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름다웠던 날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4-02-06 |
오순절의 대폭발 사건 이후 안디옥에 전진기지를 설치한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은 BC 1406년에 시작되었던 히브리 백성들의 가나안 진격을 연상케 하는 승리의 대행진이었다.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에 전략적 포석을 하고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가는 곳마다 한 알의 밀이 되어 승리의 깃발을 그들의 피로 장식했다. AD 43년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칼에 죽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안드레는 아가야 지방에서 X자 형의 십자가에 못박혀서 순교했고 셀롯인 시민은 페르샤에서 톱으로 잘려 죽었고 다대오도 역시 페르샤에서 순교했다. 에디오피아 왕 힐타코는 마태를 땅바닥에 못박아서 죽였고 맛디아도 역시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나다나엘은 아르메니아에서 전신의 가죽을 벗기운 채 십자가에 달렸다. 로마에 대화재가 있었던 AD 64년에 체포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고 바울도 이 때에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AD 72년에는 도마가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네 개의 창에 찔려 순교했고 빌립은 AD78년 리비아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요한은 에베소에 있으면서 사도들의 복음서와 서신들을 수집하여 후세에 남겼고 AD 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밧모섬에 유배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적었으며 AD 96년 에베소에 돌아와서 눈을 감았다. 뿐암 아니라 구름 같이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피를 뿌렸고 그 후에도 이러한 '밀알의 행진'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AD 100년 경에는 로마 교회의 감독이었던 클레멘스가 순교했고 AD 107년에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냐티우스가 로마로 잡혀가서 맹수에게 먹혔으며 AD 156년에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이 나게다스 총독에게 체포되었다. 총독이 그에게 예수를 배반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지난 80여년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번도 나를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에는 예수께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나오고 있다. 이 일곱 교회는 당시의 교회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역사적으로는 시대별로 전개될 교회의 특징을 가르쳐주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서머나 교회는 박해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하나님께서 새로운 교회의 역사를 운행하고 계시는 그 시대에서 성도들의 순교는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었다. 이 시대가 교회로서는 가장 아름답고 부요했던 시기이며 가장 자랑스러운 때였던 것이다. "네가 장치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여기 나오는 '10일 동안의 환난'은 그리스도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했던 로마의 황제 10명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 10명 중의 첫째가 AD 54년부터 AD 68년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네로였다. 로마의 빈민들은 자주 방화를 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표시했는데 네로는 AD 64년에 있었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의 짓으로 몰아서 대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이 10명의 명단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과 관계가 깊은 인물은 AD 69년부너AD 79년까지 집권했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인데 그는 본래 네로 황제가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유대에 파견했던 장군이었다. 그는 우선 살릴리 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의 반란군 지휘자였던 요세푸스를 사로잡았으며 예루사렘에 대한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갔다. 예수께서 예고하신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21:20) 그 때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서 네로에 대한 반역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로가 자살하자 새 황제 갈바가 들어섰으나 다시 혼란은 계속되어 황제의 자리가 오토에게도 또 다시 비텔리우스에게로 옮겨가는 동안 알렉산드리아와 가아사랴의 주둔군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고, 그는 아들인 티투스에게 예루살렘 공격을 맡긴 다음 로마로 들어가 비텔리우스를 격파했고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AD 70년 5월에 예루살렘 공격을 시작한 티투스 장군은 열심당 군사들이 내부의 분쟁으로 대부분의 식량을 불태워버린 것을 알고 성주의에 공성을 위한 토성만 쌓아 놓고 공격을 늦추었다. 성 안의 백성들이 식량의 부족으로 아사 상태에 이르자 서로의 아이를 바꿔서 잡아먹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큰 진노가 있겠음이로다"(눅21:23) 5월에 시작된 예루살렘 공격은 결국 9월에 가서야 끝이 났다. 성안에 진입한 로마의 병사들이 성전의 돌 속에는 금이 들어 잇다는 소문을 믿고 그 돌들을 모두 깨뜨려서 가루로 만들어 놓았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로마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을 유대인들이 삼대 절기의 하나로 지키는 칠칠절 기간이었으므로 각지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모두 성안에 있었기 때문에 식량의 결핍으로 인한 비극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로마군이 성 안에 들어갓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있었고 1백만명도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사로잡혀서 모든 이방에 노예로 팔려갔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21:24)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AD 62년 그들의 지도자였던 예수의 아우 야고보가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순교한 후 거의 모든 예루살렘을 떠났고 남아 있던 성도들도 열심당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그 곳을 떠났고 남아 있던 성도들도 열심당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그 곳을 빠져 나갔기 때문에 저항하던 마사다 요새의 9백60명 주민들을 AD 73년 5월 1일 전원이 자결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에 슬픈 상처로 남게 되었다. AD 79년에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자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티투스는 그 부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예루살렘을 초토화한 일을 나중에 몹시 후회하여 선행에 힘쓰려 햇으나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첫 해에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피이 시가 통째로 매몰되는 큰 참극이 일어났고 그는AD 81년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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