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운동
한국 교회사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운동
백 종 호
백종호/ 1971년생·대림대학 공업경영과 졸·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B. A.)·서울침례신학연구원 졸(M. Div.)·베뢰아대학원대학교 신약학(Th. M.) 재학 중·베뢰아아카데미 29기 수료
Ⅰ. 서 론
베뢰아 운동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진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진리회복 운동”이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還言) 운동’1)이다. 그와 동시에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따르는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본주의적 성령 운동’이다. 말씀과 성령, 이성과 신앙, 합리론(合理論)과 신앙론(信仰論)이라는 서로 다른 신앙 방법론들이 충돌하지 않으며 새로운(brand-new) 어울림을 창출해 내는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전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칼비니즘(Calvinism)과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will)를 강조하는 알미니안니즘(Arminanism)이 베뢰아 운동에서는 전혀 충돌하지 않고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베뢰아 운동이 ‘열린 구조’(open-structure)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기반이 바로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를 지지하고 인정하고 있기에 베뢰아 운동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극단적 합리론(radical rationalism)에 치우치지 아니하며, 신앙의 합리론을 도외시한 채 체험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mysticism)의 위험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러나 이 땅에 예수복음이 들어온 이래로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일련의 신학과 성령 운동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말씀만을 강조하는 그룹들은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인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고스란히 고수하려는 교리적인 신학으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말씀과 신학을 등한시한 채, 성령의 현재적 사역만을 인정하는 그룹들은 신비주의와 일반 무속처럼 변질되는 것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는 말씀만을 강조하고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칼빈신학을 고수하려고 했던 한국의 신학을 살펴보고, 한국 교회와 신학에 미친 공과(功過)를 살펴 볼 것이다.
Ⅱ. 본 론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국 신학’이란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대화를 시도한 토착화 신학을 말한다. 즉 ‘성’(誠)을 신학의 핵심으로 이해하여 신학을 전개한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과 민중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다루는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같은 토착화 신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한국 신학’(Korea Theology)은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고 복음적이어야 하며 보편성이 있는 ‘한국 신학’을 말하고자 한다.
보편성은 모든 학문의 기본 전제가 된다. 더욱이 신학과 말씀은 만인에게 열려있어야 하는 당위(當爲)가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신학이라고 알려진 ‘민중신학’이나 ‘성(誠)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한국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두었기에 보편성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계시에 의존하지 않기에 이미 예수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신학을 굳이 명명한다면 ‘반-진리(半-眞理)의 신학’(Theology of the half-Truth)이며 ‘상황 신학’(situation Theology)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일견하여 이들의 신학은 ‘한국 신학’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적용되는 ‘한국적인 신학’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 신학이 존재한다면 외국에서 수입된 서구 신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화란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 마지막으로 미국 구(舊) 프린스턴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의 반동으로 일어났던 프린스턴 신학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순수하게 자라난 신학 운동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수입된 신학은 대부분 성경에 대한 입장에 따라서 신학적 견지를 달리한다. 성경을 칼빈주의라는 교리로 보고자 하는 개혁주의, 그와는 다르게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자유주의, 성경 자체(Text)보다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성경을 재해석하는 민중신학으로 구별된다.
전술한 신학방법론과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말씀임을 믿고 순종함으로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회복하려고 하는 새로운 운동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은 종전에 해왔던 방법론을 탈피하여 성경을 백지상태(白紙狀態, Tabula Losa)2)에서 있는 그대로(wie es eingentlich gewesen)3) 보고자 하는 신사적인 “성경닮기 운동”이다. 이러한 신학방법론에 따라 최석은 ‘교리 중심 신학’, ‘상황 중심 신학’, ‘성서 중심 신학’으로 구별한다.4)
이와 같이,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신학 운동들이 각기 상이한 길을 걷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을 어떠한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한국 교회사에 일어났던 다양한 신학 운동들을 살펴보고 이들이 안고 있는 한계를 지적할 것이다.
1. 한국 교회사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운동
한국 신학은 주로 독일, 미국에서 이식된 수입신학이 주(主)를 이룬다. 주로 독일에서는 자유주의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와 급진주의 신학이 들어왔고, 미국으로부터는 프린스턴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수입되었다. 이렇게 수입된 신학 중에서 한국 교회사에 가장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바로 지금 다루고자 하는 개혁주의 신학이다.
비록 개혁주의가 바리새적이고, 사변적이며, 문자는 있으나 생명이 없는 교리 중심적인 신학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으나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신학과 신앙 운동에 미치는 아름다운 전통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성경 중심적인 신앙생활,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열정적인 전도 생활 등 이러한 유산들은 대부분이 초기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수입된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기여한 부분이다. 우리는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로부터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켰던 것과 그로 말미암아 얻어진 성경 무오성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한국 교회의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 간은 정통신학의 고수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만한 이유를 바로 이 성경관에서 찾고 있다.5)
따라서 이 장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구 프린스턴 신학에 대하여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성경에 대한 입장과 해석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회복하고자 하는 환언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이 회복한 진리가 무엇이며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1) 개혁주의 신학의 일반적 개괄
한국 교회사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만큼 한국 교회사에 개혁주의 신학이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개괄적으로 개혁주의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대부분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에서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6) 그러나 구미(歐美)에서는 개혁주의라는 말보다는 칼빈주의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영어나 화란어에는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단지 ‘개혁된’의 의미로 ‘Reformed’, ‘Gereformeed’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한국 교회의 정서상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를 동의어로 쓰고자 한다.
우리가 한국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개혁주의 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질문해야 하는 본질적인 물음은 “무엇이 개혁주의인가?”라는 것이다. ‘개혁’(Reform)은 말 그대로 기존의 어떤 체제나 제도에서 합법적이고 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쳐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라는 신학적 술어는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용어이지만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있기에 오히려 칼빈주의보다는 개혁주의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사료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개혁주의는 중세시대에 부패한 가톨릭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구호를 내걸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of faith)의 교리를 확립시켰던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신학사조(神學思潮)를 지칭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은 조금씩 달랐으나 성경에 대한 견해는 거의 일치한다. 개혁자들은 교황, 교회 회의, 면죄부라는 화석화된 제도와 의식에서 나오는 가톨릭의 권위에서 ‘오직 성경’에 권위를 두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 운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만인에게 성경을 돌려주고자 했던 ‘성경 되찾기 운동’이 바로 종교개혁의 중심이다.
루터(M. Luther)는 “신앙의 조항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정립되어야만 하며, 다른 그 어느 것도 심지어 천사라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7)라고 말했다. 또한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바로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또한 쯔빙글리는 가톨릭의 모든 권위보다 오직 절대적인 권위를 성경에 두었으며 성경 무오성에 대하여도 인정하였다.
개혁가로서 그의 활동은 한 가지 원칙 위에서 이루어졌다. … 그 원칙이란 모든 논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항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였으며, 로마 가톨릭이든 루터파든 제세례파든 모든 반대자들을 성경에 의거해 물리치고자 하였다. 루터 못지 않게 그도 말씀의 신학과 말씀의 교회를 원하였다8)
16세기의 성경 주석의 왕이며 진정한 해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칼빈은 “모든 성경을 하나의 예외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규정하였다.”9)
이처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은 이전의 가톨릭에 비해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결국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 가톨릭으로 빼앗겼던 성경을 모든 만인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성경 회복 운동’이었고 성경 이외의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권위를 두고자 하는 ‘성경권위 주기 운동’이었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접할 수 있게금 하는 데 강조를 두었다. 처음에는 위클리프(Wyclife)가 이런 원칙의 대표적 주창자였으나, 그후 루터(Luther), 틴데일(Tyndale), 그리고 그밖의 인물들이 성경을 서민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수행해왔다.10)
그러므로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의 사상과 삶”(Prortestantism)에 속하나 루터주의(Luthernism) 및 영국교회주의(Anglocation)와 구분되며 동시에 소위 급진주의와도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종교개혁의 신학(들)은 말씀의 신학이다.11)
2) 구(舊) 프린스턴 신학
이러한 16세기 개혁신학은 두 가지의 큰 지류(支流)를 형성한다. 첫째로 유럽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은 주로 화란을 중심으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에 의하여 그 신학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의 개혁주의적 신학전통은 미국 이민자들에 의해서 미시간 주에 있는 칼빈 신학교(Calvin seminary)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두 번째로 영국으로 건너간 개혁주의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faith confession)을 근간으로 하여 널리 보편화 되었으며, 영국에서 종교적 자유를 찾아 미국이란 새로운 세계로 이민자들을 주축으로 1706년에 미국 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1812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두 지류 중에서 한국 개혁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구(歐) 프린스턴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프린스턴 신학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한국 초기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Chares Hodge)와 워필드(B. B. Warfield)를 중심으로 하여 어떻게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교리가 발전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말씀의 신학’을 계승한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은 응당(應當) 종교개혁자들의 입장과 동일하다. 이들은 이전의 종교개혁자들보다는 더욱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성격을 띄게 되며,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프린스턴 신학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으나, 이들이 성경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강하게 고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 때문이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를 잣대로 하여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인간들이 편집한 한낱 문학서적으로 취급한다.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으로 대변되는 역사비평학적 방법은 기존의 해석방법,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정확무오하고 오류가 없다”라고 하는 전통적인 입장을 배격한다.
이들은 성경의 몇몇 책이나 혹은 모든 책들은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저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며 성경은 통일된 책이 아니라 단지 여러 단편적인 문서들이 합쳐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12)
또한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들, 즉 예수의 물 위를 걸으심, 이적, 신유 등을 부인한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과 부활까지도 부인하거나 재해석된다. 이러므로 당연히 프린스턴 신학은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염으로부터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김의환은 “프린스턴 신학의 주축(主軸)은 성경 영감설에 있었다”13)라고 지적한다.
프린스턴 신학의 대명사인 찰스 핫지(Chares Hodge)의 신학은 그의 축자 영감설(verval in spiration)14)에 근거한 성경관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성경의 체계적 학문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언어를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15)
또한 핫지의 뒤를 이어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파괴하는 자유주의에 맞서 일생 변증학자로 알려진 워필드는 강하게 축자 영감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는 “성경 기록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아주 특별하고 초자연적이며 독특한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기록했다. 그리고 성경 기록자들의 인간적인 요소에 제한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셨으므로 성경 기자들의 말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오류가 없다”16)라고 말을 했다.
이러한 프린스턴 신학의 성경에 대한 입장은 고스란히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개혁주의 성경관에 그대로 이식(移植)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 무오성과 축자 영감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역설했던 프린스턴 신학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적인 단회성을 주장하고, 이적과 신유와 능력은 사도교회 이후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은사 종료설’(Cessation Theory)을 지지했다. 따라서 성령의 현재적 역사로 말미암은 방언, 신유, 예언들은 현재에는 사라진 것으로 취급한다.
특히 워필드는 그의 저서 『거짓 이적』(Counterfeit Miracles)의 “은사의 중단”(The Cessation of the Charismata)이란 제목의 첫 장에서 “이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들로서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분명히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17)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프린스턴 신학의 은사 종료설은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 그리고 제3의 바람과 같은 비슷한 능력사역을 수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죄하고 오히려 그들을 이단시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3)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 개혁주의에 미친 영향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신학 운동의 주류(主流)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다. 개혁신학은 16세기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이어받아 계승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신학사조를 지칭한다.
개혁신학이 한국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동기는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한국의 초기 신학사상이란 실제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평양신학교의 교장이었던 마포 삼열(Samuel A. Moffett), 곽안련(Charles A. Clark), 이눌서(W. D. Reynold), 구레인(J. C. Crane) 등은 칼빈주의자였다.18)
이중에서도 특히 곽안련은 한국 교회사에서 칼빈주의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한 신학자였다. 그는 1902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그후 그는 다시 시카고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 선교사였으며 한국어로 50권, 영어로 6권을 저술한 다작가로 저술 범위는 한국 교회의 필요에 따라 다방면으로 펼쳐졌다.19)
1893년에서 1901년까지 내한한 40명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중 16명이 프린스턴 신학교20) 출신이고 11명이 맥코믹 신학교(McCormic Seminary) 출신이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적인 신학배경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신앙 윤리적으로 청교도적인 특성을 가진 자들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미국 장로교 외지 선교부의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은 “그들은 한결같이 청교도적인 신앙이었으며, 안식일을 지키고, 춤이나 흡연이나 카드놀이를 죄악시했다. 재림론에 있어서는 전천년설(前千年說)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고등 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단정했다21)
또한 이들의 신학적 입장은 1907년에 한국 장로교회가 채택한 12신조에도 잘 나타난다. 이 신조는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신경을 채택한 것이다. 이 신조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유일하신 하나님의 성품,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사역,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인간의 타락과 원죄,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과 구원의 적용, 하나님의 예정과 원죄, 성례론, 성도의 건전한 신앙생활의 의무, 성도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22) 등이다.
이에 대하여 이종성은 이 신조가 “강한 칼빈주의적인 특색”23)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그와는 조금 다르게 이 신조가 복음주의적 영향 때문에 개혁주의적 내용이 많이 희석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4)
비록 이 신조의 신학적 성격에 대하여 이견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칼빈주의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조의 제일 첫머리에 나와 있듯이, 성경 무오성이 한국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에 기여한 공(功)이 많으나 또 다른 면에서는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은 한국 목사들을 통하여 좀 더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율법주의와 독선적인 분리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25)는 것이다. 이러한 경직된 성경관은 필연적으로 세계 교회사 중 유례 없이 수많은 교파로 나누게 하는 분열의 씨를 제공하고 만다.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이 칼빈주의였기에 당연히 한국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의 일변도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신복윤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이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구현된 신학, 즉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 하겠다”26)라고 평가한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틀을 형성한 박형룡과 그의 신학
이러한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이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고스란히 이어온 인물이 바로 박형룡이다. 박형룡은 한국 개혁주의의 교의 신학적인 틀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박형룡에 의해서 한국 개혁주의 신학은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서 있어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국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사에 미친 영향력을 살펴보고 이들의 공과(功過)를 고찰해 볼 것이다.
①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기초로 한 박형룡 신학
박형룡을 제외하고 한국 개혁주의 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동식은 박형룡을 평하기를 “무너지지 않는 보수주의적 정통신학의 보루를 이루고 있는 이”27)라고 했다.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 또한 박형룡을 한국 보수 신학계의 대표자로 지적한 바 있다.28)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보수주의 신학의 씨를 뿌렸고 박형룡은 이를 가꾸어서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을 세운 사람이었다.29)
박형룡이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신학분과는 바로 교의신학(敎義神學)이다. 그는 한국 신학 사상 처음으로 『敎義神學』을 7권으로 엮어 낸 신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가 집필한 교의신학은 분량면에서 지금에 와서도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한국 보수주의 교리신학의 독보적(獨步的)인 인물인 것이다. 그가 교의신학을 집필한 이유는 무엇을 새롭게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전해준 개혁주의 신학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역시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에 지나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아는 것이 적은 탓이지만 또한 본의에 맞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의 본의는 칼빈주의 개혁파 전통 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팔십 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그가 신학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하고 수성(守成)하는 데 있다. 환언하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모든 가톨릭의 제도와 의식에서 나오는 일체의 권위를 배격하고 오직 참된 권위는 성경에 있음을 주장했고, 이러한 개혁신학을 이어온 프린스턴 신학은 역시 동일하게 핫지와 워필드에 의해서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이 더욱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교리화되어 갔다.
응당 이러한 프린스턴 신학의 영향을 받은 박형룡과 한국 보수주의 신학 역시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한다.31) 박형룡은 그의 축자 영감설을 워필드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성경의 완전 영감의 교회적 교리는 성경이 그것의 모든 요소들이, 신비(神秘)로써 또는 이성(理性)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 신앙과 실행과 함께 역사와 과학의 사건들, 사상과 함께 단어들이 다 같이 부분적으로 아니고 완전히 영감(靈感)되었다고 하는 교리다(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p. 113). 이는 축자영감설을 포함한 완전영감의 정의로서 훌륭하다32)
박형룡은 성경이 무오하며 “단어들이 다 같이 부분적으로 아니고 완전히 영감 되었다”고 믿고 주장하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초자연적인 이적들 예컨대 신유, 축사, 방언 등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만약 그가 주장한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아니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그가 주장했다면 그와 동일하게 성령의 은사, 신유, 방언, 축사 등 ‘하나님의 나타나심’(Theophany)에 대하여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축자 영감설은 보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만약 하나님이 개인의 특성이나 개성을 무시하고 로봇처럼 받아쓰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에서도 바울 신학, 요한 신학, 누가 신학이라는 말이 이를 반증해 주듯이 하나님은 기록자들의 성품, 환경, 개성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특성대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비록 이러한 박형룡의 극단적인 성경해석학적 입장이 한국 교회사에 기여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이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종성은 이러한 박형룡의 패쇄적인 신학에 대하여 일침을 가한다.
여기에 박형룡 신학의 대표적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70년 전 또는 80년 전에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신학에 대하여 70∼80년 후에 와서도 그 신학이 어떠한 신학이었던가 검토하거나 평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받아 그것을 영구히 보존하고 새 세대에 전달하려는 것이 신학자로서의 그의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신학의 동결 또는 고사를 의미한다33)
5) 개혁주의 신학과 박형룡의 신학의 한계점
박형룡의 신학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것은 바로 성령론이다. 그 이유는 그의 교의신학 체계는 미국 미시간 주(州)에 있는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벌코프(Louis Berkhof)의 신학체계를 고스란히 답습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교의신학 전집은 그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벌코프의 교의신학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벌코프는 20세기 중엽까지 미국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친 신학자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신학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일한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총신대의 김의환은 “그의 조직 신학에서 성령론 취급은 지극히 미흡하다. 카이퍼의 성령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반론이라도 전개하면서 신론, 기독론과 함께 비중있게 취급했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오늘날 성령론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는 현실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성령론 취급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34)라고 평하였다.
비단 벌코프만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벌코프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브라함 카이퍼나 바빙크 역시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특히 카이퍼의 성령론은 현재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전(前) 총신대 총장 차영배에 의해서도 강도 있게 비판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이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 세계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모든 그룹들이 안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게 된 이유를 이종성은 이렇게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초대교회가 기독론 형성에 많은 관심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 성령에 관한 연구에는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중세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아 스콜라신학을 발전시킨 결과 역시 성령론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개혁자들이나 그들의 후계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매우 성서적이었으나 성령론에 관한 장을 가지지 않았다. 개혁교회 신학은 이러한 전통에 따라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였다35)
성령론의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전개한 박형룡 신학에서도 이와 동일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박형룡은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인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특별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주어졌던 것으로 교회시대에 중단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했다.”36)
또한 이러한 박형룡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혁주의 신학자들 역시 성령론을 소홀히 취급하였고 급기야 성령으로 말미암은 방언의 은사로 대표되는 한국 교회사의 오순절 운동과 신유와 축사들을 동반한 은사주의 운동들은 이단시 되거나 백안시 되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전(前) 총신대의 차영배 교수, 전(前) 고신대의 안영복 교수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으나 아직 그의 여파는 미미한 실정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패쇄적인 성경해석학적 입장과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은 한국 교회사에 일어난 일련의 신앙부흥 운동,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들을 정죄하게 된다. 결국 한국 교회는 오직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만을 주장하며 일체의 신앙체험을 등한시 하는 흐름과 성령의 말미암은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 운동과 방언, 신유 등 이적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이 상생(相生)하지 못하고 제각기 자기의 길만을 고집하게 된다.
Ⅲ. 결 론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구원에 국한시키기에 오순절 운동을 위시한 ‘능력 신학’을 수용할 수 없는 절음발이 신학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이 단회적이며,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종료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함으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시 하거나 백안시 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칼빈주의 신학의 바운더리(Boundary)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를 알면서도 개혁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은 개혁 되었기에 개혁 되어야 한다”라는 그들의 신학의 원리마저도 망각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석화된 한국교회 상황에서 태동된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은 객관적인 진리와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조화시키려는 ‘진리회복 운동’이며 ‘신본주의적 성령 운동’이다. 구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구원의 복음,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 오직 아들에 대한, 아들에 의한, 아들을 위한 신본주의적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에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으나 그 중심에는 성경을 닮고자 하는 ‘성경닮기 운동’이 있다. 베뢰아 운동은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론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교리보다 예수를, 신학보다 성령을, 주석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운동인 것이다.
신학은 변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다. 신학은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그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한국교회는 예수보다는 교리를, 성령보다는 신학을, 성경보다는 주석에 더 관심이 있지 않은가!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이란 ‘말씀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의 살 길이다.
주)
1) 베뢰아 운동의 창시자인 김기동 목사가 최근 들어서 쓰고 있는 환언(還言) 운동이라는 신학적 술어는 180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환원 운동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환원 운동의 중요한 두 가지의 주장은 “성서로 돌아가자,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하며, 성경이 명명하는 것에 따라서 명명하며 성경이 행하는 방법에 따라 행하자”이다. M. H. Tucker, Restoration Them and Now, 김익진 역(도서출판태광, 1987), p. 309. 다시 말하면 환원 운동은 원래로 돌아가자는 뿌리 운동이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환언 운동’이라는 것은 ‘현대 신학과 교리, 그리고 헌법으로부터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김기동 목사와 베뢰아 운동의 기본 방향을 일컫는다.
2) 여기에서 말하는 ‘백지상태’(Tabula Losa)란 성경을 대함에 있어서 어떠한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나 경험, 세계관을 가능한한 완전히 배제하고 성경과 독자(讀者) 사이에 존재하는 해석학적 다리(heremeneutical bridge)의 간격(gap)을 최대한 줄임으로 성경 저자와 동일한 영감(Inspiration)의 수준으로 보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E. 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길현모 역 (서울: 탐구신서, 1976), p. 8. 19세기의 역사학자 랑게(Ranke)는 “그것이 진정 어떠하였는가?”(wie es eingentlich gewesen)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비록 이 용어가 신학적 술어(Theological Terminology)는 아니지만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경을 그대로 믿고, 성경을 닮고자 하는 베뢰아 운동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필자가 주관적으로 인용해 보았다.
4) 최석,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새로운 지평으로서의 베뢰아 운동”, (서울침례신학교, 신학석사학위논문, 1991), p. 45.
5) 간하배, “한국 신학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Korea Theology of the Protestant Church Ⅱ), 『神學指南』, (1968년 봄호), p. 135.
6) “흔히 칼빈주의(Calvinism)는 개혁주의(Reformed)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약간의 개념상의 차이는 있다. 16세기 칼빈의 사상을 칼빈주의라고 했다면, 개혁주의라는 말은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 곧 스위스의 개혁운동을 독일에서의 루터의 그것과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상규,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칼빈신학의 흐름을 평가한다”, 『목회와 신학』, (1996년 9월호), p. 62.
7) Paul Enns, 『알기 쉽게 간추린 신학 핸드북』 최치남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4), p. 579.
8) Ibid., p. 588.
9) Loc. cit.
10) Laird R. Haris, 『성경이란 무엇인가』 이승호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5), p. 16.
11) 박건택,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神學指南』, 제65권, (1998년 겨울호), p. 191.
12) Ibid., p. 113.
13) 김의환, 『현대신학개설』 (3판; 서울 :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p. 192.
14)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받아쓰기 이론’, ‘구술 이론’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현재 보수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자들을 이성이나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로봇처럼 받아서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기록자들은 개성과 영감에 따라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신학에서도 바울신학, 요한신학, 누가신학 등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5) Ibid., p. 88.
16)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ited by Samuel G. Craig (London, 1959), p. 421.
17) B. B. Warfield, 『기독교 기적론』 이길상 역 (재판; 서울: 나침반사, 1989), p, 12.
18) 이상규,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칼빈신학의 흐름을 평가한다”, 『목회와 신학』, (1996년 9월호), p. 63.
19) 김의환, “한국 교회 신학의 역사적 조명”,『神學指南』, 제65권, (1998년 겨울호), p. 13.
20) 특히 아치볼드 알레산더(Archbald Alexsander), 찰스 핫지(Chares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로 이어지는 프린스톤 신학교는 ‘칼빈주의’라는 신학적 단일성을 미국에서 고스란히 이어온 신학교이다.
21) A, J. Brown, The Master of the Far Easter (Scribners, 1919), p. 540. 이상규,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神學正論』, 제10권 (1992년 봄호), p, 116에서 재인용.
22) 김의환, op, cit., p. 11.
23) 이종성, 『신앙과 신학』 (한국기독교학술원, 논총 제1집, 1996), p. 121.
24) 김영재, 『교회와 신앙고백』 (서울: 성광문화사), p. 148.
25) 김양선, 『韓國基督敎史硏究』, 김영재, 『한국 교회사』 (재판;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p. 149에서 재인용.
26) 신복윤,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神學指南』, 제10권, (1992년 봄호), p. 115.
27) 유동식, 『韓國神學의 鑛脈』(재판; 서울: 전망사, 1986), p, 186.
28)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ical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Part, Ⅱ, p. 149. 김의완, 『현대신학개설』 (3판;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p. 238에서 재인용.
29) 유동식, op. cit., p. 187.
30) 박형룡, 『敎義神學』, 제1권 序論.
31) 유동식, op. cit., p. 188.
32) 박형룡, 『교의학』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원, 1981), p. 330.
33)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서울 :양서각, 1983), p. 197.
34) 김의환, op. cit., p. 115.
35) 이종성, “개혁신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長神論壇』, 제3집, 1991년, p. 80.
36) 김명혁, 『한국 교회 쟁점진단』 (서울 : 규장문화사, 1998), p. 123.
백 종 호
백종호/ 1971년생·대림대학 공업경영과 졸·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B. A.)·서울침례신학연구원 졸(M. Div.)·베뢰아대학원대학교 신약학(Th. M.) 재학 중·베뢰아아카데미 29기 수료
Ⅰ. 서 론
베뢰아 운동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진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진리회복 운동”이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還言) 운동’1)이다. 그와 동시에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따르는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본주의적 성령 운동’이다. 말씀과 성령, 이성과 신앙, 합리론(合理論)과 신앙론(信仰論)이라는 서로 다른 신앙 방법론들이 충돌하지 않으며 새로운(brand-new) 어울림을 창출해 내는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전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칼비니즘(Calvinism)과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will)를 강조하는 알미니안니즘(Arminanism)이 베뢰아 운동에서는 전혀 충돌하지 않고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베뢰아 운동이 ‘열린 구조’(open-structure)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기반이 바로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를 지지하고 인정하고 있기에 베뢰아 운동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극단적 합리론(radical rationalism)에 치우치지 아니하며, 신앙의 합리론을 도외시한 채 체험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mysticism)의 위험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러나 이 땅에 예수복음이 들어온 이래로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일련의 신학과 성령 운동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말씀만을 강조하는 그룹들은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인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고스란히 고수하려는 교리적인 신학으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말씀과 신학을 등한시한 채, 성령의 현재적 사역만을 인정하는 그룹들은 신비주의와 일반 무속처럼 변질되는 것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는 말씀만을 강조하고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칼빈신학을 고수하려고 했던 한국의 신학을 살펴보고, 한국 교회와 신학에 미친 공과(功過)를 살펴 볼 것이다.
Ⅱ. 본 론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국 신학’이란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대화를 시도한 토착화 신학을 말한다. 즉 ‘성’(誠)을 신학의 핵심으로 이해하여 신학을 전개한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과 민중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다루는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같은 토착화 신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한국 신학’(Korea Theology)은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고 복음적이어야 하며 보편성이 있는 ‘한국 신학’을 말하고자 한다.
보편성은 모든 학문의 기본 전제가 된다. 더욱이 신학과 말씀은 만인에게 열려있어야 하는 당위(當爲)가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신학이라고 알려진 ‘민중신학’이나 ‘성(誠)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한국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두었기에 보편성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계시에 의존하지 않기에 이미 예수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신학을 굳이 명명한다면 ‘반-진리(半-眞理)의 신학’(Theology of the half-Truth)이며 ‘상황 신학’(situation Theology)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일견하여 이들의 신학은 ‘한국 신학’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적용되는 ‘한국적인 신학’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 신학이 존재한다면 외국에서 수입된 서구 신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화란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 마지막으로 미국 구(舊) 프린스턴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의 반동으로 일어났던 프린스턴 신학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순수하게 자라난 신학 운동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수입된 신학은 대부분 성경에 대한 입장에 따라서 신학적 견지를 달리한다. 성경을 칼빈주의라는 교리로 보고자 하는 개혁주의, 그와는 다르게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자유주의, 성경 자체(Text)보다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성경을 재해석하는 민중신학으로 구별된다.
전술한 신학방법론과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말씀임을 믿고 순종함으로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회복하려고 하는 새로운 운동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은 종전에 해왔던 방법론을 탈피하여 성경을 백지상태(白紙狀態, Tabula Losa)2)에서 있는 그대로(wie es eingentlich gewesen)3) 보고자 하는 신사적인 “성경닮기 운동”이다. 이러한 신학방법론에 따라 최석은 ‘교리 중심 신학’, ‘상황 중심 신학’, ‘성서 중심 신학’으로 구별한다.4)
이와 같이,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신학 운동들이 각기 상이한 길을 걷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을 어떠한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한국 교회사에 일어났던 다양한 신학 운동들을 살펴보고 이들이 안고 있는 한계를 지적할 것이다.
1. 한국 교회사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운동
한국 신학은 주로 독일, 미국에서 이식된 수입신학이 주(主)를 이룬다. 주로 독일에서는 자유주의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와 급진주의 신학이 들어왔고, 미국으로부터는 프린스턴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수입되었다. 이렇게 수입된 신학 중에서 한국 교회사에 가장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바로 지금 다루고자 하는 개혁주의 신학이다.
비록 개혁주의가 바리새적이고, 사변적이며, 문자는 있으나 생명이 없는 교리 중심적인 신학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으나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신학과 신앙 운동에 미치는 아름다운 전통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성경 중심적인 신앙생활,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열정적인 전도 생활 등 이러한 유산들은 대부분이 초기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수입된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기여한 부분이다. 우리는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로부터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켰던 것과 그로 말미암아 얻어진 성경 무오성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한국 교회의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 간은 정통신학의 고수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만한 이유를 바로 이 성경관에서 찾고 있다.5)
따라서 이 장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구 프린스턴 신학에 대하여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성경에 대한 입장과 해석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회복하고자 하는 환언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이 회복한 진리가 무엇이며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1) 개혁주의 신학의 일반적 개괄
한국 교회사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만큼 한국 교회사에 개혁주의 신학이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개괄적으로 개혁주의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대부분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에서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6) 그러나 구미(歐美)에서는 개혁주의라는 말보다는 칼빈주의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영어나 화란어에는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단지 ‘개혁된’의 의미로 ‘Reformed’, ‘Gereformeed’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한국 교회의 정서상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를 동의어로 쓰고자 한다.
우리가 한국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개혁주의 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질문해야 하는 본질적인 물음은 “무엇이 개혁주의인가?”라는 것이다. ‘개혁’(Reform)은 말 그대로 기존의 어떤 체제나 제도에서 합법적이고 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쳐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라는 신학적 술어는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용어이지만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있기에 오히려 칼빈주의보다는 개혁주의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사료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개혁주의는 중세시대에 부패한 가톨릭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구호를 내걸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of faith)의 교리를 확립시켰던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신학사조(神學思潮)를 지칭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은 조금씩 달랐으나 성경에 대한 견해는 거의 일치한다. 개혁자들은 교황, 교회 회의, 면죄부라는 화석화된 제도와 의식에서 나오는 가톨릭의 권위에서 ‘오직 성경’에 권위를 두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 운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만인에게 성경을 돌려주고자 했던 ‘성경 되찾기 운동’이 바로 종교개혁의 중심이다.
루터(M. Luther)는 “신앙의 조항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정립되어야만 하며, 다른 그 어느 것도 심지어 천사라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7)라고 말했다. 또한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바로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또한 쯔빙글리는 가톨릭의 모든 권위보다 오직 절대적인 권위를 성경에 두었으며 성경 무오성에 대하여도 인정하였다.
개혁가로서 그의 활동은 한 가지 원칙 위에서 이루어졌다. … 그 원칙이란 모든 논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항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였으며, 로마 가톨릭이든 루터파든 제세례파든 모든 반대자들을 성경에 의거해 물리치고자 하였다. 루터 못지 않게 그도 말씀의 신학과 말씀의 교회를 원하였다8)
16세기의 성경 주석의 왕이며 진정한 해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칼빈은 “모든 성경을 하나의 예외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규정하였다.”9)
이처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은 이전의 가톨릭에 비해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결국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 가톨릭으로 빼앗겼던 성경을 모든 만인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성경 회복 운동’이었고 성경 이외의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권위를 두고자 하는 ‘성경권위 주기 운동’이었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접할 수 있게금 하는 데 강조를 두었다. 처음에는 위클리프(Wyclife)가 이런 원칙의 대표적 주창자였으나, 그후 루터(Luther), 틴데일(Tyndale), 그리고 그밖의 인물들이 성경을 서민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수행해왔다.10)
그러므로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의 사상과 삶”(Prortestantism)에 속하나 루터주의(Luthernism) 및 영국교회주의(Anglocation)와 구분되며 동시에 소위 급진주의와도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종교개혁의 신학(들)은 말씀의 신학이다.11)
2) 구(舊) 프린스턴 신학
이러한 16세기 개혁신학은 두 가지의 큰 지류(支流)를 형성한다. 첫째로 유럽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은 주로 화란을 중심으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에 의하여 그 신학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의 개혁주의적 신학전통은 미국 이민자들에 의해서 미시간 주에 있는 칼빈 신학교(Calvin seminary)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두 번째로 영국으로 건너간 개혁주의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faith confession)을 근간으로 하여 널리 보편화 되었으며, 영국에서 종교적 자유를 찾아 미국이란 새로운 세계로 이민자들을 주축으로 1706년에 미국 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1812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두 지류 중에서 한국 개혁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구(歐) 프린스턴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프린스턴 신학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한국 초기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Chares Hodge)와 워필드(B. B. Warfield)를 중심으로 하여 어떻게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교리가 발전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말씀의 신학’을 계승한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은 응당(應當) 종교개혁자들의 입장과 동일하다. 이들은 이전의 종교개혁자들보다는 더욱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성격을 띄게 되며,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프린스턴 신학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으나, 이들이 성경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강하게 고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 때문이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를 잣대로 하여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인간들이 편집한 한낱 문학서적으로 취급한다.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으로 대변되는 역사비평학적 방법은 기존의 해석방법,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정확무오하고 오류가 없다”라고 하는 전통적인 입장을 배격한다.
이들은 성경의 몇몇 책이나 혹은 모든 책들은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저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며 성경은 통일된 책이 아니라 단지 여러 단편적인 문서들이 합쳐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12)
또한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들, 즉 예수의 물 위를 걸으심, 이적, 신유 등을 부인한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과 부활까지도 부인하거나 재해석된다. 이러므로 당연히 프린스턴 신학은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염으로부터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김의환은 “프린스턴 신학의 주축(主軸)은 성경 영감설에 있었다”13)라고 지적한다.
프린스턴 신학의 대명사인 찰스 핫지(Chares Hodge)의 신학은 그의 축자 영감설(verval in spiration)14)에 근거한 성경관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성경의 체계적 학문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언어를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15)
또한 핫지의 뒤를 이어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파괴하는 자유주의에 맞서 일생 변증학자로 알려진 워필드는 강하게 축자 영감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는 “성경 기록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아주 특별하고 초자연적이며 독특한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기록했다. 그리고 성경 기록자들의 인간적인 요소에 제한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셨으므로 성경 기자들의 말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오류가 없다”16)라고 말을 했다.
이러한 프린스턴 신학의 성경에 대한 입장은 고스란히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개혁주의 성경관에 그대로 이식(移植)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 무오성과 축자 영감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역설했던 프린스턴 신학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적인 단회성을 주장하고, 이적과 신유와 능력은 사도교회 이후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은사 종료설’(Cessation Theory)을 지지했다. 따라서 성령의 현재적 역사로 말미암은 방언, 신유, 예언들은 현재에는 사라진 것으로 취급한다.
특히 워필드는 그의 저서 『거짓 이적』(Counterfeit Miracles)의 “은사의 중단”(The Cessation of the Charismata)이란 제목의 첫 장에서 “이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들로서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분명히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17)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프린스턴 신학의 은사 종료설은 한국 교회사에 나타나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 그리고 제3의 바람과 같은 비슷한 능력사역을 수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죄하고 오히려 그들을 이단시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3)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 개혁주의에 미친 영향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신학 운동의 주류(主流)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다. 개혁신학은 16세기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이어받아 계승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신학사조를 지칭한다.
개혁신학이 한국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동기는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한국의 초기 신학사상이란 실제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평양신학교의 교장이었던 마포 삼열(Samuel A. Moffett), 곽안련(Charles A. Clark), 이눌서(W. D. Reynold), 구레인(J. C. Crane) 등은 칼빈주의자였다.18)
이중에서도 특히 곽안련은 한국 교회사에서 칼빈주의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한 신학자였다. 그는 1902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그후 그는 다시 시카고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 선교사였으며 한국어로 50권, 영어로 6권을 저술한 다작가로 저술 범위는 한국 교회의 필요에 따라 다방면으로 펼쳐졌다.19)
1893년에서 1901년까지 내한한 40명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중 16명이 프린스턴 신학교20) 출신이고 11명이 맥코믹 신학교(McCormic Seminary) 출신이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적인 신학배경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신앙 윤리적으로 청교도적인 특성을 가진 자들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미국 장로교 외지 선교부의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은 “그들은 한결같이 청교도적인 신앙이었으며, 안식일을 지키고, 춤이나 흡연이나 카드놀이를 죄악시했다. 재림론에 있어서는 전천년설(前千年說)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고등 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단정했다21)
또한 이들의 신학적 입장은 1907년에 한국 장로교회가 채택한 12신조에도 잘 나타난다. 이 신조는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신경을 채택한 것이다. 이 신조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유일하신 하나님의 성품,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사역,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인간의 타락과 원죄,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과 구원의 적용, 하나님의 예정과 원죄, 성례론, 성도의 건전한 신앙생활의 의무, 성도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22) 등이다.
이에 대하여 이종성은 이 신조가 “강한 칼빈주의적인 특색”23)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그와는 조금 다르게 이 신조가 복음주의적 영향 때문에 개혁주의적 내용이 많이 희석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4)
비록 이 신조의 신학적 성격에 대하여 이견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칼빈주의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조의 제일 첫머리에 나와 있듯이, 성경 무오성이 한국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에 기여한 공(功)이 많으나 또 다른 면에서는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은 한국 목사들을 통하여 좀 더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율법주의와 독선적인 분리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25)는 것이다. 이러한 경직된 성경관은 필연적으로 세계 교회사 중 유례 없이 수많은 교파로 나누게 하는 분열의 씨를 제공하고 만다.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이 칼빈주의였기에 당연히 한국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의 일변도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신복윤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이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구현된 신학, 즉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 하겠다”26)라고 평가한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틀을 형성한 박형룡과 그의 신학
이러한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이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고스란히 이어온 인물이 바로 박형룡이다. 박형룡은 한국 개혁주의의 교의 신학적인 틀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박형룡에 의해서 한국 개혁주의 신학은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서 있어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국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사에 미친 영향력을 살펴보고 이들의 공과(功過)를 고찰해 볼 것이다.
①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기초로 한 박형룡 신학
박형룡을 제외하고 한국 개혁주의 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동식은 박형룡을 평하기를 “무너지지 않는 보수주의적 정통신학의 보루를 이루고 있는 이”27)라고 했다.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 또한 박형룡을 한국 보수 신학계의 대표자로 지적한 바 있다.28)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보수주의 신학의 씨를 뿌렸고 박형룡은 이를 가꾸어서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을 세운 사람이었다.29)
박형룡이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신학분과는 바로 교의신학(敎義神學)이다. 그는 한국 신학 사상 처음으로 『敎義神學』을 7권으로 엮어 낸 신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가 집필한 교의신학은 분량면에서 지금에 와서도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한국 보수주의 교리신학의 독보적(獨步的)인 인물인 것이다. 그가 교의신학을 집필한 이유는 무엇을 새롭게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전해준 개혁주의 신학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역시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에 지나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아는 것이 적은 탓이지만 또한 본의에 맞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의 본의는 칼빈주의 개혁파 전통 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팔십 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그가 신학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하고 수성(守成)하는 데 있다. 환언하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모든 가톨릭의 제도와 의식에서 나오는 일체의 권위를 배격하고 오직 참된 권위는 성경에 있음을 주장했고, 이러한 개혁신학을 이어온 프린스턴 신학은 역시 동일하게 핫지와 워필드에 의해서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이 더욱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교리화되어 갔다.
응당 이러한 프린스턴 신학의 영향을 받은 박형룡과 한국 보수주의 신학 역시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한다.31) 박형룡은 그의 축자 영감설을 워필드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성경의 완전 영감의 교회적 교리는 성경이 그것의 모든 요소들이, 신비(神秘)로써 또는 이성(理性)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 신앙과 실행과 함께 역사와 과학의 사건들, 사상과 함께 단어들이 다 같이 부분적으로 아니고 완전히 영감(靈感)되었다고 하는 교리다(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p. 113). 이는 축자영감설을 포함한 완전영감의 정의로서 훌륭하다32)
박형룡은 성경이 무오하며 “단어들이 다 같이 부분적으로 아니고 완전히 영감 되었다”고 믿고 주장하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초자연적인 이적들 예컨대 신유, 축사, 방언 등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만약 그가 주장한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아니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그가 주장했다면 그와 동일하게 성령의 은사, 신유, 방언, 축사 등 ‘하나님의 나타나심’(Theophany)에 대하여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축자 영감설은 보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만약 하나님이 개인의 특성이나 개성을 무시하고 로봇처럼 받아쓰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에서도 바울 신학, 요한 신학, 누가 신학이라는 말이 이를 반증해 주듯이 하나님은 기록자들의 성품, 환경, 개성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특성대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비록 이러한 박형룡의 극단적인 성경해석학적 입장이 한국 교회사에 기여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이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종성은 이러한 박형룡의 패쇄적인 신학에 대하여 일침을 가한다.
여기에 박형룡 신학의 대표적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70년 전 또는 80년 전에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신학에 대하여 70∼80년 후에 와서도 그 신학이 어떠한 신학이었던가 검토하거나 평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받아 그것을 영구히 보존하고 새 세대에 전달하려는 것이 신학자로서의 그의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신학의 동결 또는 고사를 의미한다33)
5) 개혁주의 신학과 박형룡의 신학의 한계점
박형룡의 신학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것은 바로 성령론이다. 그 이유는 그의 교의신학 체계는 미국 미시간 주(州)에 있는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벌코프(Louis Berkhof)의 신학체계를 고스란히 답습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교의신학 전집은 그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벌코프의 교의신학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벌코프는 20세기 중엽까지 미국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친 신학자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신학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일한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총신대의 김의환은 “그의 조직 신학에서 성령론 취급은 지극히 미흡하다. 카이퍼의 성령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반론이라도 전개하면서 신론, 기독론과 함께 비중있게 취급했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오늘날 성령론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는 현실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성령론 취급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34)라고 평하였다.
비단 벌코프만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벌코프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브라함 카이퍼나 바빙크 역시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특히 카이퍼의 성령론은 현재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전(前) 총신대 총장 차영배에 의해서도 강도 있게 비판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이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 세계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모든 그룹들이 안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게 된 이유를 이종성은 이렇게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초대교회가 기독론 형성에 많은 관심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 성령에 관한 연구에는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중세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아 스콜라신학을 발전시킨 결과 역시 성령론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개혁자들이나 그들의 후계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매우 성서적이었으나 성령론에 관한 장을 가지지 않았다. 개혁교회 신학은 이러한 전통에 따라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였다35)
성령론의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전개한 박형룡 신학에서도 이와 동일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박형룡은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인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특별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주어졌던 것으로 교회시대에 중단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했다.”36)
또한 이러한 박형룡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혁주의 신학자들 역시 성령론을 소홀히 취급하였고 급기야 성령으로 말미암은 방언의 은사로 대표되는 한국 교회사의 오순절 운동과 신유와 축사들을 동반한 은사주의 운동들은 이단시 되거나 백안시 되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전(前) 총신대의 차영배 교수, 전(前) 고신대의 안영복 교수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으나 아직 그의 여파는 미미한 실정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패쇄적인 성경해석학적 입장과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은 한국 교회사에 일어난 일련의 신앙부흥 운동,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들을 정죄하게 된다. 결국 한국 교회는 오직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만을 주장하며 일체의 신앙체험을 등한시 하는 흐름과 성령의 말미암은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 운동과 방언, 신유 등 이적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이 상생(相生)하지 못하고 제각기 자기의 길만을 고집하게 된다.
Ⅲ. 결 론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구원에 국한시키기에 오순절 운동을 위시한 ‘능력 신학’을 수용할 수 없는 절음발이 신학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이 단회적이며,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종료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함으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시 하거나 백안시 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칼빈주의 신학의 바운더리(Boundary)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를 알면서도 개혁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은 개혁 되었기에 개혁 되어야 한다”라는 그들의 신학의 원리마저도 망각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석화된 한국교회 상황에서 태동된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은 객관적인 진리와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조화시키려는 ‘진리회복 운동’이며 ‘신본주의적 성령 운동’이다. 구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구원의 복음,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 오직 아들에 대한, 아들에 의한, 아들을 위한 신본주의적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에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으나 그 중심에는 성경을 닮고자 하는 ‘성경닮기 운동’이 있다. 베뢰아 운동은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론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교리보다 예수를, 신학보다 성령을, 주석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운동인 것이다.
신학은 변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다. 신학은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그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한국교회는 예수보다는 교리를, 성령보다는 신학을, 성경보다는 주석에 더 관심이 있지 않은가!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이란 ‘말씀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의 살 길이다.
주)
1) 베뢰아 운동의 창시자인 김기동 목사가 최근 들어서 쓰고 있는 환언(還言) 운동이라는 신학적 술어는 180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환원 운동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환원 운동의 중요한 두 가지의 주장은 “성서로 돌아가자,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하며, 성경이 명명하는 것에 따라서 명명하며 성경이 행하는 방법에 따라 행하자”이다. M. H. Tucker, Restoration Them and Now, 김익진 역(도서출판태광, 1987), p. 309. 다시 말하면 환원 운동은 원래로 돌아가자는 뿌리 운동이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환언 운동’이라는 것은 ‘현대 신학과 교리, 그리고 헌법으로부터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김기동 목사와 베뢰아 운동의 기본 방향을 일컫는다.
2) 여기에서 말하는 ‘백지상태’(Tabula Losa)란 성경을 대함에 있어서 어떠한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나 경험, 세계관을 가능한한 완전히 배제하고 성경과 독자(讀者) 사이에 존재하는 해석학적 다리(heremeneutical bridge)의 간격(gap)을 최대한 줄임으로 성경 저자와 동일한 영감(Inspiration)의 수준으로 보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E. 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길현모 역 (서울: 탐구신서, 1976), p. 8. 19세기의 역사학자 랑게(Ranke)는 “그것이 진정 어떠하였는가?”(wie es eingentlich gewesen)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비록 이 용어가 신학적 술어(Theological Terminology)는 아니지만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경을 그대로 믿고, 성경을 닮고자 하는 베뢰아 운동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필자가 주관적으로 인용해 보았다.
4) 최석,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새로운 지평으로서의 베뢰아 운동”, (서울침례신학교, 신학석사학위논문, 1991), p. 45.
5) 간하배, “한국 신학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Korea Theology of the Protestant Church Ⅱ), 『神學指南』, (1968년 봄호), p. 135.
6) “흔히 칼빈주의(Calvinism)는 개혁주의(Reformed)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약간의 개념상의 차이는 있다. 16세기 칼빈의 사상을 칼빈주의라고 했다면, 개혁주의라는 말은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 곧 스위스의 개혁운동을 독일에서의 루터의 그것과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상규,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칼빈신학의 흐름을 평가한다”, 『목회와 신학』, (1996년 9월호), p. 62.
7) Paul Enns, 『알기 쉽게 간추린 신학 핸드북』 최치남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4), p. 579.
8) Ibid., p. 588.
9) Loc. cit.
10) Laird R. Haris, 『성경이란 무엇인가』 이승호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5), p. 16.
11) 박건택,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神學指南』, 제65권, (1998년 겨울호), p. 191.
12) Ibid., p. 113.
13) 김의환, 『현대신학개설』 (3판; 서울 :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p. 192.
14)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받아쓰기 이론’, ‘구술 이론’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현재 보수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자들을 이성이나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로봇처럼 받아서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기록자들은 개성과 영감에 따라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신학에서도 바울신학, 요한신학, 누가신학 등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5) Ibid., p. 88.
16)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ited by Samuel G. Craig (London, 1959), p. 421.
17) B. B. Warfield, 『기독교 기적론』 이길상 역 (재판; 서울: 나침반사, 1989), p, 12.
18) 이상규,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칼빈신학의 흐름을 평가한다”, 『목회와 신학』, (1996년 9월호), p. 63.
19) 김의환, “한국 교회 신학의 역사적 조명”,『神學指南』, 제65권, (1998년 겨울호), p. 13.
20) 특히 아치볼드 알레산더(Archbald Alexsander), 찰스 핫지(Chares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로 이어지는 프린스톤 신학교는 ‘칼빈주의’라는 신학적 단일성을 미국에서 고스란히 이어온 신학교이다.
21) A, J. Brown, The Master of the Far Easter (Scribners, 1919), p. 540. 이상규,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神學正論』, 제10권 (1992년 봄호), p, 116에서 재인용.
22) 김의환, op, cit., p. 11.
23) 이종성, 『신앙과 신학』 (한국기독교학술원, 논총 제1집, 1996), p. 121.
24) 김영재, 『교회와 신앙고백』 (서울: 성광문화사), p. 148.
25) 김양선, 『韓國基督敎史硏究』, 김영재, 『한국 교회사』 (재판;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p. 149에서 재인용.
26) 신복윤,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神學指南』, 제10권, (1992년 봄호), p. 115.
27) 유동식, 『韓國神學의 鑛脈』(재판; 서울: 전망사, 1986), p, 186.
28)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ical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Part, Ⅱ, p. 149. 김의완, 『현대신학개설』 (3판;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p. 238에서 재인용.
29) 유동식, op. cit., p. 187.
30) 박형룡, 『敎義神學』, 제1권 序論.
31) 유동식, op. cit., p. 188.
32) 박형룡, 『교의학』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원, 1981), p. 330.
33)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서울 :양서각, 1983), p. 197.
34) 김의환, op. cit., p. 115.
35) 이종성, “개혁신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長神論壇』, 제3집, 1991년, p. 80.
36) 김명혁, 『한국 교회 쟁점진단』 (서울 : 규장문화사, 1998),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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