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 『신학지남』 제 47권 1집 (1980), p. 100.
14) 헤롤드 L. 픽, 『침례교인의 신앙』 도한호·정익환 공역 (서울: 침례회출판사, 1985). p. 103.
15) 김기동, 김기동, 『요한복음 강해 1』, op. cit., pp. 228-229.
16) 헤롤드 L. 픽, op. cit., p. 104.
17) 김기동, 『인자가 온 것은』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3), p. 159.
18) 김기동, 『하나님을 알자』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2000), pp. 73-84.
19) 김기동, 『인자가 온 것은』, op. cit., pp.143-148.
20) 김기동, 『요한복음 강해1』, op. cit., pp. 25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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