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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도 평신도 신학의 중요성과 그 과제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5:14
하나님의 의도 평신도 신학의 중요성과 그 과제  
하나님의 의도 평신도 신학의 중요성과 그 과제  

 김 상 복


Ⅰ. 시작하는 글

베뢰아 운동은 평신도 운동이다. 본 글에서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평신도 운동이 담고 있는 평신도 사상 내지 평신도 신학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베뢰아아카데미의 내용은 ‘성경을 보는 안경’, ‘하나님의 의도’, ‘복음중재’로 구성된다. 베뢰아아카데미는 ‘성경을 보는 안경’을 맨 처음 가르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성서론을 모든 다른 것보다 먼저 논의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신앙의 출발이고 교회의 행위규범이며, 이 성경을 통하여 계시의 실체요,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베뢰아아카데미에서 모든 신학적인 논의의 출발을 성서론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신학적인 중요 문제를 성경에 기초하여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안경’을 맞추어 성경을 바로 보고서 얻은 것이 성경 속에 파노라마로 펼쳐진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기독론적(Christology)관점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통전적(統全的)으로 꿰뚫어 알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신앙과 목회 생활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실천신학적 작업이 베뢰아아카데미의 ‘복음중재론’이다. 그러므로 ‘복음중재론’에는 성경을 바로 보고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실천적 문제의식이 하나님의 의도를 거쳐 분명한 방향을 찾은 후에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는 신학적 작업인 것이다.
한국신학 12호에 평신도 신학의 개념을 살펴 본 바와 같이 평신도 신학은 성서신학적 문제의식과 실천신학적 문제의식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이유에서 베뢰아아카데미의 ‘복음중재론’을 소개한다. 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평신도 신학을 소개하고 신학적 재해석을 가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하나의 신학적 체계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틀을 가지고 있지만 기존의 신학적 술어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평신도 신학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며 기존의 신학을 답습하지 않고 성경 그 자체를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자체로도 평신도 신학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신학이란 객관화된 술어로써 대화(對話)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필요성을 느꼈고 평신도 신학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평신도 신학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Ⅱ. 베뢰아아카데미의 복음중재론

1. 복음중재의 의의

‘복음중재’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 역사의 내용인 복음을 어떤 도구나 수단을 이용하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중재’(仲裁)는 본래 양자의 다툼이나 분쟁을 해결하는 조정행위를 말한다.1) 본래의 세속적인 의미로는 ‘복음중재론’에서 말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할 수 있다. 복음중재에서 사용한 ‘중재(仲裁)’는 그 본래의 세속적인 의미보다는 ‘중보’(仲保, Intercessor)의 의미에 더욱 가깝다. ‘중보’(仲保)의 의미는 ‘둘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중보’는 한 분뿐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2) 그러므로 복음중재의 여러 수단을 ‘중보’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뢰아아카데미에서는 세속적인 용어인 ‘중재’를 택해서 구별하여 종교적인 특정한 의미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다.3)
하나님은 인간에게 직접 역사하시나 이 역사(役事)에는 일정한 수단이 사용된다. ‘복음중재의 수단’이라는 말은 성경에는 발견되지 않지만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일정한 수단을 적절하게 가리키고 있다. ‘중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파가’이며 구약에 44회 나오고 있다. 이 단어가 하나님과 연관되어 사용될 때는 세 번이다. 여기서 ‘복음중재’의 수단이라 하면 통상 신학에서 ‘은혜의 수단’(media gratiae)이라는 말보다는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복음중재의 수단’은 하나님께서 통상적으로 은혜를 전달하시고자 세우신 객관적인 통로를 의미한다.
개혁 교회에서는 엄밀히 말해 말씀과 성례만을 ‘은혜의 수단’으로 간주한다. 성례전으로써 침례와 성찬만을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세우셨으며 또한 통상적으로 은혜를 전달하기로 하신 객관적인 통로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4) 그러나 이런 수단들은 그 자체만으로 효과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를 이루어낼 수 없다. 이 수단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 또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수단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영적결과(靈的結果)를 가져온다. 이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선교 명령을 효과적으로 이루고 교회성장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김학만은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성령을 통하여 말씀의 방편과 성례의 방편과 기도의 방편으로 훌륭한 평신도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은혜의 방편을 통한 성도는 회개하고 믿으며 선교하고 봉사하여 교회를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국개신교가 선교 100년 역사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나타낸 것은 기도훈련과 성경공부며 거기에다 성령을 통한 은혜의 방편을 잘 사용하였기 때문이다5)

2. 복음중재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

기독교회는 은혜의 수단에 대하여 상당한 견해차를 보여왔다.6)

1) 고대 교회와 가톨릭 교회

고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성례를 더 강조했다. 그러다가 침례를 중생(重生)의 수단으로, 성만찬을 성화(聖化)의 성례로 여기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유물(遺物)과 조상(彫像)까지도 은혜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말씀에 비해 성례가 더 우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점진적으로 발전된 조직체가 성례보다 더 우월한 수단이라고 인정했다. 곧 교회 자체를 은혜의 기초적인 수단으로 간주한 것이다.7)

2) 개혁주의자들의 견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성을 크게 강조하여 이를 은혜의 기초적인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성례는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며 성례는 사실상 ‘유형적인 말씀’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수단에 포함된 일종의 실체(實體)로 보고 수단들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칼빈주의(Calvinism)는 은혜의 수단 그 자체로서 은혜를 줄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하나님이 이것들을 통상적인 수단으로 정하셨으며, 이들을 통하여 마음속에서 은혜의 역사를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양자를 중시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와 결코 분리할 수 없고, 항상 성례에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재침례파의 견해

이들은 성경에서 유아세례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교황과 마귀의 발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발적인 성인의 침례만이 유일한 침례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이 다 직접 마음에 역사하며 말씀이나 침례 등은 이를 상징하는 데 이바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8)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교회사는 은혜의 수단에 대한 견해차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3. 복음중재로서의 인물

기존의 교회론에서 인간은 은혜의 수단으로써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다. 인간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조직 신학의 ‘인론’(人論)에서 다루어야 할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론과 관계하여 인론을 다룬다는 것은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 신학에 있어서는 ‘복음중재자’로서 인간에 대하여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한다. 인간은 은혜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자이지만 또한 받은 바 은혜를 중재해야 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중재해야 하는 도구로 또한 교회의 구성 요소로 인간을 다루어야 한다. 신학이 교역자만의 신학이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의 신학이라고 하는 평신도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점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기존 신학에서는 교회를 ‘은혜의 수단’으로 주로 다루었고, 은혜의 수단으로써의 ‘말씀’과 함께 ‘성례전’을 중심으로 하는 의식 집행과 교직에 대한 것을 주로 실었다. 그러나 베뢰아아카데미에서는 ‘복음중재’로서 인간에 대하여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베뢰아아카데미의 ‘성경을 보는 안경’에서는 성경의 상황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 ‘세 영적 존재’를 다룬다. 성경에 나타나는 세 영적 존재로는 하나님, 천사, 사람이 있다. 이 세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천사와 인간은 영적 세계에서 상호 관계하면서 영적 세계의 일들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9)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의 인간에 대한 신학적 관심은 교회론 이전의 것이다. 교회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있었듯이 교회가 있기 전에 인간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교회가 있기 전부터 있었다. 물론 그 인간에 대한 완전한 계획은 인간이 교회 안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이 교회 안에 있을 때 복음중재로서의 역할이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도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평신도 신학을 위해 논의되어야 한다. 신약교회가 성립되기 이전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또한 교회시대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 신학을 논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 초대 교회

초대 교회는 조직면에 있어서 발전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지도자들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새로운 직분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직분에 대하여 우리는 두 성구를 참고할 수 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직분은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로 세우신 것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특별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자들이었다(롬 12:6, 7, 고전 12:8∼11).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직분은 교회가 조직적인 면에서 발전함에 따라 장로와 집사라는 두 가지 직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고대 교회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사라지자 고대 교회에서는 ‘성직자 계급의 권위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초기에는 주교 혹은 감독, 장로, 집사가 있었다. 이 당시에 안디옥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Iganatius)는 주교란 유일한 단결의 초점이며 주교의 권위가 없이는 성찬도 교회도 없다고 했다.10) 그리고 후기에는 수도사들이 생겨났다. 4세기 경에 수도원 제도는 교회의 기성제도가 되었는데, 그들은 공동생활을 하며 금욕주의 생활을 했다.

3) 중세 교회

중세 교회에도 고대 교회의 주교나 수도사들이 여전히 존속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기에 교황권이 확립되어 가고 성직제도가 엄격해 가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황제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앙통치체제며 일찍 중세초기에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11) 교황의 수많은 칭호가 교황의 직무의 복합성을 나타내고 있다.
교황은 로마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의 계승자, 전 세계 교회의 최고 권위 사제, 서방교회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 주교 등으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인 치리권을 부여하셨다” 하여 모든 시대에 걸쳐 최고의 입법, 행정, 사법적인 권한들을 행사했다.
중세 교회의 성직제도는 하나의 계층으로서 평신도를 생겨나게 했다. 신약성서에서 ‘평신도’라는 계층은 찾아볼 수 없다. 성직자가 생겨남으로 비로소 평신도라는 개념도 생겨난 것이다. 성직자는 가르치고 평신도를 성화시키며 치리하는 계층으로 이해된다면, 평신도는 가르침을 받는 자요 거룩하게 되는 자요 다스림을 받는 자로 인식되었다. 교회 선교에 있어서 이것은 성직자의 전유물이었으며 평신도 운동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즉 평신도 운동은 성직자의 엄격한 지도와 감독 하에 있었다.

4) 개혁 교회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회관과 관계를 끊었다. 그러므로 어떤 특수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 사이에서 서로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는 ‘성직자가 성례를 통해서 구원을 분배한다’는 “특별 제사직” 개념을 배제하고 교회를 신자들의 영적 교통이라고 보고 “만인 제사장직”(萬人祭司長職)의 성경적 관념을 회복시켜 놓았다.

4.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

1) 성도의 개념

성도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다. 성도는 교리의 신분도 아니고 신학으로 인정 받은 신분도 아니다. ‘성도’라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인(印)침 받은 자들이다. 성도는 신약에만 나오는 말이 아니다. 구약에도 ‘성도’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의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던 말이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곧 구약에서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 중에서 한 개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성도는 새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 중에서 성령으로 인침 받은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는 첫 언약의 완전한 성취를 체험한 자들인 것이다. 성도에 대한 아래의 여러 정의는 성도의 독특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첫째, 성도는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피조물이다.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며 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구원하신 다음에 제자 삼으시고 증인되게 하셨다.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피조물이 인간이요, 그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 성도다. 성도는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과는 다르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인 것이다.
둘째, 성도는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거룩하게 무장시켜서 쓰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일꾼이다.
셋째, 성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감시 감독을 받고, 빼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 받은 자다.
넷째, 성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구다.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 속에 임재하셔서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하신다.
다섯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아버지의 일을 하셨던 것을 그대로 계승하는 자들이다.

2) 성도의 특별성

① 사도와 성도와 신자
신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신자’와 ‘성도’와 ‘사도’는 항상 뚜렷이 구분되어 사용되진 않았다. 그러나 동일한 의미로만 쓰였다고는 볼 수 없는 증거들도 있다. 그 차이는 일차적으로 용어상의 차이다.
중요한 것은 그 용어상의 차이가 용어의 차이로만 있지 않고 신분적 구분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분적 구분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계층상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첫 언약에 속한 자가 있고 새 언약에 속한 자가 있다는 것을 전술하였다. 곧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 발전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 차이에서 오는 차이인 것이다.
신약 시대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다양한 신분을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에서는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이 땅에 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신분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중요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1∼3)

고전 1:1∼3에서는 사도와 성도와 신자로 구분했다. 이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부르신 자들이고, 그가 하늘로 가신 이후에 성령이 오신 후 성령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성도들이며, 그 외에는 주 예수의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이 곧 신자들이다. 이런 용어상의 차이가 분명히 신학적인 신분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에 대하여 살펴보자.

② 사도와 성도의 차이
사도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던 초에 그의 뜻대로 부르신 열두 명의 제자를 말한다. 사도의 부르심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 영광을 받으시기 이전이다(눅 6:13∼16). 이들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사도’는 ‘제자로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았다’ 하는 뜻이다. 주님이 택하시고, 주님에 의해서 부르심 받고 보냄을 받은 자들을 사도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그의 음성으로 부르셨고 보내셨다. 그러므로 열두 사도에 대한 부르심은 특별한 부르심이다.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부르심을 받지 않은 바울도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는 비록 사도로 부르심 받은 것은 아니지만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 이유는 사도적 권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진술한다(고후 12:12).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르심을 받은 후부터 사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다. 이것이 사도와 성도의 다른 점이다. 사도는 주님이 오셔서 직접 부르신 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성도는 성령이 부르신 자들을 가리키는 칭호다. 이 차이는 단순히 부르심의 시간적인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성령의 내재하심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가 없는 상태로 있다가 후에 성령의 오심으로 인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었다. 보혜사 성령이 임재하시기 전에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는 성령이 임재하신 후 보혜사 성령의 나타나는 역사로 증거하는 것과는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 마지막 다락방 설교에서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 15:26, 27)고 했다. 곧 보혜사 성령이 오시고 나서 비로소 새 언약의 성취로 인한 하나님의 역사 곧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성령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의 역사가 있었다.
사도가 성도와 다르다는 것은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부탁 받았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모든 자들에게 해당되긴 하지만 특별히 사도들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새 언약이다.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에는 주님의 새 언약이 성취되지 않은 것인데, 주님은 분명히 유언과도 같은 약속을 하셨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 5).
그러므로 사도의 온전한 사역은 새 언약의 성취로 인한 곧 성령 강림 이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도로 부르심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의 도구로 완전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 강림의 사건 이후에 성령으로 인침 받고 그 믿음을 보증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후 1:21, 22).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불완전성과 신약의 성령의 역사의 완전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 강림 이전에 부르심 받은 사도는 그 특별성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나 복음중재의 도구로써 불완전한 신분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라고 할지라도 성령 강림 이후에 성령의 인침으로 완전한 복음중재의 수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역사에서 교회의 시작과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정수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 2:1∼4에는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며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기록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행 1, 2장 이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행 1~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신약교회의 탄생으로 믿어진다. 성령의 사역도 오순절이 기점이 된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구약시대 천지 창조 때(창 1:1~2), 인간 창조 때(창 1:26)도 성령은 역사하셨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특수한 사명자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왕(삼상 16:14), 제사장(삼하 12:7), 선지자(삿 6:12 이하, 삼하 12장), 예언자(미 3:8) 등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전혀 다르다. 즉, 행 2:17, 18 말씀대로 모든 육체, 즉 자녀, 젊은이, 늙은이, 남종, 여종 등 구분하지 않고 주어진다. 또 구약 때 성령은 한번 주어졌다가 그가 범죄하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성령이 곧 떠나고 말았다. 그 예는 사울 왕도 성령으로 예언했다가(삼상 10:10, 19:20), 사울 왕에게 악신이 작용하여(삼상 19:19) 다윗을 추격하게 된다. 또 다윗도 범죄한 후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기도하여 성신이 소멸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신약 때는 전혀 다르다. 행 2:38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성령은 계속하여 충만해서(행 4:8)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이 된다. 베드로가 그리하였고, 바울도 그리하였고, 모든 사도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다 그리하였다. 이렇게 사도행전 2장을 기점으로 해서 앞과 뒤가 전혀 다르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약교회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날을 시발로 하여 성령의 내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12)

또한 사도와 성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사도들 중에 가룟 유다는 사도로 부름 받고 전도의 일을 하였으나 타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고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도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 성령의 임재가 있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실격된 모습을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복음중재하는 사도의 사명을 다시 받은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였으며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주님의 명령대로 온전한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경우를 보면 성령으로 인침 받기 전에는 복음중재하는 도구로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 이전의 교회의 선교 역사와 이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적 시대 차이로 인하여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도 이후 시대에는 사도는 없고 성도만 있다. 성도를 보증하는 것은 사도적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적 권능이 있는 사람을 성도라 한다. 구약시대에도 성도라고 말을 했지만 실상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만 시작되는 것이다.

③ 신자와 성도의 차이
성령의 역사는 계속적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이후에도 성령은 계속적으로 오셔서 예수를 주라 믿는 사람들 속에 임재하셨다. ‘성령이 각 사람 속에 임재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 성령 강림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행 10:44∼48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방인에게도 성령 임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성령 강림절의 그 강력한 성령 임재의 현장에서 그것을 체험하고 또 성령 강림 및 임재의 체험의 성경적 근거를 깨닫고 설교하였던 사도 베드로 자신도 놀랐다. 성령의 임재 사건은 사도 베드로 자신이 놀랄 정도로 하나님의 자의적인 역사다. 성령 임재의 사건은 행 19:2∼7에서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성령 강림절의 그 첫 성령 강림의 역사적인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을 뿐이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 임재의 체험을 하였다(행 9:17). 그런 그가 선교사로 사역하는 중에 성령 침례가 있음을 듣지도 못한 신자들에게 안수하여 성령 받도록 돕는다. 그들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기 전에도 그들은 믿는 제자였다. 그들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성령이 임재하였다. 그들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은 성령 임재의 역사가 오순절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이 동시대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런 상황 곧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여 지칭하는가? 고린도전서의 예에서 보듯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성령의 역사의 차이에 따라서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3) 복음중재의 최종 행위자(最終行爲者)로서의 성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라 하여 다 예수와 같은 공생애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오직 구원만 받고 자기 영혼 하나만 보전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유지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써 공생애를 가지는 사람이 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하지 않으며 개인의 형편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 형편에 비해 더욱 많은 것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공생애’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생애는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또한 그는 삼위 하나님의 일위(一位)이신 성령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의 임하심이 보였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모두 그가 공생애를 출발하실 때 성령이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 4:16, 막 1:10, 눅 3:22, 요 1:33).
이와 같이 성령이 교회 안에 임했을 때 교회의 공적인 출발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에게 임하신다’는 말이다. 성령은 예수 이름을 믿는 자의 영혼을 성전 삼으시고 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교회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곧 성령이 성도들에게 임하신 그때부터 성도들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으로 공생애를 가지는 사람들을 ‘성도’라 한다. 현재 교회 내에서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에 의해 이끌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구원만 받을 믿음으로 사는 신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 충만하면 전도도 하고 교회 봉사도 한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집사는 하나의 영적인 공직으로서 성도의 공생애를 사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도로서의 공생애를 가진다.
성령으로 성도가 됨은 하나님이 쓰시는 최종 도구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부른 사도들도 성령의 강림으로 성도가 된 것을 생각한다면 성도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복음중재로서의 최종적인 수단이며 가장 직접적인 도구인 셈이다.

Ⅲ. 하나님의 의도 평신도 신학의 과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평신도 이해와 신학은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평신도와 교역자의 능력은 은사적인 것이다. 성도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한다. 성도는 지체의식을 가지고 합력하여 교회를 세워야 한다. 만약 그 은사를 가지고 개인적인 목적에 사용하든지 자랑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혼란과 무질서에 빠질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은 그 은사로 더 많이 봉사해야 한다. 능력은 사모하되 일하지 않는 자가 평신도들 중에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이 성도의 사역 개인주의화 경향을 가져온다면 평신도 신학이 바라는 목적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또한 목회자들에 대한 평신도들의 교만한 생각과 불순종은 목회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
곧 위에서 언급한 평신도 신학의 세 유형 중 자유교회적 평신도 접근으로 평신도를 이해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개교회 내에서 발생하면 교회의 목회질서는 마비될 수도 있다. 곧 평신도가 목회자와 능력 면에서 차이가 없다면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자는 누구인가? 평신도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이 도리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존 스나이더의 『21세기 교회 전망』에서 준비시키는 자(equipper), 제자 삼는 자, 가능하게 하는 자(enabler)로서 목회자를 말하고 있다. 곧 목회자는 평신도를 선교의 역군으로 준비시키고, 제자로 삼고, 가능하게 하도록 하는 자(者)라는 것이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사역의 보편성이 보장되고 동역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구비시키는 자로서의 목회자 모델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평신도 신학이 자유교회적(自由敎會的)인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동적인 성령의 나타나심은 신약 교회의 중요한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갱신되어야 할 교회의 문제라면 제도적인 사역(Institutional Ministry)의 문제다. 이것은 카리스마적(Charismatic Ministry) 사역으로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평신도 신학의 자세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적인 작은 문제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갱생의 절박한 문제에 대한 대의적(大義的)인 시각을 가지고 문제를 풀고자 해야 한다.



Ⅳ. 닫는 글

교회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하나님 앞에서 신분적으로 구분됨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기존의 교회론이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였고 성직자 중심의 신학을 펼쳐왔다.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것도 아니요, 또한 초대 교회의 모습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신도는 “교회의 선교를 주도하고 교회 성장을 이루는 요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를 살펴보면 초대 교회 이후부터 평신도를 교회의 객체요, 성직자의 섬김을 받는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은 다수의 평신도를 소수의 성직자가 다스리고 지배하는 대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교황제도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것은 그들의 교회론이 옹호하는 비성경적인 교리의 핵심이다.
평신도 신학은 이런 비성경적인 신학에 대한 각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교회 구성원의 99%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에게 그들이 교권에 빼았겼던 권리를 되찾아 주자는 평신도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보여준 ‘만인제사장주의’가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만인제사장주의’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기치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평신도 신학의 이론적 근거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 단적인 예로 오늘날 개신교 내에서도 성직화(聖職化)되어 가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제사장주의’를 구현할 신학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시대와 상황에는 교회의 선교적 측면을 생각해야만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교권에 빼앗긴 평신도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은 하였으나 그들의 교회론은 로마 가톨릭의 교회론에서 완전한 개혁을 가져오지 못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답습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평신도 신학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볼 때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적 측면을 강조하는 헨드릭 크레머의 교회론과 그의 평신도 신학은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평신도 신학의 정립을 위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평신도 신학의 정체성 그리고 그 방향을 짚어 볼 수 있다. 평신도 신학은 평신도의 권리 회복이나 반(反)성직을 위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평신도를 선교하는 교회의 주체로서 동력화(動力化)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뢰아아카데미의 복음중재론은 오늘날의 상황에 맞는 평신도 신학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도적 권세를 성령의 임재로 받은 대다수 성도들에게는 능력의 보편성이 보장되며 사역의 보편성이 확보되어 있는 것이다. ‘전군 간부화’란 말로 비유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평신도는 성령의 은사로 구비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교의 선봉이다.
믿는 자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으니 예수 믿는 자는 모두 증인이 되야 한다. 그 따르는 표적과 능력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시작 부분에서 열한 제자만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따라 성령을 받은 자는 기본적으로 모두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능력이 있게 된다.
베뢰아 운동은 누구나 성경을 읽고 믿으며 깊이 상고함으로 누구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성도가 되므로 교권주의자들로부터 권리를 되찾아 신앙과 체험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또한 각 성도가 하나님을 알고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는 것이다. 베뢰아 운동에서 평신도 운동을 지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 평신도 신학으로서 그 내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평신도 신학도 그 한계가 있다. 베뢰아의 평신도 신학은 성도 개인에 대한 보편적인 사도성을 강조함으로 ‘만인제사장주의’가 오늘날 보이는 평신도 사역의 개인주의화(個人主義化)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지체의식을 가지고 연합해야 하는 선교사역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평신도들이 교역자와 차별 없는 능력을 얻는다는 것은 평신도와 교역자가 사역의 보편성을 가지고 협력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기는 하지만 실제 사역 현장에서 발생하는 고도의 의사결정 과정은 민주주의 방식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13)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교회 구성원의 99%인 평신도가 받은 바 능력을 자랑하고 목회상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자 할 때 교회 성장에 장애가 올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은 평신도 신학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또한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평신도 신학의 한계며 풀어야 할 숙제다.



주)

1) 『엣센스 국어사전』 민중서림편집국 편, (서울: 민중서림, 1993), “중재”(仲裁) 항목.
2) 디모데전서 2장 5절과 히브리서 9장 15절에는 ‘중보’(中保)로 한자표기되어 있다.
3) 베뢰아아카데미 20기 강의 테잎 44번을 참고하라.
4) 루이스 벌코프, 『벌코프 조직신학 下』 권수경, 이상원 공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pp. 865-866.
5) Kim, Hak-Man “Influence of the Theological Thought on the Church Growth” (D. Min.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Pasadena & Asian Center for Theological Studies and Mission, Seoul. 1985). pp. 39-40.
6) 루이스 벌코프, op. cit., pp. 867-870.
7) Ibid.
8) Ibid.
9) 김기동은 그의 베뢰아아카데미 20기 강의 ‘성경을 보는 안경’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세 영적 존재를 중요 내용으로 다룬다. 이를 위해 이것을 편집하여 만든 기독교한국침례회(연맹)의 교회학교 공과를 참고하라. 기독교남침례 총회교육국편, 『하나님의 의도-중, 고등부 교사용 1권』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4), pp. 110-164.
10) J. B. 라이트푸트, J. R. 하머 공저, 『속사도 교부들』 이은선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155.
11) 정수영, 『새교회사』 (서울: 규장문화사, 1991), pp. 184-194.
12) Ibid., pp. 29-30.
13) 폴 스티븐스,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김성오 역 (서울: 한국기독교학생출판부, 1992), pp. 4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