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공명이 말하기를

은바리라이프 2008. 6. 6. 15:01
제목 : 공명이 말하기를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4-03-13
BC 202년 유방(劉邦이) 세운 제국 전한(前漢)은 AD 8년 동이족의 후원을 등에 업은 왕망이게 전복되었다. 그러나 대권을 장악한 왕망은 신앙 회복을 원했던 동이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적대시하여 외교적인 고립을 자초했다. 더구나 토지의 국유화와 전매 정책에 의한 왕망의 급격한 개혁이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로 실패하자 곳곳에서 새 정권에 저항하는 반군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AD 25년 전한 경제(景帝)의 6세손이었던 유수(劉秀)는 왕망의 새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여러 세력을 평정 또는 흡수하고 전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후한(後漢)을 건국했다. 그는 왕망이 추진하던 개혁을 전부 취소해 버리고 제후들의 세력에 밀려서 왕조가 몰락하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들의 권한과 봉토를 축소하고 중앙 집권제를 더욱 강화했다.
신앙 문제에 있어서 그는 동이족과의 불화를 피하기 위해 동이족 출신이었던 공자의 유학(儒學)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인본주의자였던 유수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마22:37~40) 공자의 경천애인(敬天愛人) 신앙보다는 조상과 지신에 대한 제시를 강화하고 통제력 확보에 편리한 윤리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유학을 속박의 올가미로 이용했다.
이러한 유수의 생각은 그의 봉선의식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동이족의 성산인 태산(泰山)에 올라 상천(上天)에 경배했으나 하산하자마자 곧 양부에서 후토(后土) 즉 땅의 신에게도 제사를 드림으로써 이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서남문화권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 제사를 지낸 다음해인 유수 즉 후한의 광무제는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인본주의의 제국은 서양에서의 로마와 똑같은 길을 걸었다. AD 67년 후한의 명제(明帝
)는 중랑장 채음과 그의 일행 18명을 천축에 보내 불교를 배워오게 했다. 채음은 두 명의 중과 함께 불경 42장과 석가상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로서 중국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미 춘추시대부터 각국간의 무역을 주도하며 세력을 키우던 장사꾼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다가 후한시대에 들어서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정권과 결탁한 장사꾼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점점 계급화되어 토호와 귀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평민과 천민이 구별되면서 사회에서 공동체적 사랑이 사라지고 이기적 기복(祈福)사상만 자라나게 되었다.
더구나 후한의 광무제가 서남문화권의 이원론과 범신론에 기울어지면서 필연적으로 점복(占卜)과 무속(巫俗)이 창궐하게 되었고 과학적 이론인 음양오행설이 혹세무인의 도구로 사용되는가 하면 천문학적 지식은 점성술의 모습으로 몰락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참위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중국 문화의 바탕을 이루게 된 것이 소위 황노학(黃老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황제 헌원과 노자에게 비롯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도가 사상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기본으로 하는 무신론이었다. 이로 인하여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사상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방사(方士)가 나타나고 방술(方術)이 유행하게 되었다.
결국 이 황노학과 점복, 무속이 결합하여 방대한 사교 교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한 말에 이르러 또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나라가 어지러워지면서 이들 사교집단은 혁명 세력으로 둔갑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각(張角) 형제의 황건적(黃巾賊)이었다.
AD 184년 정치적인 혁명을 목표로 봉기한 황건적의 난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정부는 지방 세력의 협력을 요청했는데 황건적 토벌을 명분으로 일어난 여러 세력들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던 것이 화북지방의 조조(曹操)와 강남의 손권(孫權)과 서천 지역의 유비(劉備)였으며 이들이 나중에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세 세력 가운데서 가장 취약하였던 유비가 AD 219년 촉한의 소열제로 즉위할 수 잇게 되었던 것은 사상 최고의 지략가라고 하는 공명(孔明) 즉 제갈량(諸葛亮)을 기용하여 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비를 도와 촉한을 세우게 하고 그의 사후에도 국가 경영과 대외 전략에 활용하도록 ‘심서(心書)’ 50편을 남겼다.
종래의 사서나 전략서들이 주변의 세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소홀하게 취급한 데 비해 제갈량은 이 저서에서 당시의 동이 즉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늘 추구하던 이상적 정치가 동방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매우 부러워했다.
“동이의 성품은 예절이 바르고 대의가 분명하며 신하들은 주군에게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싸움에 능하다. 산을 의지하여 성읍을 만들고 호를 파서 물을 넣으며 바다가 많고 지세가 험준하여 천연의 요새처럼 견고하다. 다스리는 자와 따르는 자가 화목하고 백성이 평안하여 항상 기쁨에 넘치므로 감히 건드릴 수 없다.”
제갈량이 심서를 저술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는 산상왕(山上王)때이고 신라는 나해(奈解)이사금이 다스릴 때이며 백제에는 구수왕(九首王)이 있을 때였고 세 나라가 모두 하나님을 섬기며 임금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존경하는 나라였을 뿐만 아니라 화랑, 선인 같이 거듭난 젊은이들의 충성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제갈량은 늘 그 주군에게 정치의 대도(大道)를 역설하였고 촉한이 그 적을 공격할 때에는 적의 무도하고 무례함을 꾸짖는 것으로 그 명분을 삼았었다. 그런 제갈량이 동이에 대해서는 예절이 바르고 대의가 분명하다 라는 말을 썼으니 이는 감히 건드릴 수 없으며 오히려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나라로 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동이의 정치와 백성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던 제갈량은 그러나 촉한의 신하로서 동이를 경략할 계책을 마련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나라를 감히 도모한다는 것이 그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는 한 가지 계책을 남겨두었다. 그것은 곧 동이의 가장 큰 강점인 ‘상하화목(上下和睦)’을 깨뜨리는 전략이었다.
“만약에 동이를 침략할 계략을 세우려면 주군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 간에 이간책(離間策)을 써서 그들 사이에 틈이 생기게 하고 그 틈으로 들어가서 겉으로는 수교하는 척하여 내 편이 많아지게 한 다음 강력한 군사로 갑자기 들이치면 그 세력을 꺾을 가능서도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제갈량의 이 계책은 적중하였다. 서로 우애가 깊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형제국은 나중에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신라는 당에 붙었으며 백제는 왕과 신하 간의 알력으로 사이가 벌어져 먼저 망했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건의 내분 때문에 멸망하여 해동 삼국의 땅은 용들의 세력에 모두 점령당해 버렸던 것이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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