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칼럼·논문·서적/기독논문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들의 의

은바리라이프 2008. 5. 24. 18:40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들의 의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들의 의

 손정분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들의 의



1. 서론

요한복음은 예수의 정체성을 논하되 요한의 눈으로, 대중의 시각으로, 또 예수 자신의 진술로써 다방면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변증하고 있다. 이 아들은 아버지와 상호내주 하시면서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유일성(특별함)이 아들의 의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의 의는 태초에 계신 로고스가 성육신하여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데서 표출된다. 요한복음에서 의의 정의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저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6:10) 곧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시니 ‘저희’로 진술된 세상이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로는 아들 안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보고 그 안에 계신 아버지를 뵙는다. 따라서 아들의 의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오신 것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과, 부활을 통하여 보좌에 오르시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물론 아들의 의는 창세전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17:5, 22).
본 소고에서는 먼저 아들의 의를 성립시키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 다음은 구체적으로 아들의 의라고 할만한 업적, 곧 아들이 취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아들의 ‘선재하심,’ ‘동등하심,’ ‘성육신하심’과 ‘독생하심’을 논의할 수 있겠고, 후자와 관련해서는 ‘스스로 오지 않고 보내심을 받아서 오신 일,’과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신 일’ 등을 큰 줄기로 잡아서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것은 아들의 속성을 다루는 것이고, 뒤의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아들의 의를 조명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어느 누구도 그와 필적할 만한 존재가 없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러한 특별한 관계를 가질 자도 없다.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들 자신의 설명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1)

2.1. 공관복음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구절은 두 번 정도 등장한다. 그 외에 많은 경우가 예수의 비유 속에서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학자들은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언급한 가장 중요한 사례로 마가복음 13장 32절을 든다. 그 전후 문맥은 예수께서 종말에 있을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현상들을 자세히 설명하시는 내용이다. 그런 중에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의 역사성에 대해서 스타인(Robert H. Stein)은 ‘하나님의 아들이 미래에 대한 무지를 고백한 것’2)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이것을 모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 좀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을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것을 두고 ‘아들이 모르기로 작정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들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종말의 때에 대해서만큼은 아버지의 권한에 맡겨두시고 모르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3) 이것은 알면서 모른 척 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모르심을 의미한다. 일례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 다시는 기억치 않으신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과거의 허물을 기억하고 고통스러워할지라도, 예수는 한번 용서한 죄에 대해서는 전혀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망각하실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다. 예수께서 종말의 날을 모르신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그 날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데 있다. 그날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판단하시고 이루실 일이기 때문에, 시한부종말론 따위의 이설(異說)에 미혹을 받지 않도록 경계하신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마태복음 11장 27절이다. 그 전후 문맥은, 예수께서 이적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않는 것을 보시고, 과거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보다 더 완악하다며 탄식하고 꾸짖는 내용이다. 그리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자들이 받을 수 있다고 하시며, 최종적으로 아버지와 자신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본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제시된다.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말씀은 대개 소외계층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마음이 낮아진 상태여서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 있고 부하다고 여기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회개치 않으며 주께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 삶에 만족하는 자들이 복음을 배척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본문의 갈등 상황에 대해서 토머스 롱(Thomas G. Long)은 “사람은 자유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배척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복음을 어떤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떤 자에게는 나타내 보이신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4)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예수의 자기 이해, 곧 아들로서의 위치는 독특하다. 스타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관계상의 차이는 단순히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5)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러한 입장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줄 알았기에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2.2. 요한복음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에 대한 네 가지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인자,’ ‘로고스,’ ‘그리스도,’ ‘아들’이 그것이다. 이 칭호들은 요한복음에서 신학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본 연구에서는 범위를 좁혀서 ‘아들’ 칭호만을 다루고자 한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은 ‘로고스’라는 칭호와 연관이 있다. 태초에 계시는 ‘로고스’가 아버지 품에서 나오신 다음부터 ‘아들’이 나타나신 것으로 묘사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을 보여주는 유일한 빛이다. 그를 통해서만 아버지를 볼 수 있고(14:8), 그를 봄으로써 그를 보내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확증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아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사람으로써 또 하나님으로써 계시는 중보자시다.
유대적 배경에서 ‘아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을 가리킨다. 또한 왕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했다. 스티븐 스몰리(Stephen S. Smalley)에 의하면, 유대 문학에서 ‘하나님의 아들’ 표현을 사용한 용례를 살펴볼 때, 아들 자격은 혈연관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복종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 또는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는 출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입양에 의해서 된 아들이라는 것이다.6) 스티븐은 이러한 유대적 배경을 갖고 요한복음을 보는데, 요한복음의 예수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수행하라고 명하신 일을 완수하심으로써 그분에 대한 복종을 나타내시고, 그것으로 자신이 참 아들 되심의 증거로 삼으셨다고 주장한다(17:4). 하지만 스티븐이 말하는 아들 자격은 ‘양자’로 입양되는 것으로, 신자에게나 적합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계명을 실행하시기 전에도 아들이시다. 인간은 그의 가르침을 믿고 그 계명에 순종하여 자녀가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독생하신 아들이시다.
요한복음에 근거를 두고 있는 김기동 신학에서 ‘아들’이 갖는 의미의 대략을 정리해 보면, 먼저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아들’7)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6:46).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 아울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늘을 상속 받으시는 후사라는 것이다(17:1~5). 혹자는 하나님 아버지는 죽는 분이 아닌데 왜 굳이 후사를 세우시고 상속하는 일을 하시는가 하고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인간 사회의 질서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하늘을 상속받으실 후사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위임받는 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기동은 “아들의 권위와 아버지의 권위는 하나님으로서 같다.”8)고 말한다. 후사로서 아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공유하신다(5:44, 53; 12:28; 17:11~12).9)
마지막으로 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마귀를 멸하고 그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는 분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다(8:44). 예수는 그를 세상임금이라 하시고(12:31), 아들이 영광 받으시고 성령이 오시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은 줄 알라고 하셨다(16:11). 그 아들이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고 인간을 구원하신다.


3. 아들의 의를 이루는 배경

아들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자로서 보내심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또한 하나님의 이름과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 세계에 오신다(5:37, 43; 13:20; 15:23).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며, 그것으로 심판을 행하고 생명을 주는 신적 활동을 하신다(5:21~23). 이 일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완벽하게 일치를 이룬다.

3.1. 선재하심

요한복음은 예수의 선재성에 대해 말하되,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요한복음 서언은 예수의 선재하심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되, 태초에 계시는 분으로(1:1), 침례 요한보다 뒤에 나타나셨지만 그보다 앞선 분으로 소개한다(1:15).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어 왔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나(8:58), 예수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가 있으며, 자기가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아버지께서 그 영화를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하심으로 자신의 선재하심을 증언하셨다(17:5).
예수의 선재성을 증거하는 말로 ‘태초’()가 제일 먼저 나타난다. 일찍이 주석가들은 요한복음 1장 1절에 기록된 ‘태초’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를 시간의 시작으로 보았다. 바레트(C.K. Barrett)는 이 둘을 동일하게 만물의 시작점으로 생각했고,10) 최선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때를 가리키는 말로서, 천지가 창조된 그 시간의 기점에서 영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1) 이것은 예수의 선재성을 인정하되, 태초라는 만물의 시작을 기초로 해서 영원 전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데서 바레트를 포함한 일반해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비슬리-머리(Beasley-Murray)는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창조 사역이 아니라 창조가 이루어졌을 때 있었던 존재,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하나님이셨던 ‘말씀’과 관련된다고 한다.12) 이것은 저자가 로고스를 기존의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탈피하여 인격적 관계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문경 또한 서언 1절의 태초는 창세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여러 그리스도 신앙고백(비교: 빌 2:6, 골 1:15, 히 1:3)에서 발견되는 ‘말씀’의 현실적이며, 인격적인 선재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3) 이 ‘태초’는 요한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김기동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에서 ‘태초’에 대한 해석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요한복음에 기초한 그의 신학은 창세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정리한 후사론을 말하고 있어서, ‘태초’에 대한 개념 또한 분명하게 정의된다: ‘요한은 ‘태초에’라는 말로 복음서를 열었다. 그것은 이 복음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 ‘태초’만 해도 구약 이전의 태초를 말하고 있어서, 그 내용과 지식이 얼마나 풍부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여 영원 전부터 말씀이 계셔온 것과 그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한다.’14)
여러 증거와 정황들을 살펴볼 때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 어떤 것도 지으시기 전, 만물 중 어느 것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세계가 바로 태초이다. 아울러 ‘태초’에 이어지는 동사 ‘계시니라’() 또한 선재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시제이다. 미완료시제 ‘엔’()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사용된다. 그러니까 로고스는 태초에 계시는 분으로서, 시작이 없는 영원 전부터 계셨으며, 그 상태가 완료됨이 없이 지금 이 순간(현재)을 지나서 앞으로도(미래) 영원히 계시리라(계속)는 개념을 표현한 장엄한 말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 ‘엔’()이 본문에서 영원한 것, 한정 없는 상태의 의미로 쓰였다고 말한다.15)
아들의 선재성, 곧 태초에 계시는 로고스는 15절의 요한의 진술로 뒷받침 된다. 침례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먼저 났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가 선재하심을 알았다. 그 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는 예수의 증언이나,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8:58)는 말씀, 그리고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린 그 영광으로의 회귀를 소원하시는 17장의 아들의 기도 등도 예수가 선재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려준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서술을 통해서 아들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의도를 성취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다.

3.2. 하나님과 동등하심

요한복음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다. 로고스는 ‘태초’에 계시는 분인가 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다. 요한복음 1:2는 하나님에게 위격이 있으시다는 것과, 아들은 그 위격 중 한 위가 되시는 것을 암시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14:9)이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선재하시는 로고스는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고 본래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들의 지위는 김기동의 주장을 통해서 더욱 명료해진다. 그는 요한복음 서언에서 예수의 정체를 ‘하나님과 동등하신 로고스’16)로 정의한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로고스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들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다.
이처럼 아들은 태초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으로서 그 권위가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또한 창조자로서 동등하시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17) 계시다는 것은, 아들이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는 분임을 보여준다(1:1~2). 아들은 태초에 계신 분으로서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다. 요한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이 아들이 창조의 주체이며 동시에 창조의 중개자가 되신다. 요한은 만물이 아들에 ‘의해서’ 또는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한다(1:3). 창조 사역 또한 아들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권위자임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그 밖에도 아들의 자기주장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14:9),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판할 권리를 주셨는데, 그 까닭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기 위함이라’(5:22) 하신 말씀 등이 좋은 근거구절이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동등하고, 아들의 권세는 아버지의 권세와 동등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하고,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를 살린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시는 분이다. 성경 기자에 의하면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분이다(빌 2:6~11). 그는 낮아짐을 자원하시면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 하여 아버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춘다. 그런 아들을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 예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셨다.

3.3. 성육신하심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들의 의는 ‘육신이 되신’ 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1장 14절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이자 수많은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던 성육신에 대한 최초의 분명한 진술이다. 요한신학자들은 요한이 어디서 이러한 사상을 취했으며,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것들에 대하여 바나바스(Lindars banabars)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8) 그는 우선 1장 14절의 사상적 배경19)에 대해서 대다수의 현대학자가 헬라적 유대교(Hellenistic Judaism)의 지혜전승20)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고 한다. 학자들은 바울서신에서 지혜전승의 흔적을 발견하고 있으며(고전 1:30, 골 1:15~20, 히 1:1~4),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혜는 창조 시 하나님의 대리자시며 구속의 역사에서 예수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전승을 기초로 삼아서 하나님의 말씀(지혜, 아들)이 예수 안에서 활동했다고 하는 대신에, 요한복음은 그것이 예수 안에서 구현되었다(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에 더하여 바나바스는 1장 14절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추상적인 개념을 인격화하려는 셈족의 경향을 염두에 둠으로써 가능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고 한다. 율법이 지혜의 구현이라면,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있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구현으로써 하나님의 선재하신 아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는 요한복음을 사람의 글로서 양식을 지닌 전승으로 보는 것이며, 바나바스는 이러한 기존의 이해에다 복음적인 의미를 상실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복음서를 사람의 글이 아닌 하나님의 글이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예수의 성육신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예수의 성육신하심에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다. 예수의 두 본성에 대한 스티븐(Stephen S. Smally)의 설명은 보다 요한복음적이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누렸던 그 영광(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에 주의 하면서, 아들이 세상에 계심으로써 그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들에게 명하신 그 과제들을 아들이 수행함으로써, 아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1:1, 14; 5:17). 결국 요한복음에 따르면 기능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아버지와 아들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말하는 요한복음의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스티븐은 이것을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근거로 잡는다. 그리고 인성에 대해서는 예수가 사람과 하나라는 데 있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의 신적 본성이 예수의 인간적 본성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곧 예수의 육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발견되어진다고 한다.21)
김기동은 1장 14절을 인간 구원 차원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을 구속 사건 이전부터 있는 하나님의 의도로 본다. 곧 이 세상이란 아들이 보좌를 상속받으시기 위해서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그가 그곳을 향해 이 세상을 거쳐 가실 때 그를 영접한 인간은 구원을 받았고, 그를 대적한 마귀는 심판을 받았으며, 그가 들어가신 하늘은 영광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기동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라는 말, 곧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라는 말을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표현했습니다.”22)라고 하여 성육신 사건을 한 가지 목적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석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
로고스의 성육신 사건은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아들이 인자로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게 되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성육신 이전의 로고스가 가진 신성과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인성이 함께 하여 인간 구원을 성취하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대속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실 것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증거와 일치하는 것이다(마 20:28, 요 10:17~18, 히 9:22. 참조 레 17:11).
요한복음의 성육신 사건은 공관복음이나 서신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독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온전히 두 본성을 공유하신다는 사실을 언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 본성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 교부들은 A.D. 451년의 칼케톤 종교회의에서 ‘두 본성’의 그리스도론을 작성할 때 그 단서를 바로 요한복음에서 찾아내었다. 이처럼 성육신하신 아들에게 있는 신성과 인성이 아들의 의를 나타내는 근거가 된다.

3.4. 독생하심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분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독생자’ 또는 ‘독생하신 아들’로 묘사한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1:14),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독생한,’ 또는 ‘유일한’을 의미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형용사로서,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것으로써) ‘유일한’ 것을 의미한다. 모노게네스는 모노스()와 기노마이()의 합성어로써, 탄생(게네스)에 있어서 유일한 것(모노), ‘종류에 있어 단 하나’를 가리킨다.
서영환은 이 ‘유일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일하다(unique)는 것은 ‘비슷한 것’(a like)이나 ‘같은 것’(equal)이 없다는 뜻이며, 하나밖에 없으며(single in kind), 아주 특별하여 비교할 것이 없으며(excellence), 견주어 볼 것이 없는 것(matchless)을 의미한다.23)‘ 이와 관련하여 유다서 4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홀로 하나이신 주재’()로 선포하고 있다. ‘데스포테스’()는 ‘주인,’ ‘상전,’ ‘소유자’의 의미로서 하나님에 관련해서는 ‘지배자,’ ‘통치자,’ ‘주재’의 의미로 폭넓게 사용된다. ‘유일하신 주재’ 앞의 관사 ‘톤’()은 뒤이어 나오는 주()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24)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유일하신 통치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다서의 유일 개념은 요한복음의 ‘독생한’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다음은 요한복음에서 ‘독생’이란 말이 쓰인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1장 14절에서 독생자에 모노게누스()를 사용했고, 1장 18절, 3장 16절, 3장 18절은 동일하게 모노게네스 휘오스()를 썼다. 곧 ‘독생하신 아들,’ 또는 ‘독생자’다. 그리고 1장 14절은 독생자의 영광()을 말하는데, 이것을 직역하면 “아버지로부터 난 독생자의 것과 같은 영광”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25) 이것은 독생자의 기원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요한복음의 전체 흐름에 부합한다. 선재하실 때의 영광보다 성육신한 아들로서의 겸손한 영광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김정태의 주장에 의하면,26) 영어성경은 ‘독생자’를 only-begotten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출생을 연상케 하는 약점이 있다고 한다. ‘독생한’이 출생을 의미한다면, ‘겐나오’를 썼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기노마이’()를 씀으로써 출생과는 다른 의미로서 ‘유일하다,’ ‘독특하다’의 개념을 담아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김정태의 주장은 독생자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막아준다. ‘독생’이란 단어가 주는 우리말의 이미지는 ‘스스로,’ ‘독립적으로’가 강하다. 어쩌면 모노게네스에 대한 해석이 올바로 이루어질 때 요한복음에서 아들의 의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독생자,’ 또는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다.27)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오신 유일하신 분이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권위를 가진 유일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나타내는 유일하신 분이며, 아버지께로 가는 길로서 유일한 분이며, 아버지를 보여주되 아버지 안에서 보여주는 유일한 계시자인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4. 하나님의 아들의 의

4.1. 스스로 오지 않고 보내심을 받아 오심

요한복음에서 아들은 철저히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나타난다.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실 때나, 제자들과 담론을 하실 때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누누이 밝히시고(5:37; 6:39, 44; 7:33; 8:16, 29, 42 …), 또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도 자신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서 세상에 왔다고 하신다(17:18). 보냄을 받은 자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자의 명령대로 순종한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는데, 그의 말씀도, 약속도, 뜻도, 행위도, 이름조차도 아버지의 것으로 하고 있다.28)
물론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예수는 스스로 버리는 죽음이라고 하셨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신다고 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스스로 택하시는 죽음이라고 밝히신 것이다. 10장 17~18a절만 보면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자원하여 목숨을 버리는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곧이어 10장 18b절에서는 죽으시는 결정권을 아버지에게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오신 아들은 보내신 이의 뜻을 완벽히 순종하신 후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예비하신 보좌로 오르신다.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서술에서 받는 느낌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이다. 바나바스는 “요한복음 3~10장에서 이어지는 중심 담화는 하나님의 마지막 구속행위의 대리자로서 예수의 기능에 합당한 자격(qualification)에 중점을 두면서, 예수가 대리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법을 제공한다.”29)고 말한다. 그러니까 아들의 권위는 그의 행위가 언제나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서 행해진다는 사실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요한복음의 예수는 자신을 친히, 그것도 반복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강조하여 소개하시는가? 인간 사회에서 권위란 그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에게서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아들은 어째서 자기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아버지의 뜻에만 절대 순종하는 자라는 것을 애써 밝히고자 하시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세 영적 존재를 둘러싼 세 개의 차원으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일의 차원은 김기동의 주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겸손하신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인자가 될 것을 원하시고,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허락하시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섬기는 자로서 순종의 길을 가신다는 것이다.30) 아버지 앞에서 인자의 본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신분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타락한 천사와 관련해서이다. 요한복음에서 마귀는 세상 임금으로 그 신분이 확인된다(12:31, 16:11). 그런데 세상 임금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자이다. 예수는 자기를 귀신들린 자로 취급하는 대적자를 향해 마귀의 자식으로 규정하시면서 마귀의 성품을 확인시켜 주셨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8:44) 예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 것, 곧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을 증거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하셨다(8:14). 마귀는 보내심을 받지도 않았고, 자기의 것으로 말하는 자니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것이다. 이러한 마귀의 성품은 하나님의 아들과는 정반대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범죄한 천사를 염두에 두고, 보내심을 받은 자는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강조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차원은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에덴동산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서 사는 존재였으나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죄를 짓고 말았다. 따라서 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서 스스로 살고자 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살지 않는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에 임하신 아들에게만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그에게만 만물과 더불어 그것을 심판하는 권세가 부여되었다. 예수는 스스로 오지 않고 아버지가 보내서 오셨다는 것을 의의 기준으로 삼으시고, 자기 안에 계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신다는 데서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신다(5:30).

4.2.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심

4.2.1. 죽으시고 부활하심
요한복음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이 주로 1장 14절의 성육신에 편중되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이 요한복음 구조의 클라이맥스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모든 논쟁의 결정적 요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31)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는 성육신 하신 목적을 죽음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풀어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인데, 그가 죽으셔야만 보좌에 오르시는 태초의 뜻과,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를 멸하시는 일이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까지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성육신과 더불어 태초부터 있어온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면 성육신 하신 예수에게 주어진 죽음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먼저는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서들 중에서 요한복음만이 예수의 죽음을 ‘영광’()으로 본다. 예를 들면 7장 39절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하여 예수가 죽으신 다음에 성령이 오실 것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12장 23절에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여 예수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시는 영광으로 말하는 점이다. 17장의 기도를 보면 예수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라고 청원하신다. 그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을 아들이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으니, 이제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화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시라’(17:4~5)고 간구하신다. 아들은 창세전에 영광 가운데 계셨으며, 이제 그 영광으로 돌아가시기 위해 죽음을 맞아들이신다. 그가 성육신 하신 것이나, 공생애를 사신 것 등이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이며, 십자가 사건도 그 영광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가 가진 영광은 부활로써 완성되고, 마침내 창세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하늘을 상속 받으신다. 그것을 아들은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17:24)이라고 하셨다.
또 하나는 예수의 죽음을 자발적인 죽음으로 말하는 점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당하는 죽음’이다. 즉 그가 반대자들에게 황당한 누명을 쓰고 총독 빌라도가 주관하는 로마 법정에서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공생애를 곁에서 지켜 본 사도들을 통해서 증언되었고, 사도 바울도 이러한 증거를 뒷받침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기의 죽음이 타의에 의해서 억울하게 당하는 죽음이 아닌, 자발적인 죽음이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0:11),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0:15) 하시고는,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것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10:17~18)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죽으실 권세와 사실 권세에 대한 해석은 명료하지 않았다. 프레트 크래독(Fred B. Craddock)을 비롯하여 다수의 해석자는 요한복음의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능력은 곧 아들의 능력이고, 아버지의 뜻은 곧 아들의 뜻이 된다고 한다.32) 즉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자기의 뜻을 좇아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복음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요한복음만큼 아버지와 아들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 하는 복음서가 또 있을까. 물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지만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초월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순종하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나바스는, ‘예수는 그의 메시지를 철회함으로써 자신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스스로 버린 것이 되었다’33)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께서 명하신 죽음을 수용하신 것이 곧 죽고 사는 권세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존의 견해들에 비한다면 김기동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김기동은 아들의 죽음의 권세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 곧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하늘을 지으시고 상속하려 하셨으나, 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늘로 직접 들어가면 아버지와 동등한 자가 되므로 그것을 사양하면서 죽음과 부활을 거쳐 인자로서 들어가려 했다는 것이다.34) 이렇게 겸손하신 아들의 뜻을 아버지가 받으시고 그의 인자되심을 인정하심으로써 아들은 죽을 계명과 살 계명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오신 것이 되었다고 한다.35) 여기서 아들이 인자되시기로 자원하신 데까지를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것으로, 그 죽음을 아버지가 허락하셨다는 데서부터 아버지께로서 받은 권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서 예수의 죽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신 인자의 모습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 앞에 가장 낮아지신 분이다. 가장 낮은 데까지 내려가서 죽기까지 영원히 복종하셨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모습과 권위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인자로 들어가셨다.’36)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오해나 동정심을 불식시킨다.
여기서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은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 외에 참 목자로서 양들을 사랑하는 발로(發露)이기도 하다. 10장 7~18절의 문맥에서 예수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절)37)라고 말하시더니, 곧이어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7절)고 말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빌라도 법정에서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할 소리를 하시고, 십자가상에서도 고통을 쏟아내는 절규가 아닌 “내가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38) 보냄을 받은 자로서 그 거룩한 과업을 성취하시는 위대한 장면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죽음은 세상 임금을 심판하는 것이며, 아버지를 사랑하여 기꺼이 마시는 잔이며, 창세전의 영광으로 돌아가시는 관문이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아들의 죽음은 창세전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과 같다.
예수의 죽음은 부활과도 연계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점은 보좌이며, 십자가도 부활도 그 과정 속에 있다. 예수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는다고 했는데, 이 생명은 부활을 말하며, 생명의 부활을 통해서 창세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예비하신 보좌에 오르고자 하신 것이다(11:25). 이 일에 대해서 김기동은 ‘예수께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신 것은, 부활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생명, 곧 보좌를 상속받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39)고 한다. 더 큰 생명이란 아들이 하늘에 들어가심으로써 아버지가 당초에 의도했던 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의 공생애가 생명이고, 그의 부활도 생명이고, 하늘의 주인이 되시는 것도 생명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셨고,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그 몸 그대로 부활하여 영생으로 들어가셨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의도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천상천하에 최고의 위대한 사건이다.

4.2.2. 심판하시고 구원하심
구약 시대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그분만이 심판하시는 줄 믿었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셨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 했고(17:3),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3:18).
요한복음은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 마귀와 인간을 모두 언급하며, 그 중에서도 마귀와 관련하여서는 심판40)의 실상을 논하고 있다. 곧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판의 일차적인 대상은 죄인이 아닌 마귀이다. 마귀를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요일 3:8), 그 일의 결과를 성령이 증거해 주신다고 했다(16:11). 이러한 세상 임금을 향한 아들의 심판은 김기동의 신학에서 부각된다. 아들이 마귀를 멸하러 오셨으므로, 마귀는 백 퍼센트 심판을 받는다.
인간이 심판을 받는 것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5:22).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던 심판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위임되었음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다.’(5:23) 여기서 잠시 ‘공경’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5장 23절에서 ‘공경’을 의미하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온다. ‘공경하다’()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활동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예수를 공경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41) 물론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오직 하나님만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신 32:39, 삼상 2:6, 왕하 5:6,7). 하나님 그분만이 재판장이신데(신 1:17), 예수는 자신을 죽은 자와 산 자의 재판장이라고 선언하시니 말이다.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한번 심판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유를 밝히신다.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5:27) ‘인자됨을 인하여’란 곧 ‘보좌를 상속하기 위해서 성육신하고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었으므로’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아들의 낮아지심으로 인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인간을 주셨고, 인간은 인자되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사람을 아들에게 주셨으니 살고자 하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여 아들이 주시는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 진리에 대해서 김기동은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아들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모든 인간은 아들이 살리신다.’42)고 한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심판하는 권세를 통해서 아들의 의가 나타난다. 천국과 지옥이 아들의 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요한복음의 관점에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14:18~24).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서 그와 더불어 살며 인격적인 교제 관계를 형성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믿음에는 앎이 필수이다. 독생자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니 ‘믿음’과 ‘영생’이 한 맥락에 있는가 하면(3:16), 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니 ‘영생’과 ‘앎’은 동일하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이렇게 믿음, 영생, 앎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가 하면, 믿음과 앎이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6:69). 앎을 전제로 하는 믿음의 행위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며,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은 그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거주하시는 곳으로 초대되어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상호내주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신 것같이 믿는 자들도 그 안으로 들어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요한복음의 구원 개념은 몇 가지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생명,’ 혹은 ‘영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하늘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해서 사용했다.43) 물론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담화(discourse)에서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 나라’ 또한 영생의 다른 이름이다(3:15). 다른 하나는 구원이 종말론과 특수하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영생이 내세에 얻는 미래적인 것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구원받은 것이 영생을 얻은 것이므로, 이 영생은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예를 들어서 5장 19절에서 47절의 담화에서 29절은 영생을 미래적으로 말하는가 하면, 5장 18절과 24절은 이미 영생이 실현된 사건이다. 요한복음은 생명에 있어서 독특한 의미를 함의하기 때문에 구원의 개념 또한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대로, 예수는 구원을 주는 유일한 길이시다.


5. 결론

요한복음에서 ‘아들’이란 말은 예수의 정체를 한 마디로 압축해 놓은 가장 적절한 칭호라 할 수 있다. 이 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면 아들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만을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특별한 영광을 받고 있는 아들은 무엇 하나 자의로 하지 않고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하고 아버지가 명하시는 일을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이라면 죽음이라도 불사하시고 아버지가 살려주시는 대로 부활하여 보좌를 상속하신다. 아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절대복종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시면서 그것을 의로 삼으신다. 아들은 친히 의에 대하여라 함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16:10)이라 하셨다. 곧 보좌를 상속하는 것이 의라는 것이다.
아들이 의를 나타내실 수 있는 근거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라는 것, 둘째는 하나님과 태초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것, 셋째는 그 말씀이 성육신하여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넷째는 독생하신 아들로서 그 자신만이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에 계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인에 기초하여 아들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살다 가심으로써 의의 실상을 보여주신다. 곧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이나,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하신 일 등은 모두 의를 이루는 노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아들의 의는 아버지께 더할 수 없는 순종을 통하여 보좌를 상속받으시는 데서 온전히 빛을 발한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를 향해 서 계시고, 아버지를 위해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신다. 오늘 우리에게서 아들의 의가 나타나려면 우리 또한 아들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 하고, 하늘의 후사가 되는 영광을 바라보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