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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도로 본‘신적 주어’(神的主語)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5:13
하나님의 의도로 본‘신적 주어’(神的主語)  
하나님의 의도로 본‘신적 주어’(神的主語)

 김 은 혜


편집자 주 : 본 논문은 2000년도 베뢰아대학원대학교 졸업논문을 본지에 게재하기 위하여 필자가 김정태 교수(베뢰아대학원대학교 신약학) 지도아래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 누가 - 행전을 중심으로 ─

Ⅰ. 서 론

불트만(R. Bultmann) 이후 신약성서 연구의 주요 관심이 누가-행전(Luke-Acts)1)에 맞춰지기 시작하면서 누가도 점차 신학자로서 인식되었다. 누가의 저작이 학자 사이에서 중요시된 근거 중의 하나는 신약성서 기자 중 양적으로 가장 많은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누가-행전의 양이 많은 것은 누가의 말이 장황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목의 범위(과학적인 식견, 역사적인 증거)로 말미암은 것이다.
의사였던 누가는 글을 씀에 있어서도 과학적인 식견으로 역사적인 증거를 토대로 기술하였다. 누가복음 서두에서 밝혔듯이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 누가의 헬라어 문체는 절도있고 효율적이다. 또한 인류의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마태의 족보와 달리 누가의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한다(눅 3:23∼38). 그리고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마태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전해 주며, 예수의 부활 후 현현(顯現)에 대해서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눅 24:1∼51).2)
한편 누가복음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은 캐드버리(Cadbury)의 말과 같이 예수와 바울을,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량 역할을 해준다.3)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 이후부터 바울이 로마에 입성할 때까지 예수의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방인을 겨냥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을 다루고 있다.4) 따라서 총 52장으로서 신약성서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누가-행전에 대한 연구를 도외시한다면 올바른 신약성서의 이해가 단편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학자인 누가의 연구와 누가-행전이라는 그의 저작을 이해하는 것은 신약성서 전체의 연구를 위해서도 뜻깊은 일이다.5)
본 연구의 목적은 누가-행전에 나온 주요 하나님의 칭호인 “주”, “하나님”, “아버지” 등이 주어로 나온 문장을 연구함으로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연구 방법은 두 책을 비교하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 저자의 저작이므로 글을 쓴 목적, 구조, 문체상의 통일성, 내용파악으로도 소기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저자가 다른 두 글을 비교할 때 오는 불필요한 수고를 덜게 되는 잇점이 있다.
내용상으로는 예수의 공생애에 국한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다룬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를 중점으로 다룬 책이요, 사도행전은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공생애를 변호하고 증거하는 것을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공생애는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우편 보좌에 올리우심의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 연구의 매개는 ‘신적 주어’(divine subject)6)이다. 하나님의 칭호가 문장의 주어가 된 것을 ‘신적 주어’라 한다.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신적 주어를 포함한 문장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사역을 나타내는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누가복음의 신적 주어가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역과 사도행전의 신적 주어가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역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을 정점으로 예수가 살던 시대의 정황과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우편 보좌에 올리우게7) 되는 정황은 교회사적으로 시대를 둘로 양분할 수 있을 만큼 서로 다른 때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사도행전은 성령이 제자들을 비롯한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여 예수 이후 시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차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정 하에 하나님이 예수의 공생애를 통하여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기로 한다.



Ⅱ. 칭호로 본 하나님의 사역

누가-행전의 문장 속에서 하나님의 칭호인 “주”, “하나님”, “아버지”는 때로는 주어로서, 어떤 것은 직접 목적어나 간접 목적어, 또는 전치사의 목적어 등으로서 다양한 문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서는 주격 3인칭 능동형에 초점을 맞춘다.
신적 주어를 연구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도 큰 의의를 갖는 것은 그 주어가 갖는 문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사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사역과 현재에 행하고 계심과 앞으로도 행할 것을 선포한 신적 주어의 문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많은 지식을 알려 준다. 다음은 누가-행전에 나타난 주격 3인칭인 신적 주어의 사용 횟수를 조사한 표이다.

< 표 1 > 누가-행전의 주격 3인칭 신적 주어 횟수9)



1. 신적 주어를 통해 본 하나님의 사역

1) 누가복음

침례 요한 및 예수의 유아기 기사를 다룬 누가복음 1, 2장에는 비교적 신적 주어가 적게 나타난다. 1, 2장에서 “주”는 문장의 주어로서 4회 나오며 모두 산문(散文)에 있다(눅 1:25, 28, 58; 2:15). “주 하나님” 형태의 신적 주어는 2회 나오며 시적 기사에서 나온다(눅 1:32, 68).
누가복음 3장부터 성년이 된 예수를 다루는 3장부터 24장까지 있는 신적 주어의 대부분은 예수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신적 주어로서 “주”는 2회 나오며, 이에 해당되는 내용은 예수가 직접 언급한 “포도원 주인에 대한 비유”와 “그리스도와 다윗에 대한 비교”를 언급한 시편을 인용할 때다(눅 20:15, 42).
그리고 예수가 신적 주어로서 가장 많이 사용한 하나님의 칭호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칭호도 하나님과 대등하게 사용되었다. 궁극적으로 “아버지”라는 칭호는 누가-행전을 통틀어서 오직 예수의 말씀에서만 발견된다.10)
여기서 “하나님”은 신적 주어로서 7회 나온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축사(逐邪)를 지원하는 자이시고(눅 8:39), 만물과 영혼의 주인이시며(눅 12:20), 새와 들풀을 먹이시고 입히는 자이시다(눅 12:24, 28).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아시며(눅 16:15), 택한 자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시며(눅 18:7), 선한 분이시라는(눅 18:19)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서 “아버지”는 6회 나오는데, 이 칭호를 사용한 신적 주어는 대체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다룰 때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자비하시며(눅 6:36), 모든 것을 예수에게 주셨고(눅 10:22), 그에게 그의 나라를 맡기셨다(눅 22:29). 또한 아버지는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며(눅 11:13), 인간의 필요를 아시고(눅 12:30),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주기를 기뻐하는 분이시라는(눅 12:32) 내용이 등장한다. 그밖에 기타 인물의 말을 통해 3회의 신적 주어가 나온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난 신적 주어는 모두 15회로서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현재시제에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예수가 대체로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예수의 말씀에서 나타난 신적 주어 중 5개는 부정과거 직설법 시제(aorist indicative)에서 나타나고, 4개는 미래시제에서 주어로 나타난다.11)

2) 사도행전

사도행전에는 신적 주어가 총 68회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1/5을 차지하는 사도들의 설교에서는 신적 주어가 무려 52회나 나온다. 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있는 전체 신적 주어의 절반을 넘는 수이며 예수의 말씀에 나타난 신적 주어보다 3배 이상이나 많다.
사도들의 설교에서 주로 사용되는 신적 주어는 “하나님”으로서 모두 46회 사용되어 “하나님”이 신적 주어로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주”는 4회(행 2:34; 7:33, 49; 15:17c), “주 우리(또는 너희) 하나님”은 2회 나온다(행 2:39, 3:22).
사도행전에서 설교 외에 나타난 신적 주어 횟수를 보면, “하나님”이 10회(행 10:15, 28; 11:18; 14:27; 15:4, 12; 16:10; 19:11; 21:19; 23:3), “주”가 5회(행 2:47; 12:11, 17; 13:47; 16:14) 나온다. “아버지”는 1회 언급됐는데 부활한 예수의 말씀에서 등장한다(행 1:7).12)
신적 주어 가운데 12회가 아브라함에서부터 다윗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 가운데 과거 사건들을 언급하는 말씀에서 나타난다.13) 또한 예수의 강림(행 3:22; 7:37; 13:23), 능력 행함(행 2:22; 10:38), 수난(행 3:18), 부활(행 2:24, 32; 3:15, 22, 26; 4:10; 5:30; 10:40; 13:30, 33, 34, 37; 17:31), 하늘 우편 보좌에 올리우심(행 2:30, 34, 36; 3:13; 5:31)을 포함한 예수의 공생애 사건을 언급할 때 20회 이상의 신적 주어가 발견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들의 설교 가운데 예수의 부활과 우편 보좌에 올리우심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을 가장 많이 언급했다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 그 밖의 신적 주어는 사도행전 2장부터 28장에 기술된 사건을 말하는 문장에 있으며 성령을 주심(행 2:17; 5:32; 11:17; 15:8)과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선교(행 2:39; 10:34; 11:17; 15:7, 8, 14, 17; 17:30)에 관한 내용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의 설교 외에 나타난 신적 주어의 횟수는 모두 16회로서 대부분 초기 기독교인의 활동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을 진술하는 데 있다. 그 예로서 “주”가 한 천사를 보내고(행 12:11), 베드로를 감옥 밖으로 이끌어내며(행 12:17),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한 일이 있으며(행 16:14) 바울의 선교 동안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선포하는 요약 진술 등이 있다(행 14:27; 15:4, 12; 19:11; 21:19).
이상과 같이 누가-행전은 신적 주어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위를 간접화법으로 언급함으로써 신적 주어가 필요하지 않는 문장도 많이 있다.14) 이는 다음 항에서 논의할 것이다.

2. 수동태 문장을 통해 본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칭호 연구에 있어 누가-행전에 나타난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누가복음에 두드러진 간접화법인 신적 수동태 문장이다. 신적 수동태는 누가복음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 그리고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공통적으로 많이 발견된다.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예수의 말씀에 많이 나오는 신적 수동태에 대해, 이는 신약시대 이전에 이미 제 3계명(출 20:7; 신 5:11)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잘못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대사회에서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15)를 발음하는 것을 피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약시대의 상황도 이와 흡사하여 하나님의 행위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습관을 많은 경우에서 예수도 따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더 나아가 신적 수동태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활동을 감추어서 표현하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주장한다.16)
그런데 사도행전은 예수의 공생애를 다룸에 있어 누가복음과 달리 직접화법의 능동태를 사용하여 모든 일의 행위자는 하나님이심을 명시하였다.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서의 양상과는 달리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는 신적 수동태로 감추었던 하나님의 사역을 능동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당시 설교자였던 베드로와 바울, 스데반 등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증거다.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이 간섭하셨음을 예수 자신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사실들을 사도행전 이후의 사람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은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 이후 나타난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그의 저서 『성령』(The Holy Spirit)에서 “신약성경은 예수의 갈보리 사건처럼 오순절 사건도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다”고 보고, “성령이 오심은 하나님이 정하신 모세적 경륜의 임시성에 의한 제한들이 폐하여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표상이다”고 정의한다.17) 곧 성령의 강림은 마지막 날에 대하여 요엘이 예언한 바의 성취로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주의 날의 도래였다.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그가 제자들에게 한 말은 ‘보혜사 성령이 자신이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요 14:26; 16:13). 여기서 보혜사(, Paraclete)란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자로서 예수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본(本) 영(營)이라고 김기동은 정의한다.18)
김기동의 이와 같은 견해는 허광일의 “PSP”(The Paraclete-Spirit Precedency Principle)에서 뒷받침되는데, 그는 보혜사 성령의 기능 중 가장 우선된 기능은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기능과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기능, 안전 장치로서 세상을 정죄하는 기능이 있다고 제시한다.19)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은 예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진리를 일깨워 줌으로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하나님의 사역까지도 밝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에 일어난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 이후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보혜사 성령의 역할로 인해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사역을 밝히 알게 되었다. 곧 그 동안 감춰졌던 하나님의 사역과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 교감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의 공생애의 모든 일을 인도하셨음을 강력히 설교할 수 있었다.
이런 이해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문장의 표현에 차이가 있었던 이유를 밝혀 낼 수 있다.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 시작된 시점과 맞물리는 사도행전을 기점으로 하여 성령 임재 전에는 신적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대중에게 감추어졌다. 그러나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는 성령의 보혜사 사역으로 인해 사도들이 진리를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베드로와 바울, 스데반 등의 설교에서 신적 주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능동태로 직설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예수의 공생애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과 역할을 알 수 있었던 신학적 진술 외에 베드로의 성전 설교(행 3:12~26), 스데반의 설교(행 7:2~53), 고넬료 집에서의 베드로의 설교(행 10:34~43) 등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이 발견된다.



Ⅲ. 공생애를 통해 본 하나님의 사역

누가-행전에 나타난 예수의 공생애를 다룰 때 그의 능력 행하심과 수난, 부활, 우편 보좌로 올리우심,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누가는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예수의 승천 이야기를 소개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눅 24:51; 행 1:9~11).20) 누가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눅 9:51)라고 기록하며 실제로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들리워 올라 가셨음을 전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눅 22:69)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누가는 예수의 승천과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음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21)
여기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나눠서 하나님의 칭호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연구하기로 한다.

1. 누가복음

1) 예수의 능력과 수난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일하고 계심을 단언했다(눅 8:39; 11:20).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의 능력 행하심을 목격하거나 예수에게 치유 받은 후 하나님을 찬양했다. 중풍병자(눅 5:25), 꼬부라져 있는 여인(눅 13:13), 문둥병자(눅 17:15), 소경인 거지(눅 18:43), 지켜보던 군중(눅 5:26; 7:16; 9:43; 18:43)과 제자의 온 무리(눅 19:37)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
심지어 나인 성에서 예수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눅 7:16)고 하는 신학적 진술까지 고백한다. 이처럼 누가는 많은 무리의 입술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강력한 역사를 하나님이 지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암시한다.22)
그런데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한 것은 소수이고, 그것도 간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역할을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았다. 예수의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선포에서 예수는 “인자가 많은 수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변형 기사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장차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죽임 당하실 것을 말하는 기록이 나온다.
예수는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는 세 번째 수난을 선포하신 후(눅 18:31), 그는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채찍질 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눅 18:32, 33).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한 성경 본문을 뜻하는데, 여기서 동사 “응하리라”(will be fulfilled)는 신적 수동태다.23) 또한 누가복음 1장 1절부터 22장 38절에 있는 그밖의 수난에 관한 단락에서도 두 개의 성경 인용문(눅 20:17; 22:37)과 신적 수동태를 포함하고 있으나(눅 5:35; 9:44; 13:32, 34; 22:22, 37) 이 가운데 어느 것도 하나님을 명확하게 명명하지 않는다.
예수가 체포되기 전, 감람산에서 기도할 때 그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하였다. 이 단락은 복음서에서 수난에 관한 단락 중 명확하게 하나님을 언급한 유일한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로부터(눅 22:47∼23:56) “잔”은 예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추측할 수 있다. 누가복음 1장 1절∼22장 38절에 있는 수난 단락은 이미 같은 결론을 지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수난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로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신학적 진술은 사도행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의 체포로부터 그의 장사까지 수난 사건의 이야기(눅 22:47~23:56)는 하나님의 사역보다 대제사장, 제사장들과 예수의 다른 적대자들의 행동을 강조한다.
반면 예수는 문맥상 명확히 기도라고 보기 어려운 누가복음 23장 34절과 46절의 그의 기도에서 아버지께 청원하였음에도 그는 두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공공연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22장 47절∼23장 56절에 있는 그외의 단락은 하나님이 해당 구절에 서술된 사건들을 통해 그분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예가 전혀 없다.
예수의 수난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확인할 때 누가는 주어가 신적 주어이고 동사는 능동형 타동사, 직접목적어는 예수인 “하나님-동사-예수”형을 암시하는 주어-동사-목적어의 신적 진술을 쓰지 않았다.24)

2) 예수의 부활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누가복음 1∼23장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역할을 언급한 몇 단락이 있지만,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킬 것이란 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누가복음 9장 22절의 예수의 수난 선포에서 그는 “인자가 많은 수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선언하였는데, ‘살아나야 하리라’는 신적 수동태로 볼 수 있지만 누구에 의해 살아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지적하지 않는다.25)
예수의 부활과 영광 받음을 포함하는 그의 “죽음”(눅 9:31)에 대한 언급도 역시 하나님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눅 18:33)는 말로 결말 짓는 수난의 세 번째 선포는 예수의 부활을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 는 말과 연관되어 있고 신적 수동(눅 18:31)을 포함하지만 명확하게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24장은 빈 무덤과 예수가 살아나심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결코 하나님이 예수를 살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은 빈 무덤을 발견한 두 여인에게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음을 선포했으며, 여기에서 문맥상 불명확한 동사 ‘에게레’(, 눅 24:6)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수동태라면 그것은 분명히 신적 수동태다.26) 그리고 글로바와 그의 동료가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 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살아나신 예수는 이런 사건들을 성경 본문과 연관시키며(눅 24:25, 27) 하나님의 필요성을 말씀했다(눅 24:26).
부활하신 예수도 그의 다시 사심에 대해 하나님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46)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씀 가운데 모든 일이 자기에 대해 계획된 일임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는 데 있어 사역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3) 우편 보좌로 올리우심

누가복음은 마지막 장에 예수가 제자들을 떠난다는 내용만 있을 뿐 예수의 올리우심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며, 하나님이 예수의 수난이나 죽음에서 그를 살리는 자임을 나타내는 문장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를 우편 보좌로 올리울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몇몇 문장에 나타난다.
유아기 기사에 있어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受胎告知)를 할 때 ‘주 하나님이 예수에게 조상 다윗의 위(位)를 줄 것이다’라고 약속했고(눅 1:32), 예수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는 시편 110편 1절을 직접 인용하면서 말씀했다(눅 20:42, 43).27) 그리고 예수는 주장하기를 아버지가 자신에게 나라를 내게 맡겼다고 하여 자신이 왕으로 통치하실 것을 지적한다(눅 22:29).
따라서 누가복음에서는 많은 군중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과 올리우심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을 인지하지 못했고, 비록 글로바와 그의 동료는 예수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눅 24:19)임을 알았지만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여 빈 무덤의 소식을 듣고 놀랐다(눅 24:20∼24). 오직 예수와 가브리엘만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과 우편 보좌에 올리움에 있어 하나님의 능력이 존재했음을 알았다.28)
결과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하늘의 우편 보좌로 올리울 것에 대해서는 예수 당시의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당시의 사람이 예수가 행한 이적을 보고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을 지원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예수의 부활은 물론이고 우편 보좌로 오르는 것에 대해 무지했다. 더욱이 하나님이 부활과 우편 보좌에 오르게 하는 행위자임은 깨달을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이 예수의 부활과 우편 보좌에 오르심을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만 알 수 있게 됨을 반증한다.

2. 사도행전

1) 예수의 능력과 수난

사도행전 2장에 나와 있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예수가 능력을 행하고 수난과 부활, 승천, 우편 보좌로 올리움에 있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였음을 강력히 주장한다(행 2:22∼24, 32∼36). 이와 같은 신학적 진술은 누가복음 4∼18장에 기록된 예수의 능력 행하심과 누가복음 22, 23장에 언급한 수난 사건,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 1∼8절에 기록된 빈 무덤과 다시 사신 예수 이야기,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51절과 사도행전 1장 9~11절에 제자들을 떠나는 예수 이야기 등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일찍이 일어난 사건들을 지적하고 있다.29)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 외에도 예수가 행한 사역에 있어 하나님이 그에게 강력한 권능을 부여했다고 다시 선포한다. 그는 고넬료 집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고 역설했다.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행 2:23)고 단언한 것과 같이, 그는 성전 설교에서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루셨다’고 주장했다(행 3:18).
그리고 사도행전 4장 23절 이하에 보면, 사도들의 기도에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한 그것을 행했다고 외쳤고, 바울은 밀레도(Miletus)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써 산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선포한다(행 20:28).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소유격은 부정과거동사 “샀다”(obtained)의 주어다.30)
예수의 수난에 있어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고 또한 악한 자들의 손에 두게 하고 그를 나무에 달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그를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설교에서는 하나님이 예수의 수난을 예언하셨고 이를 이루셨으며(행 3:18), 수난 사건은 미리 정해졌던 것이다. 이로써 교회를 사게 되었다고 말하여(행 20:28), 예수의 수난이 하나님의 의도 속에 예정된 것임을 주장한다.

2) 예수의 부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부활을 언급할 때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 5:30)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어이고 타동사인 “살리셨다”와 예수라는 직접 목적어 구조를 사용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고 진술한 사도행전 13장 30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예수의 부활에 있어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구조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후에도 그들의 설교를 통해 이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행 17:31; 26:8). 복음서의 간접적인 언급과는 달리 이 단락에서는 명확하게 하나님이 예수를 살린 행위자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적 주어가 포함된 다양한 성경 본문을 인용하였고(행 2:25∼28; 13:33∼37) 신적 주어로써 성경 본문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베드로와 바울이 인용한 구약성서 구절이다.

① 사도행전 2장 25~28절에 나타난 구약성서 인용
시편 16편 8~11절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② 사도행전 13장 33~37절에 나타난 구약성서 인용
시편 2편 7절 -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사야 55장 3절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시편 16편 10절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공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역할을 선포하는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행위를 선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런 진술은 대부분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예수를 살리심에 있어 하나님의 행위를 대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행 2:23, 24; 3:14, 15; 4:10; 5:30; 10:39, 40; 13:27∼30). 누가복음에서 몇몇의 구절은 예수의 반대자들과 그의 부활을 둘 다 언급하지만(눅 9:22; 18:31~33; 24:7) 그 중 어느 것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행위를 명확하게 대조한 것은 없다.

3) 우편 보좌로 올리우심

사도행전에 있는 두 개의 설교는 하나님이 예수를 높이는 행위자임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다윗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位, throne)에 앉게 하리라 맹세함과 같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은 자임을 주장한다(행 2:30∼33). 그리고 베드로는 시편 110편 8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여호와)이 내 주(예수)에게 그의 우편 보좌에 앉았으라’ 하신 말씀을 증거로 내놓고 있다(행 2:34, 35). 곧이어 하나님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강조했다(행 2:36). 이후에 베드로가 유대인 회당에서 강연할 때도 그와 다른 사도들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였다고 선언했다(행 5:31).31)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신 바와 같이 “그를 높이셨다”는 사도들의 진술은 예수의 죽음이 비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 아님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함으로써 그가 인류의 희망이 되었지만 반면에 사도행전 자체 안에서는 “대속적 죽음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32) 탄네힐(Tannehil)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와 같은 일련의 신학적 진술은 예수의 부활과 높임 받으심을 단일 사건으로 보는 것이라고 추측한다.33)
김기동은 또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아버지 품 속에서 나오신 이가 영광의 하나님 우편으로 들어가는 현관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34) 그러므로 김기동은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에 대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하거나, 또는 마귀를 멸하기 위해 온 것임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을 맛보고 부활 승천하여 우편 보좌로 올리움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계획한 일이기 때문이다(히 1:2)35)
히브리서 1장 2절은 이에 대한 적확한 성경적 근거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었으며, 3절에 그 아들이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았다고 기록한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그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정하고 그가 율법으로 정죄받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과정을 거쳐 우편에 올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역 가운데 대속하는 일은 후차적 문제요, 그의 죽음과 부활은 올리움의 한 과정이며, 일차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늘의 우편에 오르기로 계획되었다는 것이다.36)
사도행전 1장 10절부터 11절에서는 “하늘로”()란 문구가 4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한편 예수의 승천에 관한 언급이 오직 부활 현현의 문맥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의 전편인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이미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눅 9:51) 그가 굳게 결심하고서 부활과 승천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언급한 바 있다.
마치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이 그가 하늘로 들려 올라가기 위한 승리적 과정의 일종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37) 그리고 예수의 승천 이야기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을 강조하는 사도행전의 여러 본문이다.38) 따라서 하나님이 그의 품속에 있던 독생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죽음을 경험하게 하고 부활하게 한 의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하늘 우편 보좌로 높이기 위한 과정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제까지 살펴 본 사도행전의 여러 설교는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신적 주어로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우편 보좌로 올리우심에 있어 하나님이 사역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신적 주어로 사용된 하나님의 칭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연구해 보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누가-행전이 한 저자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데 능력을 부어준 분임을 강조한 반면, 사도들의 사역을 중심으로 한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고 마침내 하늘의 우편 보좌로 올리우신 분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강조하는 바가 다른 원인은 성령의 임재 유무에 따른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기 전의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은 예수가 당대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었고, 그 뒤에서 일하는 하나님을 그렸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서술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도의 설교를 다룬 사도행전은 예수를 변호하는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가 부활하고 우편 보좌에 올리우는 데 하나님의 일하심에 초점을 둘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 알게 된 사도행전의 내용에 주목해야 하며 즉 예수가 부활하고 하늘 우편 보좌에 올리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누가-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을 파악하면 예수의 공생애는 인간 대속의 목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오르게 하기 위한 과정임을 알 수 있다.

Ⅳ. 결 론

본 글은 누가-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칭호가 주어로 나온 문장의 연구를 통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반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역을 연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칭호는 “주”, “하나님”, “아버지”로서 나오는데, 이들은 문장에서 주어나 목적어 등 다양한 문법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행위자로서 나오는 신적 주어가 포함된 문장을 살핌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보았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신적 주어의 3/5 이상은 예수의 언사에서 나타난다는 것이고, 예수는 대체로 현재동사를 수행한 신적 주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였다는 점이다. 반면 사도행전의 신적 주어 가운데 4/5가 사도들의 설교에서 나타나는데, 누가복음의 예와 달리 예수의 공생애 가운데도 특히 부활과 우편 보좌에 올리우심에 대해 사역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보다 신적 주어가 거의 3배가 많은데 이렇게 된 원인은 누가복음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신적 수동태 때문이다. 신적 수동태는 주로 예수의 언사에 나오며, 예수는 의도적으로 신적 수동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표현함으로써 해당 문장에 대한 행위자인 하나님을 감추었다. 이에 반해 사도들의 설교가 중심이 된 사도행전은 대부분 신적 주어를 사용한 능동태로, 예수의 공생애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명확히 알게 된 이유는 그들 모두 하나님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고전 2:11). 즉 보혜사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요 14:26; 15:26).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 동안 그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은 아직 예수가 하나님께 구한 보혜사 성령을 받기 이전의 사람들이어서 그들은 진리를 받을 만한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주로 예수의 언사에 나타나고 있는 신적 주어는 대체로 신적 수동태의 형태를 가졌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보혜사 성령이 그분을 환영하고 믿는 각 사람 속에 임재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하였으므로 성령에 이끌린 바 된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그들의 설교에서 그 동안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사역을 명확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용 면에서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데 능력을 부어 준 분임을 강조하고, 사도들의 사역을 중심으로 한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고 마침내 하늘의 우편 보좌로 올리우신 분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의 우편 보좌에 올리우심이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하늘의 우편 보좌에 올리우심에 대하여 몇 개의 구약 인용에 그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신적 주어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예수의 수난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신 바와 같이 그를 높여 우편 보좌로 올리우셨다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이 비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예정대로 그가 우편 보좌로 오르기 위한 과정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신적 주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파악하면 예수가 수난을 당하고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는 것에 하나님이 강력하게 사역하시며, 예수의 공생애는 그의 죽음으로 인류를 대속하는 목적과 그의 부활이 인류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의도 안에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오르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주)

1) 이 어휘는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서로 독립된 두 권의 책으로 보지 않고 한 권의 1부, 2부로 보는 데서 유래한 명칭으로서, 이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캐드버리(H. J. Cadbury)다. J. Cadbury, The Making of Luke-Acts (London: SPCK, 1958), p. 9.
2) Luke T. Johnson, 『최신신약개론』 채천석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pp. 271-272.
3) H. J. Cadbury, The Making of Luke-Acts (London: SPCK, 1958), p. 2.
4) 김득중, 『누가신학』 (서울: 컨콜디아사, 1997), p. 15.
5) Ibid., p. 12.
6) Robert L. Mowery, “Lord, God, and Father: Theological Language in Luke-Acts,” SBL (1995): p. 91. “신적 주어”는 모워리(Mowery)가 처음으로 정의하고 사용한 용어다. 하나님의 칭호는 3인칭이므로 신적 주어는 주격 3인칭이다.
7) 승귀(昇貴, Exaltation)라고도 하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우편 보좌에 올리우심”이라고 표기한다.
8) Joachim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The Proclamation of Jesu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1), pp. 9-14. 장동수, “신적 수동태 구절 소고”, 『성서원문연구』 제8호(2000): p. 117 에서 재인용했으며 신적 수동태를 신학적 수동태(theological passive)라고도 한다.
9) Robert L. Mowery, op. cit., p. 84.
10) 예외로서 사도행전 2장 33절의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에서 나오는데 이는 누가-행전에서 예수 이외의 사람이 말한 유일한 부분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에게 부어 주셨다”고 진술함으로써 누가복음 24장 49절과 사도행전 1장 4절에 나온 예수의 말씀을 확증하고 있으며 이는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옮긴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칭호는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나왔다고 할 수 있다.
11) Ibid., p. 93.
12) Mowery, op. cit., p. 92.
13) 행 3:25; 7:2. 6, 7, 9, 17, 25, 33, 35, 37, 42, 45; 13:17, 21.
14) 수동형 진술임에도 하나님이 문장의 행위자임을 명확하게 언급한 구절도 소수 있다(눅 10:22a).
15)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 )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하는데 사용된 네 개의 히브리 자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16) Joachim Jeremias, op. cit, pp. 9-13.
17) Sinclair Ferguson, 『성령』 김재성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9), pp. 66-72.
18) 김기동, 『예수를 알자 上』(서울: 도서출판 베뢰아, 1990), p. 52.
19) 허광일, “The Paraclete-Spirit Precedency Principle and The Third Millennium”, 『사도신학』 제2권(2000. 12).: p. 268. cf. PSP원리(The Paraclete-Spirit Precedency Principle). 1. 주요기능 규칙 ① 보혜사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신다(요 15:26). ② 보혜사 성령은 예수가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신다(요 14:26). ③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요 14:16). 2. 안전장치 규칙 ① 보혜사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의 죄를 정죄하신다(요 16:7-8).
20) 누가-행전 외에 예수의 승천을 기록한 복음서는 마가복음 뿐이다(막 16:19 -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1) 김득중, op. cit., p. 59.
22) Mowery, op. cit., p. 100.
23) 예레미야스는 예수의 친히 하신 말씀을 알아보기 위한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로 이 신적 수동태의 사용을 거론하면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언사에서 무려 100회 정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24) Ibid., p. 97.
25) I. H. Marshall, “The Resurrection in the Acts fo the Apostles,” Apostolic History and the Gospel (ed. W. W. Gasque and R. P. Martin; Grand Rapids: Eerdmans, 1970), pp. 101-103.
26) 베드로도 다윗의 위에 대해 언급했다(행 2:30).
27) 베드로도 같은 본문을 인용했다(행 2:34, 35).
28) Mowery, p. 100.
29) Ibid., p. 95.
30) Ibid., p. 96.
31) Ibid., p. 98.
32) Ibid., p. 99.
33) Ernst Haenchen, 『국제성서주석』 제34권 『사도행전Ⅰ』 이선희, 박경미 역 (병천: 한국신학연구소, 1993), p. 166. 여기서 헨헨은 사도행전 안에는 대속적 죽음 사상이 없고, 하나님이 예수를 그의 오른편 보좌에 앉히시고 그에게 세상을 심판할 수행권을 넘겨주셨으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일이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34) R. C. Tannehill,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A Literary Interpretation. Volume 2: The Acts of the Apostles (Minneapokis: Fortress, 1990), pp. 170-71.
35) 김기동, 『예수를 알자 上』 (서울: 도서출판 베뢰아, 1990), p. 336.
36) 김기동, 『예수를 알자 下』 (서울: 도서출판 베뢰아, 1990), pp. 308-310.
37) Helmut Flender, St. Luke: Theologian of Redemptive History (Philadelphia: Fortress, 1967), p. 93.
38) 사도행전에서 하늘의 우편 보좌를 언급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35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5: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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