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은바리라이프 2008. 5. 27. 21:45
제목 : 그들이 나를 버리고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4-02-16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통적으로 왕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들의 조상 때에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을 거처 야곱으로 이어지는 소위 '장자권자(長子權者)'가 문중의 대소사를 판단하고 결정했다. 야곱의 자손들이 열두 지파가 되었을 때에도 그 지파마다 족장(族長) 또는 장로(長老)들이 문중의 일을 처리했고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 공동체의 대소사를 판단하고 결정했다.
"백성이 하나님게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편(judge),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출18:15~16)
모세는 나중에 이 일을 여호수아에게 인계했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사사(士師:judge)들이 이 일을 수행햇는데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이었다. 사사라는 직분은 본래 세습제가 아니었는데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로 사사를 삼아서 물의를 일으켰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利)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8:1~2)
그러자 이웃의 모든 나라들마다 왕이 있는 것을 부러워하고 있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사무엘에게 요청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백성들의 요청을 받고 사무엘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삼상8:7)
사실 사사제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는 신정의 상징이고 제일 첫번째의 사사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위하여 기도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로 불렀던 것이다(창18:25).
그러나 왕의 제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니므롯의 때로부터 이방인들이 채택해온 인본주의적 통치체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 주되 왕의 제도가 본래 잘못된 제도이며 그 왕들이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들의 권력으로 압제하여 결국은 모든 백성이 '왕의 종이 될 것'을 미리 일러두라고 하셨다. 사무엘이 그대로 일렀는데도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8:19~20)
사무엘은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웠다. 그래도 아직 백성들의 신앙이 남아 있어서 그들의 손으로 왕을 뽑지않고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서 베내민 지파의 사울을 왕으로 삼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처음 왕으로 사울을 세운 것은 BC 1050년이었다.
그런데 이것과 똑같은 일이 동방으로 옮겨 온 백성들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니므롯의 반역에 가담하지 않고 새로운 땅을 찾아서 동방으로 온 경건한 백성에게는 이스라엘처럼 왕이 없었고 오직 제사장만 있었다. 각 문중에서 생기는 일들은 족장과 장로들이 처리했고 그들 공동체의 수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인 '천군(天君)' 이었다.
최남선은 단군도 역시 몽고어의 'Tengri'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不成文化論') 이 '제사장'들은 또 공동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처리하기도 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천군'의 역할과 일상적인 문제들을 처결하는 '임금'으로서의 일을 겸하여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동체의 신앙이 허술해지고 질서가 문란해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중에서 정치적인 역할 즉 '임금' 또는 '왕'으로서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다. 중국의 사가들은 복회, 신농, 헌원을 '삼황(三皇)이라 하고 소호, 전욱, 곡 그리고 요와 순을 '오제(五帝)'라 함으로써 그러한 역할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황(皇) 이라는 글자는 백(白)자 밑에 왕(王)을 썼는데 백은 거룩한 분 곧 하나님을 의미하고 황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온전한 제사장을 말하는 것이다. 또 중국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온전한 제사장을 말하는 것이다. 또 중국에서는 하나님을 상제(上帝) 또는 천제(天帝)라고 하는데 제(帝)라고 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즉 '천자'이고 상제 또는 천제는 그 제(帝)의 위에 계신 분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것이다.
물론 '삼황오제' 중에서도 그 인격이나 신앙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황'은 온전히 대제사장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제'에 오면서 정치적 의미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오제'의 마지막 지도자 순(舜)의 때에 가서 비로소 왕(王)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것은 '상서대전(尙書大傳)'이 기록한 한 가지 이상한 대목에서이다.
"13년에 제(帝)가 비로소 당교(唐郊)에 들어가서 왕을 칭하였다(帝乃稱王)"
당교는 순이 요에게서 대제사장 즉 제의 자리를 물려받고 천제(天祭)르 ㄹ드린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帝)가 왕(王)보다 위일것 같은데 '제'가 '왕'을 칭했다는 표현이다. 나중에 중국의 왕들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서 황제 또는 천자라는 이름을 도용햇으나 본래 제는 영적인 지도자를 그리고 왕은 정치적인 지도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던 순의 때로부터 제사자으이 인본주의적 교체가 시작되었다. 순에게서 황하 치수의 임무를 맡은 우(禹)는 단군의 아들 '부루'의 도움을 받아 그 일에 성공하여 민심을 얻었고 순이 죽자 그 인기를 업고 스스로 '제'가 되었다. 그는 '동바ㅑㅇ'의 군장들을 방문하여 제의 승계를 알리고 오례(五禮)와 절기(節期)를 모두 동방의 것에 맞추었다(사기 '五帝本紀').
그러나 이러한 우의 승계는 동방의 군장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익(益)에게 양위햇으나 우의 아들 계(啓)가 그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서량지'前揭書) 이 때로부터 제위가 세습으로 전해지는 전자제(傳子制)가 시작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동방' 측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숙의를 거듭하며 부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이어 제위를 물려받는 우의 자손들은 그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하나님이 아닌 귀신을 섬겼고 음란을 즐기고 또 포악해졌으니 그것은 '제'가 하나님을 버리고 '왕'으로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하우의 14세 손인 걸(桀)은 요녀 말희(末喜)와 짝이 되어 방탕과 행악이 심해지자 결국 '동방'에서 파견되었던 탕(湯)이 걸을 제거하고 다시 신정을 회복했던 것이다.
"걸의 죄가 많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가 그의 잚소됨을 바로 잡겠노라"(書傳湯誓)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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