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인가? 침례인가?
세례인가? 침례인가?
윤 찬 수
윤찬수 / 1965년생ㅗ耭榮淪閨?전자공학과 대학원 졸· 배뢰아대학원대학교(M. Div.) 재학 중·베뢰아아카데미 18기 수료
Ⅰ. 서 론
침례는 예수의 피의 공로를 힘입고 주의 이름을 믿어 거듭난 자가 평생 단 한번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신앙을 고백하는 증거로 받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는 복음 증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1)
성경에 나타난 침례는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의 침례와 예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시므로 제정하신 기독교의 침례가 있다.2) 이 사실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요한의 침례와 예수께서 명하신 침례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정의하여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 침례를 그 시대의 것으로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침례의 의미는 단순한 어떤 한 시대에 국한된 상징적인 의식이 아니다. 우리는 침례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속하시고자 창세 이전에 계획된 인간 구속 사역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실제적이요, 절대적인 의식임을 알아야 한다.
본고에서는 침례의 의의와 역사적인 배경, 요한의 침례와 예수의 명하신 침례의 차이 및 침례의 변천 등을 알아보고 침례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자 한다.
Ⅱ. 침례의 의의와 역사적 배경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식이다.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나타내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 것, 즉 의로운 신분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롬 6:3∼11, 골 2:12).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무렵에 제정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 20)고 하신 말씀으로 침례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1. 침례의 의미
“침례” 용어에 대한 그리스어의 어원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예수의 침례를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침수례가 올바른 침례의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침례로 번역된 어휘는 모두 헬라어의 밥토3)()의 변형이다. 침례를 명사로서는 밥티스마()라고 하였는데, ‘물 속에 잠긴다’는 뜻을 갖고 있다. 다른 명사형으로는 ‘물 안에서 씻음’(washing in water)을 뜻하는 밥티스모스4)()가 있다. ‘침례를 주다’라는 원어상의 동사는 밥티조5)()라고 하는데 뜻은 ‘배가 침몰 당한다’는 것으로 전체가 물에 빠져 버리는 것을 뜻한다. 침례를 준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이 말을 사용한다. 즉, 침수례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증거를 알아보면 50가지의 명성 있는 헬라어 사전들이 “침수례”(immersion)가 밥티조의 근본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주전 285년에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Ptolemy)는 팔레스틴의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각 지파에 속해 있는 히브리어 학자들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초청하여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인 70인역 성경이다. 70인역 성경에서 “침례 받다”(baptize)라는 말이 최초로 쓰여지기는 문둥병 환자 나아만의 이야기다. 열왕기하 5장 14절에서 나아만이 7번이나 요단 강에 자기 몸을 담그었다고 하는 것을(바로 자기 자신이 침례 받음을 의미) 읽을 수 있다. 이것으로 “침례 받다”라는 말은 사실상 “침수하다” 또는 “물 속에 빠진다”라는 말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원(語源)상의 의미로 이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권위 있는 신약성서 번역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케네스 웨스트(Kenneth Wuest)는 밥티조라는 말을 “물 속에 빠지다”라는 의미로 사용해서 마태복음 3장 13절을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로 번역했다.
둘째, “속에서”(in)를 뜻하는 에이스()는 마가복음 1장 9절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에 의하여 요단 강 속에서 침례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헬라어에서 전치사 “속에서”(in)라는 말은 “속으로”(into)를 의미한다. 위의 성경구절은 주님이 요한에 의하여 요단 강 속으로 몸이 눕혀짐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침수례의 완전한 모형인 것이다.
셋째, “밖으로”(out of)를 뜻하는 엑크()는 마가복음 1장 10절에서 요한이 주님의 몸을 요단 강 속으로 눕힌 다음 바로 요단 강 밖으로 일으켜 세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가 바로 엑크()였으며 그것은 사실상 “안으로부터 밖으로”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 역시 침수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시 한번 마가복음 1장 9, 10절을 보도록 하자. 이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날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 속에서 요한의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 속으로부터 올라오셨을 때에 그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례는 완전히 물 속에 잠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침례의 유사 의식과 역사적 배경
침례의 기원은 이방인의 정결(purification) 혹은 구약의 결례 혹은 유대종파들의 의식적인 결례들로부터 다양하게 추적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기독교 침례는 요한의 침례가 있은 후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반면에 세례라는 말의 유래를 알아보면, 주후 1311년에 라벤나 공회에서 침례와 세례는 다를 것이 없다는 변론을 했으나 16세기 종교개혁 후까지 약식세례는 공식 의식으로 행하지 못했다. 그 이후 1643년 웨스트민스트 종교회의에서 이 문제를 토의하다가 표결한 결과 24대 24로 동수가 되었는데 이때 의장이었던 라이푸드 박사가 약식세례에 투표함으로 약식세례가 공식 세례로 인정된 것이다.
1) 이방인의 정결
침례는 그 유추가 이방인 중에서도 널리 발견되는 종교적인 상징이었다. 애굽인, 바사인, 인도인 등 모두가 그들의 종교적인 결례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이것들은 헬라와 로마 종교에서 더욱 현저했다. 이들은 때때로 바다에서 목욕하는 형식을 취하거나 물을 뿌림으로 시행했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새로운 출생의 개념이 이와 같은 결례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기독교의 침례가 신비종교들의 유사한 의식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6)
그러나 이러한 기원은 기독교의 침례와 형태조차도 비슷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행한 흔적도 없고 또한 탁월한 신적 영(pneuma)의 영향이 관련된 증거도 없으며, 더욱이 바울이 침례와 결부시킨 죽음과 부활의 개념들은 신비적 의식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7)
2) 구약의 결례
모세의 율법 아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부정을 피하고 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여러 가지 의식적인 정결과 세척의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레 20:25, 26). 아담스(J. E. Adams)는 이러한 구약의 의식적 결례들이 곧 침례라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침례 의식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그 증거로 신약성경 자체가 구약의 결례들을 침례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히 9:10, 요 3:22∼34). 그러나 벌코프(L. Berchof)는 “유대인들은 의식적 결례들과 씻음을 갖고 있었으나 이것은 성례적 성격을 지니지 못했고 그래서 언약의 인침이나 표식들이 아니었다”고 말한다.8)
2. 유대종파의 의식적인 결례
중간기 시대에는 레위기적인 순결의 유구(遺構)가 완전하게 일치되는 결례가 유지되지 못한 반면 결례의 의식은 “성전제사의 입회” 혹은 “봉헌에 대한 의식”의 성격으로 추론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여러 종파에서 결례가 행해졌다. 이 가운데 특히 에세네파와 관련 있는 쿰란 공동체의 결례는 침례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매일 개별적으로 하루 3번씩 씻는 것과 비교할 때 한 번만 받는 침례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9) 또한 이방인 입교자들에 대한 침례도 기독교 침례와 매우 유사하였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입적할 때에는 먼저 할례를 받았고, 후에 침례도 받았다. 그렇지만 이 침례도 다른 결례들과 같은 계열에 있는 일종의 의식적인 씻음이었던 것 같다.
침례는 이러한 씻음과 입회에 대한 의식이라기 보다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으로써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10)
3. 침례의 변천
침례(Baptism)의 성서적인 의미와 원어적인 의미는 침수례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유아침례를 행함에 있어서 이 의식을 간편하고 편리하게 하자는 끊임없는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주후 417년에 카디지 회의에서 유아침례를 법으로 공포함으로 유아들에게 침례를 주게 되었고 이 침례 의식은 점차 세례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와 자유의사에 의해서 침례를 개인적으로 받으려는 참된 순종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대신 부모에 의한 유아침례가 강제로 그들의 신앙고백과는 상관없이 행해지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중세 교회 시대를 암흑기로 몰아 넣었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 지배 시대인 중세시대에도 12C까지 세례 또는 관수례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으로 행해지고 있었고 침수례가 주로 행해져 왔음이 확실하다. ‘물을 붓는 것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인하여 주후 1311년 라벤나 회의에서 침수례와 관수례가 동등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때부터는 ‘예외’가 ‘규정사실’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종교개혁기에 들어와서 가톨릭을 대항하여 개혁자들이 잘못된 성례주의를 반대하고 올바른 교회의 의식(침례와 성찬)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아서 구성된 국교회의 도움이 없이는 가톨릭과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유아세례를 옹호하며 ‘오직 성경만’이라는 그들의 구호를 스스로 짓밟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적인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올바른 침례 의식의 형식을 추구하는 일단의 무리(재침례파, Anabaptist)를 가차없이 죽여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부 과격한 재침례파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나 그들은 소수였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볼 때 성서의 의식을 행할 때 원칙을 저버리고 편법을 행함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핀들리 B. 에즈(Findley B. Edge)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유아세례를 꼽고 있다.11)
<표 1> 성경에 의한 침례와 세례의 비교
Ⅲ. 성경에 나타난 침례
1. 구약에 나타난 침례
1) 노아의 홍수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구약에 나타난 침례에 대한 예표로 노아의 홍수를 들 수 있다. 노아 당시에 영적 존재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이 없는 사람의 딸들과 결혼함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게 되자 하나님은 육체가 되어버린 인류를 멸하시고 영적 존재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을 구원하셨다.
성경은 이것을 바로 침례라고 말한다. 침례는 인간의 죄를 씻거나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침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순복하겠다는 최초의 믿음의 고백이며 증거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2) 출애굽 사건(출 14:21∼3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고전 10:1, 2)
이스라엘 조상들은 구름 기둥과 홍해 도하(渡河)의 경험을 통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독립된 민족으로서 모세의 지도하에 광야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구름 기둥과 홍해의 경험을 성도들이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구원 받은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새 생활을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외적 표시인 침례로 비유한 것이다.
3) 물두멍(출 30:17∼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찌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찌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17∼21)
물두멍은 성전에서 봉사하던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들어진 일종의 큰 세숫대야로서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여 있다. 제사장들이 성소로 출입하기에 앞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손과 발에 묻은 짐승의 피를 씻어 정결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정결 의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기 위함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반드시 지녀야 하는 깨끗한 삶과 성결한 마음의 자세를 상징한다(히 10:22, 벧전 3:21).
2. 신약에 나타난 침례
1) 복음서에 나타난 침례
① 요한의 침례의 의미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 1:29∼31)
요한의 침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인류를 대표하여 주님께 이양시키는 데 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아담으로부터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죄뿐이다. 상속자는 장자로 이어지기에 아담의 장자의 권리가 이스라엘로 이어지고 이스라엘의 장자의 권리가 족보상으로는 요셉에게로 이어지나(대상 5:1),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를 택하신다(민 3:12, 13).
이로써 레위지파는 하나님으로부터 장자를 대신하는 자로 세움을 받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자가 되었다. 나아가서 완전한 제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일을 행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의 침례는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자가 인류의 죄를 모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양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레위 지파요, 그의 아버지는 대제사장이며 또한 그는 태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자다. 또한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율법의 마침이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의 죄를 예수께 이양하는 역할을 침례를 통해서 행하고 있다(눅 1:5∼13; 16:16, 마 11:11).
또한 침례의 의미는 로마서 6장에서 말한 대로 연합을 의미한다. 레위라는 이름의 의미 역시 연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침례를 통해 우리 죄를 주님께 담당시키는 일과 또한 예수를 세상에 드러내어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는 데서 요한의 침례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② 예수께서 받으신 침례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3∼17)
예수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 그러나 이 침례는 요한이 집례한 침례의 의미를 넘어선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한의 침례는 죄인들과 죄 용서를 위한 회개를 나타내는 것이나 예수는 죄인도 아니며 죄를 용서받거나 회개할 필요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침례 요한도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에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말씀하셨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침례 요한은 구약시대에 성막의 일을 하였던 레위 지파다. 마치 그는 제사장이 양의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킨 것처럼 예수께 침례를 베풀어 아담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의 머리에 안수하여 담당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침례 요한이 베푼 침례는 회개의 침례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아사셀 양에게 대제사장이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다 고했듯이 침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어 백성의 죄를 고하게 만들었다. 회개는 곧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6장 1∼5절에 보면 침례는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레위”라는 말 자체도 연합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 되지만, 죄 없으신 예수가 회개의 침례를 받으신 것은 백성이 고한 아담의 죄와의 연합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침례 요한에게 침례 받는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한, 즉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다. 이때부터 고난을 짊어진 고난의 종으로서의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바로 광야로 보내졌고, 아사셀인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으로써 예수는 구약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시고 계신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침례 요한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첫째는 인류를 대표하여 아담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이양시키는 일을 하여 예수의 구속사를 돕고 있으며,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어 공생애를 시작하게 하는 데 그의 사역의 목적을 위임받은 것이다.
결국 예수는 죄 없으신 분이 세상 죄를 요한으로부터 이양받기 위하여 침례를 받으셨으며, 한편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셔야만 하는데 침례를 받으신 것이며 성령이 임하고 인류 구속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12) 즉,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므로 공적인 신분으로서 그 사역의 시작하심을 볼 때 예수께서 침례 받으신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침례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 39)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영적인 삶이고 신령한 삶이다. 침례는 ‘믿는 자는 누구나 침례를 받으라’(막 16:16)는 주님의 명령이다. 하지만 침례를 받는 시기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개혁주의 교회는 침례를 받기 위하여 학습세례나 일정한 과정을 거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며 교리와 헌법에 의해 침례의 과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성경에서의 침례는 믿는 자의 순종의 표이며 믿는 즉시 순종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누구도 성경의 말씀을 초월할 수 없으며 어떠한 교리도 성경보다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침례가 교회 내에서 어떤 계급의 기준이 되거나 믿음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신자의 믿음의 결단이고 예수와 연합된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침례는 믿음이 있는 즉시 행해졌다. 성령을 받은 후 침례를 받기고 하고(행 10:44∼48), 침례를 받은 후 성령을 받기도 하였다(행 8:12∼17). 또한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다음 즉시 침례를 받기도 하였다(행 2:37∼41; 8:34∼38).
중요한 것은 침례를 받는 시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으면 즉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명령으로 들려올 때 즉시 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침례는 어떤 계급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교리로 이용되어서도 안된 것이다. 침례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즉시 순종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다. 이와 같이 사도들은 “침례를 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순종하여 믿는 즉시 침례를 주었음을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침례는 믿는 즉시 받는 것이다.
3) 바울서신에 나타난 침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5)
바울이 사역하던 그 시대에 “구원은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은혜의 복음”을 오해하여 범죄의 기회로 삼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침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임을 강조하여 이들의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고 여기지 않고는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하며 육신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옛 본성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물에서 올라옴으로 예수와 연합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침례가 예수와의 연합임을 강조하고 있다.
4) 베드로 서신에 나타난 침례
베드로는 침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신령한 구원의 표인 침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노아의 홍수는 침례의 “예표”라는 것이다. 노아의 가족은 옛세계가 그 죄 값으로 물 속에서 멸망되었을 때 구원 받아 새세계로 들어갔다. 즉 홍수의 물이 방주를 안전하게 운반한 것처럼 침례도 그리스도인을 옮겨준다는 것이다. 이는 침례를 통하여 몸의 더러움을 씻는 일 즉 단순한 육체의 씻음이 아니라 밝은 양심을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있다.
이와 같이 침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장되고 그의 부활에서 그와 더불어 다시 사는 중생의 표다(롬 6:3∼11). 또한 노아의 방주는 교회의 가장 훌륭한 예표다.
Ⅳ. 침례 의식에 대하여
1. 침례의 대상
첫째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면 다 받을 수 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에게 침례를 베푼 것과(행 8:36, 38) 회당장 그리스보의 가정이 침례 받은 사례(행 18:8)가 좋은 증거다.
둘째로 침례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하고 교회와 교회의 영적 교제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아(幼兒)들에게 이 의식을 베푸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례를 받은 유아가 성장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참예하는 의식에 믿음의 확신이 없는 상태에 있는 유아에게 이 의식을 집행하는 것은 마치 이 의식 자체가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2. 침례의 목적
침례 의식이 구원의 요건은 아니다. 즉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거나 믿은 다음에도 침례 받지 못하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하여 너무도 분명히 강조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강도는 침례 받지 않고도 예수가 계신 곳에 들어갔다.
그러면 왜 침례를 받는가? 침례를 받는 목적은 무엇인가? 침례를 받는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서다. “침례를 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명령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엄숙히 명하신 분부다. 그러므로 몰랐으면 모르거니와 알고서도 침례를 거절할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침례 받는 데까지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다. 침례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시작한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주님께 충성하겠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이 의식에 순종하는 것이다(마 28:19, 20).
3. 침례는 언제 받는가?
침례는 주님의 명령으로 믿는 자는 누구나 순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모신 자는 하루라도 지체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례를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침례를 받는 시기에 관하여 믿는 즉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순절에 회개한 3,000명이 즉시 침례를 받았으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그 날로 침례를 받았다(행 8:30, 39). 그 외에도 바울(행 9:18), 루디아의 집(행 16:15), 빌립보 옥의 간수(행 16:33) 등을 볼 수 있다. 침례는 교리에 의해서 행해져도 안 되고, 어떤 계급의 수단으로 행해져도 안 되는 것이다. 침례는 주님의 명령이며 우리의 신앙 고백이자 주님과 연합된 삶을 의미하는 믿는 자의 체험이다.
4. 집례자(執禮者)
이 의식을 베푼 사람들은 당연히 사도들이었다. 사도들은 오늘날 목사의 직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니 이 의식은 당연히 목사가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한 두 가지의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빌립이 구스 내시에게 이 의식을 베푼 것과 또 아나니아가 바울(당시에는 사울)에게 베푼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는 모두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부근에 성직자가 없었고 또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기름부음 받은 목회자가 집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Ⅵ. 결 론
침례는 주님의 명령이다. 침례는 결코 침례교인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며 또 그러한 권한을 누가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가감할 권한을 주신 적이 없다. 오직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믿으며 가르치고 지킬 뿐이다.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입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복음설교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침례를 통하여 신앙을 고백한다. 성경은 침례에 대하여 확실히 증거하고 있지만 세례는 성경적 증거가 없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침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침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한다.
주)
1) 김기동, 『인자의 날을 위하여』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3), p. 218.
2) Ibid., p. 226.
3) 밥토(bapto)는 희랍어의 기본 동사로서 신약 성서에 3회 나오는데 언제나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눅 16:24, 요 13:26, 계 19:13).
4) 밥티스모스(baptismos)는 신약 성서에서 2회(막 7:4, 히 9:10. 어떤 사본에는 막 7:8에서도 나옴) 나오는데 유대인의 손 씻는 유전(막 7:4), 사람들의 정결 예법(히 9:10), 침례에 관한 교훈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침례가 다른 종교의 씻음과 다름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다(히 6:2).
5) 밥티조(baptizo)는 고대 그리스로부터(히포크라스, 플라톤 등의 철학자) “배가 물에 가라앉다”, “파선되어 물 속에서 고통 당하다”, “물에 빠지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는 80여 회 정도 나오는데 “물에 담그다” “잠기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마 3:11; 20:11, 막 7:4, 눅 3:16, 행 1:5; 11:16, 고전 10:2).
6) 박형룡, 『교의신학 6권』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7), p. 264.
7) 박은규,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 (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신학대학원, 1983), p. 7.
8) Ibid., pp. 7-8.
9) Ibid., p. 8.
10) Ibid., p. 9.
11) 핀들리 B. 에즈, 『기독교의 생명력』 도한호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74), pp. 207-215.
12) 신영길, “뱀의 후손은 누구인가?” 『베뢰아사람』, 20호, (1991년 11월), pp. 22-26.
윤 찬 수
윤찬수 / 1965년생ㅗ耭榮淪閨?전자공학과 대학원 졸· 배뢰아대학원대학교(M. Div.) 재학 중·베뢰아아카데미 18기 수료
Ⅰ. 서 론
침례는 예수의 피의 공로를 힘입고 주의 이름을 믿어 거듭난 자가 평생 단 한번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신앙을 고백하는 증거로 받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는 복음 증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1)
성경에 나타난 침례는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의 침례와 예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시므로 제정하신 기독교의 침례가 있다.2) 이 사실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요한의 침례와 예수께서 명하신 침례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정의하여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 침례를 그 시대의 것으로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침례의 의미는 단순한 어떤 한 시대에 국한된 상징적인 의식이 아니다. 우리는 침례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속하시고자 창세 이전에 계획된 인간 구속 사역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실제적이요, 절대적인 의식임을 알아야 한다.
본고에서는 침례의 의의와 역사적인 배경, 요한의 침례와 예수의 명하신 침례의 차이 및 침례의 변천 등을 알아보고 침례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자 한다.
Ⅱ. 침례의 의의와 역사적 배경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식이다.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나타내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 것, 즉 의로운 신분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롬 6:3∼11, 골 2:12).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무렵에 제정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 20)고 하신 말씀으로 침례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1. 침례의 의미
“침례” 용어에 대한 그리스어의 어원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예수의 침례를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침수례가 올바른 침례의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침례로 번역된 어휘는 모두 헬라어의 밥토3)()의 변형이다. 침례를 명사로서는 밥티스마()라고 하였는데, ‘물 속에 잠긴다’는 뜻을 갖고 있다. 다른 명사형으로는 ‘물 안에서 씻음’(washing in water)을 뜻하는 밥티스모스4)()가 있다. ‘침례를 주다’라는 원어상의 동사는 밥티조5)()라고 하는데 뜻은 ‘배가 침몰 당한다’는 것으로 전체가 물에 빠져 버리는 것을 뜻한다. 침례를 준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이 말을 사용한다. 즉, 침수례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증거를 알아보면 50가지의 명성 있는 헬라어 사전들이 “침수례”(immersion)가 밥티조의 근본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주전 285년에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Ptolemy)는 팔레스틴의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각 지파에 속해 있는 히브리어 학자들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초청하여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인 70인역 성경이다. 70인역 성경에서 “침례 받다”(baptize)라는 말이 최초로 쓰여지기는 문둥병 환자 나아만의 이야기다. 열왕기하 5장 14절에서 나아만이 7번이나 요단 강에 자기 몸을 담그었다고 하는 것을(바로 자기 자신이 침례 받음을 의미) 읽을 수 있다. 이것으로 “침례 받다”라는 말은 사실상 “침수하다” 또는 “물 속에 빠진다”라는 말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원(語源)상의 의미로 이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권위 있는 신약성서 번역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케네스 웨스트(Kenneth Wuest)는 밥티조라는 말을 “물 속에 빠지다”라는 의미로 사용해서 마태복음 3장 13절을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로 번역했다.
둘째, “속에서”(in)를 뜻하는 에이스()는 마가복음 1장 9절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에 의하여 요단 강 속에서 침례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헬라어에서 전치사 “속에서”(in)라는 말은 “속으로”(into)를 의미한다. 위의 성경구절은 주님이 요한에 의하여 요단 강 속으로 몸이 눕혀짐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침수례의 완전한 모형인 것이다.
셋째, “밖으로”(out of)를 뜻하는 엑크()는 마가복음 1장 10절에서 요한이 주님의 몸을 요단 강 속으로 눕힌 다음 바로 요단 강 밖으로 일으켜 세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가 바로 엑크()였으며 그것은 사실상 “안으로부터 밖으로”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 역시 침수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시 한번 마가복음 1장 9, 10절을 보도록 하자. 이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날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 속에서 요한의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 속으로부터 올라오셨을 때에 그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례는 완전히 물 속에 잠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침례의 유사 의식과 역사적 배경
침례의 기원은 이방인의 정결(purification) 혹은 구약의 결례 혹은 유대종파들의 의식적인 결례들로부터 다양하게 추적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기독교 침례는 요한의 침례가 있은 후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반면에 세례라는 말의 유래를 알아보면, 주후 1311년에 라벤나 공회에서 침례와 세례는 다를 것이 없다는 변론을 했으나 16세기 종교개혁 후까지 약식세례는 공식 의식으로 행하지 못했다. 그 이후 1643년 웨스트민스트 종교회의에서 이 문제를 토의하다가 표결한 결과 24대 24로 동수가 되었는데 이때 의장이었던 라이푸드 박사가 약식세례에 투표함으로 약식세례가 공식 세례로 인정된 것이다.
1) 이방인의 정결
침례는 그 유추가 이방인 중에서도 널리 발견되는 종교적인 상징이었다. 애굽인, 바사인, 인도인 등 모두가 그들의 종교적인 결례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이것들은 헬라와 로마 종교에서 더욱 현저했다. 이들은 때때로 바다에서 목욕하는 형식을 취하거나 물을 뿌림으로 시행했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새로운 출생의 개념이 이와 같은 결례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기독교의 침례가 신비종교들의 유사한 의식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6)
그러나 이러한 기원은 기독교의 침례와 형태조차도 비슷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행한 흔적도 없고 또한 탁월한 신적 영(pneuma)의 영향이 관련된 증거도 없으며, 더욱이 바울이 침례와 결부시킨 죽음과 부활의 개념들은 신비적 의식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7)
2) 구약의 결례
모세의 율법 아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부정을 피하고 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여러 가지 의식적인 정결과 세척의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레 20:25, 26). 아담스(J. E. Adams)는 이러한 구약의 의식적 결례들이 곧 침례라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침례 의식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그 증거로 신약성경 자체가 구약의 결례들을 침례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히 9:10, 요 3:22∼34). 그러나 벌코프(L. Berchof)는 “유대인들은 의식적 결례들과 씻음을 갖고 있었으나 이것은 성례적 성격을 지니지 못했고 그래서 언약의 인침이나 표식들이 아니었다”고 말한다.8)
2. 유대종파의 의식적인 결례
중간기 시대에는 레위기적인 순결의 유구(遺構)가 완전하게 일치되는 결례가 유지되지 못한 반면 결례의 의식은 “성전제사의 입회” 혹은 “봉헌에 대한 의식”의 성격으로 추론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여러 종파에서 결례가 행해졌다. 이 가운데 특히 에세네파와 관련 있는 쿰란 공동체의 결례는 침례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매일 개별적으로 하루 3번씩 씻는 것과 비교할 때 한 번만 받는 침례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9) 또한 이방인 입교자들에 대한 침례도 기독교 침례와 매우 유사하였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입적할 때에는 먼저 할례를 받았고, 후에 침례도 받았다. 그렇지만 이 침례도 다른 결례들과 같은 계열에 있는 일종의 의식적인 씻음이었던 것 같다.
침례는 이러한 씻음과 입회에 대한 의식이라기 보다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으로써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10)
3. 침례의 변천
침례(Baptism)의 성서적인 의미와 원어적인 의미는 침수례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유아침례를 행함에 있어서 이 의식을 간편하고 편리하게 하자는 끊임없는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주후 417년에 카디지 회의에서 유아침례를 법으로 공포함으로 유아들에게 침례를 주게 되었고 이 침례 의식은 점차 세례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와 자유의사에 의해서 침례를 개인적으로 받으려는 참된 순종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대신 부모에 의한 유아침례가 강제로 그들의 신앙고백과는 상관없이 행해지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중세 교회 시대를 암흑기로 몰아 넣었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 지배 시대인 중세시대에도 12C까지 세례 또는 관수례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으로 행해지고 있었고 침수례가 주로 행해져 왔음이 확실하다. ‘물을 붓는 것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인하여 주후 1311년 라벤나 회의에서 침수례와 관수례가 동등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때부터는 ‘예외’가 ‘규정사실’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종교개혁기에 들어와서 가톨릭을 대항하여 개혁자들이 잘못된 성례주의를 반대하고 올바른 교회의 의식(침례와 성찬)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아서 구성된 국교회의 도움이 없이는 가톨릭과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유아세례를 옹호하며 ‘오직 성경만’이라는 그들의 구호를 스스로 짓밟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적인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올바른 침례 의식의 형식을 추구하는 일단의 무리(재침례파, Anabaptist)를 가차없이 죽여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부 과격한 재침례파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나 그들은 소수였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볼 때 성서의 의식을 행할 때 원칙을 저버리고 편법을 행함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핀들리 B. 에즈(Findley B. Edge)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유아세례를 꼽고 있다.11)
<표 1> 성경에 의한 침례와 세례의 비교
Ⅲ. 성경에 나타난 침례
1. 구약에 나타난 침례
1) 노아의 홍수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구약에 나타난 침례에 대한 예표로 노아의 홍수를 들 수 있다. 노아 당시에 영적 존재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이 없는 사람의 딸들과 결혼함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게 되자 하나님은 육체가 되어버린 인류를 멸하시고 영적 존재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을 구원하셨다.
성경은 이것을 바로 침례라고 말한다. 침례는 인간의 죄를 씻거나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침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순복하겠다는 최초의 믿음의 고백이며 증거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2) 출애굽 사건(출 14:21∼3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고전 10:1, 2)
이스라엘 조상들은 구름 기둥과 홍해 도하(渡河)의 경험을 통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독립된 민족으로서 모세의 지도하에 광야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구름 기둥과 홍해의 경험을 성도들이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구원 받은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새 생활을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외적 표시인 침례로 비유한 것이다.
3) 물두멍(출 30:17∼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찌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찌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17∼21)
물두멍은 성전에서 봉사하던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들어진 일종의 큰 세숫대야로서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여 있다. 제사장들이 성소로 출입하기에 앞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손과 발에 묻은 짐승의 피를 씻어 정결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정결 의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기 위함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반드시 지녀야 하는 깨끗한 삶과 성결한 마음의 자세를 상징한다(히 10:22, 벧전 3:21).
2. 신약에 나타난 침례
1) 복음서에 나타난 침례
① 요한의 침례의 의미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 1:29∼31)
요한의 침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인류를 대표하여 주님께 이양시키는 데 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아담으로부터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죄뿐이다. 상속자는 장자로 이어지기에 아담의 장자의 권리가 이스라엘로 이어지고 이스라엘의 장자의 권리가 족보상으로는 요셉에게로 이어지나(대상 5:1),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를 택하신다(민 3:12, 13).
이로써 레위지파는 하나님으로부터 장자를 대신하는 자로 세움을 받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자가 되었다. 나아가서 완전한 제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일을 행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의 침례는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자가 인류의 죄를 모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양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레위 지파요, 그의 아버지는 대제사장이며 또한 그는 태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자다. 또한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율법의 마침이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의 죄를 예수께 이양하는 역할을 침례를 통해서 행하고 있다(눅 1:5∼13; 16:16, 마 11:11).
또한 침례의 의미는 로마서 6장에서 말한 대로 연합을 의미한다. 레위라는 이름의 의미 역시 연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침례를 통해 우리 죄를 주님께 담당시키는 일과 또한 예수를 세상에 드러내어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는 데서 요한의 침례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② 예수께서 받으신 침례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3∼17)
예수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 그러나 이 침례는 요한이 집례한 침례의 의미를 넘어선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한의 침례는 죄인들과 죄 용서를 위한 회개를 나타내는 것이나 예수는 죄인도 아니며 죄를 용서받거나 회개할 필요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침례 요한도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에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말씀하셨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침례 요한은 구약시대에 성막의 일을 하였던 레위 지파다. 마치 그는 제사장이 양의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킨 것처럼 예수께 침례를 베풀어 아담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의 머리에 안수하여 담당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침례 요한이 베푼 침례는 회개의 침례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아사셀 양에게 대제사장이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다 고했듯이 침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어 백성의 죄를 고하게 만들었다. 회개는 곧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6장 1∼5절에 보면 침례는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레위”라는 말 자체도 연합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 되지만, 죄 없으신 예수가 회개의 침례를 받으신 것은 백성이 고한 아담의 죄와의 연합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침례 요한에게 침례 받는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한, 즉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다. 이때부터 고난을 짊어진 고난의 종으로서의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바로 광야로 보내졌고, 아사셀인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으로써 예수는 구약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시고 계신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침례 요한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첫째는 인류를 대표하여 아담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이양시키는 일을 하여 예수의 구속사를 돕고 있으며,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어 공생애를 시작하게 하는 데 그의 사역의 목적을 위임받은 것이다.
결국 예수는 죄 없으신 분이 세상 죄를 요한으로부터 이양받기 위하여 침례를 받으셨으며, 한편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셔야만 하는데 침례를 받으신 것이며 성령이 임하고 인류 구속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12) 즉,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므로 공적인 신분으로서 그 사역의 시작하심을 볼 때 예수께서 침례 받으신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침례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 39)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영적인 삶이고 신령한 삶이다. 침례는 ‘믿는 자는 누구나 침례를 받으라’(막 16:16)는 주님의 명령이다. 하지만 침례를 받는 시기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개혁주의 교회는 침례를 받기 위하여 학습세례나 일정한 과정을 거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며 교리와 헌법에 의해 침례의 과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성경에서의 침례는 믿는 자의 순종의 표이며 믿는 즉시 순종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누구도 성경의 말씀을 초월할 수 없으며 어떠한 교리도 성경보다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침례가 교회 내에서 어떤 계급의 기준이 되거나 믿음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신자의 믿음의 결단이고 예수와 연합된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침례는 믿음이 있는 즉시 행해졌다. 성령을 받은 후 침례를 받기고 하고(행 10:44∼48), 침례를 받은 후 성령을 받기도 하였다(행 8:12∼17). 또한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다음 즉시 침례를 받기도 하였다(행 2:37∼41; 8:34∼38).
중요한 것은 침례를 받는 시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으면 즉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명령으로 들려올 때 즉시 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침례는 어떤 계급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교리로 이용되어서도 안된 것이다. 침례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즉시 순종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다. 이와 같이 사도들은 “침례를 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순종하여 믿는 즉시 침례를 주었음을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침례는 믿는 즉시 받는 것이다.
3) 바울서신에 나타난 침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5)
바울이 사역하던 그 시대에 “구원은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은혜의 복음”을 오해하여 범죄의 기회로 삼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침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임을 강조하여 이들의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고 여기지 않고는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하며 육신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옛 본성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물에서 올라옴으로 예수와 연합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침례가 예수와의 연합임을 강조하고 있다.
4) 베드로 서신에 나타난 침례
베드로는 침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신령한 구원의 표인 침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노아의 홍수는 침례의 “예표”라는 것이다. 노아의 가족은 옛세계가 그 죄 값으로 물 속에서 멸망되었을 때 구원 받아 새세계로 들어갔다. 즉 홍수의 물이 방주를 안전하게 운반한 것처럼 침례도 그리스도인을 옮겨준다는 것이다. 이는 침례를 통하여 몸의 더러움을 씻는 일 즉 단순한 육체의 씻음이 아니라 밝은 양심을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있다.
이와 같이 침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장되고 그의 부활에서 그와 더불어 다시 사는 중생의 표다(롬 6:3∼11). 또한 노아의 방주는 교회의 가장 훌륭한 예표다.
Ⅳ. 침례 의식에 대하여
1. 침례의 대상
첫째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면 다 받을 수 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에게 침례를 베푼 것과(행 8:36, 38) 회당장 그리스보의 가정이 침례 받은 사례(행 18:8)가 좋은 증거다.
둘째로 침례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하고 교회와 교회의 영적 교제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아(幼兒)들에게 이 의식을 베푸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례를 받은 유아가 성장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참예하는 의식에 믿음의 확신이 없는 상태에 있는 유아에게 이 의식을 집행하는 것은 마치 이 의식 자체가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2. 침례의 목적
침례 의식이 구원의 요건은 아니다. 즉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거나 믿은 다음에도 침례 받지 못하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하여 너무도 분명히 강조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강도는 침례 받지 않고도 예수가 계신 곳에 들어갔다.
그러면 왜 침례를 받는가? 침례를 받는 목적은 무엇인가? 침례를 받는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서다. “침례를 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명령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엄숙히 명하신 분부다. 그러므로 몰랐으면 모르거니와 알고서도 침례를 거절할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침례 받는 데까지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다. 침례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시작한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주님께 충성하겠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이 의식에 순종하는 것이다(마 28:19, 20).
3. 침례는 언제 받는가?
침례는 주님의 명령으로 믿는 자는 누구나 순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모신 자는 하루라도 지체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례를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침례를 받는 시기에 관하여 믿는 즉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순절에 회개한 3,000명이 즉시 침례를 받았으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그 날로 침례를 받았다(행 8:30, 39). 그 외에도 바울(행 9:18), 루디아의 집(행 16:15), 빌립보 옥의 간수(행 16:33) 등을 볼 수 있다. 침례는 교리에 의해서 행해져도 안 되고, 어떤 계급의 수단으로 행해져도 안 되는 것이다. 침례는 주님의 명령이며 우리의 신앙 고백이자 주님과 연합된 삶을 의미하는 믿는 자의 체험이다.
4. 집례자(執禮者)
이 의식을 베푼 사람들은 당연히 사도들이었다. 사도들은 오늘날 목사의 직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니 이 의식은 당연히 목사가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한 두 가지의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빌립이 구스 내시에게 이 의식을 베푼 것과 또 아나니아가 바울(당시에는 사울)에게 베푼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는 모두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부근에 성직자가 없었고 또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기름부음 받은 목회자가 집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Ⅵ. 결 론
침례는 주님의 명령이다. 침례는 결코 침례교인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며 또 그러한 권한을 누가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가감할 권한을 주신 적이 없다. 오직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믿으며 가르치고 지킬 뿐이다.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입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복음설교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침례를 통하여 신앙을 고백한다. 성경은 침례에 대하여 확실히 증거하고 있지만 세례는 성경적 증거가 없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침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침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한다.
주)
1) 김기동, 『인자의 날을 위하여』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3), p. 218.
2) Ibid., p. 226.
3) 밥토(bapto)는 희랍어의 기본 동사로서 신약 성서에 3회 나오는데 언제나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눅 16:24, 요 13:26, 계 19:13).
4) 밥티스모스(baptismos)는 신약 성서에서 2회(막 7:4, 히 9:10. 어떤 사본에는 막 7:8에서도 나옴) 나오는데 유대인의 손 씻는 유전(막 7:4), 사람들의 정결 예법(히 9:10), 침례에 관한 교훈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침례가 다른 종교의 씻음과 다름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다(히 6:2).
5) 밥티조(baptizo)는 고대 그리스로부터(히포크라스, 플라톤 등의 철학자) “배가 물에 가라앉다”, “파선되어 물 속에서 고통 당하다”, “물에 빠지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는 80여 회 정도 나오는데 “물에 담그다” “잠기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마 3:11; 20:11, 막 7:4, 눅 3:16, 행 1:5; 11:16, 고전 10:2).
6) 박형룡, 『교의신학 6권』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7), p. 264.
7) 박은규,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 (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신학대학원, 1983), p. 7.
8) Ibid., pp. 7-8.
9) Ibid., p. 8.
10) Ibid., p. 9.
11) 핀들리 B. 에즈, 『기독교의 생명력』 도한호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74), pp. 207-215.
12) 신영길, “뱀의 후손은 누구인가?” 『베뢰아사람』, 20호, (1991년 11월), pp.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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