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알에서 나온 사람들

은바리라이프 2008. 5. 27. 21:51
제목 : 알에서 나온 사람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4-02-19
타락한 걸을 징벌하고 신정을 회복한 탕의 혈통에 대하여 ‘사기(史記)’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탕은 설의 14세 손으로 그의 모친은 간적이며 목욕을 하다가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곧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 순은 그에게 자(子)라는 성을 내렸고 그가 우의 치수를 도와 공을 세웠으므로 제는 그를 사도(司徒)로 삼았다.”
여기 나오는 ‘현조’는 바로 노아에게 방주 밖의 상황을 알려주었던 그 까마귀이며 셈의 장자들이 동방을 향해서 이동해 올 때 그들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던 태양 속의 검은 새였던 것이다. 우의 성은 사(姒)인데 그가 모계의 전통을 가진 족속이기 때문이며 설의 성은 자로 한 것은 장자의 권위를 중시하는 셈의 혈통이라는 뜻이다.
탕의 자손들 이름에는 새을(乙)자가 많이 들어가고 관직에는 작(雀)자를 많이 썼다. 이는 은(殷)의 혈통이 새를 귀히 여기는 동방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중국 대륙은 새를 귀히 여기고 회색 토기로 대표되는 동북방의 용산(龍山)문화권으로 나뉘게 된다.
새를 귀히 여겨 동방의 장자들에게 ‘동방(東方)문화권’ 그리고 후자를 ‘서남(西南)문화권’으로 부르려 한다. 이 후로 중국 대륙에서는 계속해서 이 두 문화권이 갈등을 일으키고 분쟁을 계속했으므로 그 이름을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BC 1800년경 서남 세력의 음란한 문화를 제압한 탕은 선정을 회복하여 그 수하에 정인(貞人) 집단을 두고 공동체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 시행하였다. 그는 갈(葛)의 수령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를 징벌하였고 또 역법을 개정하고 백성들에게 동방족의 전통대로 흰옷을 입게 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들은 하(夏)의 제위 세습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게 되었고 정인 집단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약 7백년이 흘러서 탕의 31세 손인 주(紂)가 또 음란과 난행을 일삼았으므로 창(昌)이 일어나 그를 제거하고 주(周)를 세웠다. 창의 성은 희(姬)로써 역시 모계 사회인 서남문화권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주는 권력의 근본을 하나님의 뜻에 둔다는 명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서(尙書)’는 창이 하나님으로부터 포악한 은(殷)을 멸하고 주(周)를 세우라는 천명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주의 문왕이 된 창은 스스로 동방과 서남의 두 세력을 모두 다스리는 정통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광대한 천하를 통치하면서 주의 천명 사상은 차츰 변질되기 시작했다. 광활한 지역의 주민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중앙정부가 지역의 신들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제후의 궁궐에는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지역신 및 농업신을 모시는 사직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주의 실책이었다. 신앙이 분열되면 통치권도 분열되는 것이다. 이질적인 동방과 서남의 문화가 융화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런 정책은 결국 국가의 분열을 가져왔다. 천명을 빙자하여 정권을 잡고 또 정권유지를 위하여 하나님을 버린 주는 몰락하여 수도를 낙읍에 옮겼고 새로운 나라들이 우후 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가 동천(東遷)했던 BC 770년에서 한, 위, 조가 독립했던 BC453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하고 그 때로부터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한다. 이 때부터 세상의 왕들은 모든 위선의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임금’ 즉 ‘왕’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를 다시 통일한 진의 정(政)은 삼황의 ‘황’에다 오제의 ‘제’까지 붙여서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했다.
BC 202년에 이 진을 다시 뒤엎고 천하를 인수한 한의 유방은 진의 황제 칭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는 급격한 행정 제도의 개혁으로 실패한 진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중앙집권적 전제체제를 확립하여 강력한 정권을 유지했으나 1인에게 집중된 권력이 외척의 세력으로 넘어가면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다 건너의 한반도에서는 그 때까지 왕이 없었다. 대륙에서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왕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한반도는 끝내 왕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BC57년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가 거서간(居西干)으로 옹립하면서 사로국(斯盧國) 즉 신라가 탄생했다. 이스라엘이 사울 왕을 세운 BC 1050년보다 993년을 더 기다려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왕을 세운 것이다.
다시 BC 37년에 또 알에서 나왔다는 주몽(朱蒙)이 고구려를 열었다. 혁거세와 주몽이 모두 알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다 은(殷)의 탕과 같은 동이족이며 태양 속의 검은 새 즉 천사(天使)의 인도를 받아서 동쪽으로 온 형제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BC 18년에 주몽의 아들 온조(溫祚)는 그 동료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百濟)를 건국했다.
한편 진시황의 대대적인 박해와 잇단 한의 전제정치로 위축되어 있던 동방족은 AD 8년 그들의 지원을 업고 신(新)을 건국하여 황제가 된 왕망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되면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물가를 적극적으로 조절하여 희망이 보이는 듯했으나 결국 고구려를 비롯하여 그를 지원한 모든 동방의 왕들을 배신하고 그들을 모든 후(侯)로 격하시킴으로써 동방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게다가 AD 25년 전한(前漢) 경제의 6세 손인 유수(劉秀)가 대륙을 재통일하고 후한(後漢)을 세우자 동방족의 희망은 다 끊어져버렸다. 바로 그 때에 AD 42년 소호김천씨의 후예인 수로(首露)가 한반도의 남단 김해의 구지봉에 도착하여 ‘가야’를 열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자색 줄이 내려와 땅에 닿는지라 줄 끝을 찾아가 보니 붉은 폭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매 해같이 둥근 황금알이 있었다....”(삼국유사 ‘駕洛國記’)
가야국이 열리면서 삼국에는 눈부신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야의 제철기술이 삼국을 발전시켰고 삼국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수로 왕을 초청하여 자문과 지도를 받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때부터 삼국에는 은(殷)의 정인(貞人)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젊은이들의 수련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인의 선인(先人)이며 신라의 화랑(花郞)이었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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