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머리에 꽃을

은바리라이프 2008. 5. 27. 21:59
제목 : 머리에 꽃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4-02-27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기성세대에는 언제나 신세대의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다. 수천 년을 두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버릇없고 위험한 존재이며 통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젊은이들이 역사의 중심에 서서 때로는 목숨을 바치며 헌신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신라의 화랑(花郞)으로 대표되는 젊은 엘리트 집단이다. 그들은 전쟁에 나가서 흔쾌히 목숨을 버렸지만 결코 경망스러운 젊은이들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죽을 기회가 없었던 화랑 출신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공로에 대한 어떤 보상도 거부하고 관직에 들어가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신명을 바쳤다.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고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삼국사기)
그러나 삼국사기를 기록한 김부식이 삼국시대의 정신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화랑의 제도가 진흥왕 37년 즉 AD 576년에 시작된 것처럼 기록한 것은 명백한 오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다함전에는 그가 가야 정벌에 참여한 것이 진흥왕 23년인 즉 37년 이전에도 화랑이 있음이 명백하거늘...”(신채호 ‘조선상고사’)
“국선(國仙),화랑(花郞)은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혹은 선인(仙人)이라 쓰는데......”(同上)
“이와 같은 기풍은 고구려나 백제에도 있었다고 국사대사전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소년 집단이나 소년 무사단이 신라에만 있었다고 볼 수 없다.”(김동리 ‘화랑과 샤머니즘’ 81. 10. 1.매일경제신문)
작가 김동리(金東里)는 위의 글에서 자유분방하고 때로는 건방진 젊은이들의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성숙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종교적 신념’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은 왜 쉽사리 목숨을 던질 수 있었던가? 나는 여기에 모종의 종교적(宗敎的) 신념(信念)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이것을 샤머니즘 이라고 일단 믿는다.”(同上)
AD 860년 열두 살의 나이로 당(唐)에 건너가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거기서 관직에 있다가 AD 885년에 귀국한 최치원도 김동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신라의 정신과 신앙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화랑도의 기본 정신이 어떤 종교적 바탕에 기인한다는 것만은 인정했다.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 교(敎)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최치원 ‘난랑비 서문’)
이 소년 엘리트 집단의 수련 과정을 김부식은 도의를 연마하고 산수를 찾아다니며 가악을 즐겼다고 하여 화랑을 놀러 다니는 ‘한량’처럼 표현해 놓았다. 그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풍류’라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이 풍류를 분명히 교(敎)라고 하여 신앙의 형태로 명기해 놓았던 것이다.
낭도(郎徒)의 리더였던 화랑(花郞)의 명예는 그냥 놀러 다니며 얻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있었는데 즉 산 속의 깊은 곳을 찾아다녀 ‘기도(祈禱)’에 전념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인정을 받는 일이었다. 이는 곧 천지를 창조하신 ‘상천하지의 하나님(수2:11)’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며 그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요3:5)
그런데 성경에서는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그러므로 바람(風)과 물(流) 즉 ‘풍류’는 젊은이들이 깊은 산에서 기도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화랑이 될 수 있다는 신앙적 수련과정을 나타낸 말이었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던 것은 일종의 ‘순교정신’이었으며 그들의 나라는 거대한 신앙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최치원은 이 ‘현모한 도’를 신앙 즉 ‘교(敎)’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처 화랑이 된 젊은이의 머리에는 ‘무궁화’를 꽃아 주었다. 이 무궁화는 예로부터 환꽃(桓花)이라고 했고 중국에서는 근화(槿花)라고 했는데 일명 천지화(天指花)라고도 했으며 이 꽃을 화랑의 머리에 꽃아 주었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삼국시대 뿐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13~15세의 낭도들은 심신을 수련하기 위한 모임에서 그들의 신분과 목적을 뽐내고자 저마다 머리에 꽃을 꽂았는데 그것이 무궁화 꽃이었다.(박춘근 ‘배달겨래와 무궁화’)
이 꽃을 두고 중국의 ‘산해경’은 군자의 나라에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훈화(薰化)가 있다 했고 ‘고금주(古今註)’에도 군자의 나라 지방 천리에 목근화(木槿花)가 많이 핀다고 했으며 고려 때에는 우리나라를 근역(槿域) 또는 ‘근화향’으로 불렀다. 이 꽃의 이름을 ‘무궁화(無窮花)’라 한 것은 이규보의 ‘동국지’가 처음이었는데 화랑의 머리에 무궁화를 꽂아주던 풍습은 조선 시대에고 계속되었다.
“장원급제한 사람의 복두에 꽂아 주는 임금의 어사화(御賜花)도 무궁화였고 문무백관이 중국의 연회에 참석할 때에는 무궁화로 장식한 모자를 착용했기 때문에 무궁화를 진찬화(進饌花)라고도 불렀다.”(同上)
또 한국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천단에 무궁화를 심었고 마을마다 길목마다 그리고 가옥의 울타리에도 이 꽃을 심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나라 안에서는 방방곡곡에 무궁화가 피어 있어 그 아름다움을 외국 사람까지 일컫게 되고 우리도 또한 스스로 우리나라를 무궁화동산이라 일컬어 온 것이다.”(조지훈 ‘무궁화’)
늦은 봄철에서 여름을 지나 서릿발이 높아 가는 가을에까지 아무리 져도 또 뒤따라 피어서 늘 새롭고 정결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조지훈은 그의 시적인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궁화는 몹시 예쁜 꽃이거나 향기가 짙은 꽃은 아닙니다. 아담하고 은은한 향기를 지닌 순결한 꽃입니다. 희디 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 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한복판에서 자주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 합니다.”
도대체 이 무궁화는 어떤 꽃이길래 상고의 때부터 이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소망과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그토록 오랫동안 겨레의 가슴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왔던 것일까?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