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를 점령했는데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4-02-12 |
AD 81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티투스의 아우 도미티아누스는 계시록이 말한 열 명의 박해자 중 두 번째 황제이다. 막강한 정보 정치를 했던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샅샅이 색출하여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주님이며 신(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하고 자신의 우상에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잡아다 죽였으며 자신의 조카인 도미틸라와 그녀의 남편 클레멘트 집정관까지도 그리스도인임을 밝혀내고 모두 처형했다. AD 98년부터 AD 117년 사이에 황제로 있었던 트라야누스 황제도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이고 공정한 황제로 행세했으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로마 교회의 책임자였던 클래멘스와 안디옥 교회의 책임자 이냐티우스가 모두 그의 시대에 처형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기나긴 박해기간은 계속되었다.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를 포함해서 대표적인 박해자만 모두 열 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이러한 박해는 AD 312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특히 AD 284년부터 AD 305년까지 로마를 다스렸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박멸한 다음 ‘크리스티아누스 박멸성공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긴 기간을 10일로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2:10)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계사의 비밀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장자로 지목되었던 이스라엘(출4:22) 백성들의 역사는 늘 고난의 역사로 점철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애굽에 들어가서 43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했다. 그것도 돌을 깎고, 지고, 쌓아 올리는 혹독한 사역을 하면서 보낸 것이다. 그들이 애굽을 탈출한 이후의 행적도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과 모래 바람과 싸워가며 40년이나 걸려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갔으나 그들이 가나안에 진입한 BC 1406년부터 다윗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BC 1004년까지는 4백년이나 걸렸고 그나마 64년 후인 BC 930년에는 남북이 분단되고 말았으며 북왕국은 BC 722년에 그리고 남왕국은 BC 586년에 멸망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나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중에서 괜찮았던 시절이라고는 그저 60여년 정도가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모두가 고난과 형극의 세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바로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장자’인데 어째서 그 사람들의 역사는 그 꼴이란 말인가? 반면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반역했던 ‘바벨론’이나 ‘가나안’의 역사는 어떤가? 비록 정권의 모습은 수시로 바뀌더라도 그들의 세력은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번영을 구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쉬지 않고 핍박해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약자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핍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한다. 그래야 막판의 역전이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핍박과 고난의 기간은 매우 길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나는 날에는 길고 험난했던 시절이 한 순간처럼 녹아버린다. 한 잔의 물이 시원하기 위해서는 땀 흘려 일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10명의 황제들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당했어도 결국 역전의 날은 온다. 그리고 그 날은 뜻밖에도 갑자기 왔다가 어이없게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AD 312년 10월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정적인 막센티우스를 공격하기 위하여 출동하기 전 하늘에 걸린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고 또 그의 꿈에서는 하나님이 나타나 자기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첫 글자인 X(키) 와 P(로)를 그리도록 명령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날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동지 리키니우스는 AD 313년 밀라노 협상을 통해 크리스티아누스의 신앙을 정식으로 공인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박해에 시달려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교회사가 아직도 그 서두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 날의 감격은 곧 다시 ‘문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로마를 거의 다 점령해가던 교회가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한 권력자에게 먹혀버린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온갖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주린 자들을 먹이고 목마른 자들을 마시게 하며 나그네를 대접하고 벗은 자들에게 입혀주고 병든 자들과 갇힌 자들을 돌아보며’(마25:35) 전도에 힘썼던 로마 교회는 서민층과 귀족층에서 모두 급속하게 성장하여 이미 로마 시민의 거의 반 이상이 예수를 믿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콘스탄티누스가 앞으로 이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야 자신의 입지가 크게 튼튼하여 질 것으로 판단하여 이들을 등에 업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적도 없었고 여전히 태양신의 숭배자였고 로마 종교의 수장인 대제관장(Pontifex Maximus)의 자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에 감격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문제에 대한 황제의 개입을 감히 막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로마 교회의 미혹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리키니우스를 제압하고 동부로 세력을 확장한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정치적 기반으로 생각한 교회에 대해서도 당연히 지도자의 지위를 고수하며 ‘감독 중의 감독’으로 군림하려 했던 것이다. AD 321년 그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공표한 것도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안식일의 다음 날인 일요일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의 날’로 지키고 있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발상은 자신이 믿고 있는 태양신의 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일도 자연히 태양신의 기념일로 제정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누스는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했는데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그가 교회 책임자들이 중요한 신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이 회의를 주재했다. 결국 교회는 로마를 점령했으나 그 교회 자체를 황제에게 점령당한 셈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각지에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당을 ‘다듬은 돌’로 건축하게 함으로써 교권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로써 교회의 권력은 강화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정확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황제가 교회의 일을 주도하게 됨으로 인해서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죽기 직전인 AD 337년이었다. 그가 죽고 94년 뒤인 AD 431년 에베소에서는 또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그 회의에서는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를 낳은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Theotokos)' 즉 ’하나님을 낳은 여인‘이라는 칭호가 주어졌고 이 칭호를 거부한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 후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도인들은 동방으로 진출하여 중앙 아시아와 중국에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중국에서는 이를 대진교(大秦敎)라고 불렀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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