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군자의 나라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3-06-20 |
이렇게 동방의 백성들은 하니님의 규례대로 장자권자가 백성들을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흔히 우리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아내려고 애쓰는 많은 사학자들이 지나친 국수주의적 시각으로 고대의 우리 민족이 그 당시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했다고 주장함으로서 그들이 가꾸어 놓았던 이상적이 신앙 공동체의 발견을 놓치고 있다. 우리의 사학자들이 고대의 우리 나라가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주장함으로서 그들이 가쑤어 놓았던 이상적인 신앙 공동체의 발견을 놓치고 있다. 우리의 사학자들이 고대의 우리 나라가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보는 이유는 앞의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등을 비롯한 많은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이 동방족은 6내지 10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이(東荑)는 부여, 고구려, 동옥저, 파루, 예, 한, 진한, 변한, 변진, 왜(倭)등을 말한다" ('삼국지') 그러나 우리 사학자들이 이 열개의 이름을 대제국의 제후국으로 보는 시각은 우리 민족이 이우었던 이상적이 신앙공동체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열개의 이름들은 어떤 집중된 권력과 무력에 굴복하고 있는 제후국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 고락을 같이 하며 동방으로 이주해온 형제들이며 평화와 우애로 함께 살아온 공동체의 이름들인 것이다. 사냥꾼 니므롯을 비롯한 인본주의의 세력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 했을 때 그곳을 떠나온 사람들은 어느 한 집안의 특정한 가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수메르의 타락을 근심하던 엘람의 일부와 장자권을 빼앗긴 앗수르의 후손 등의 주력을 이루었을 것이나 장자들을 따라 나섰던 함과 야벳 집안의 일부 후손들도 섞여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 고대사의 초기에 10개의 형제공동체가 있었다고 기록해 놓은 '후안서'의 증언은 매우 흥미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우리의 역사와 닮은 '욥기'에도 '동방사람 중에 가장 큰 자(욥 1:3)'였던 욥의 자녀가 모두 10명이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욥1:1-2) 뿐만 아니라 욥기에 나오는 그후의 기록도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며 노래하고 춤추었던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눈으로 보는 듯 그려놓고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베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4-5). 물론 욥기가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1916-1993)가 그의 저서 '한국찬가'에서 한국의 역사를 욥기에 비교했던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든 후한서가 기록해 놓은 동방족의 이름 열개는 봉건 제국의 제후국이 아니라 한 형제요 자매들이었다. 그들은 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하여 아우들에게 땅을 넘겨주고 새 땅을 찾아서 떠났을 정도로 아우들을 사랑하고 서로 양보하는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동방에 정착한 장자의 백성들은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사달의 넓은 들판과 한반도에 퍼져나가며 새 보금자리들을 일궈나갔다. 그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나가며 살았으나 그들에게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이 신앙의 대상이었고 그들은 늘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살았다. "하나님은 오직 한 신으로 가장 높은 으뜸 자리에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고 전세계를 주관하고 수 없이 많은 사물을 만드시니 넓고 넓게 둘러싸므로 들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아주 밝고 밝아 작은 티끌 하나 새지 않도록 하시었다"(규원사화). 이 때부터 이미 우리 조상들은 '삼위일체'의 신앙을 알고 있었다. 단군시대의 사관이었던 신지(臣智)는 '삼일신고(三一神誥)라는 책을 썼는데 지금은 그 전문이 유실되어 찾아볼 수 없으나 그 책의 내용은 바로 삼위일체의 신앙을 가르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몸이고 셋은 쓰임이며 세 신은 하나이고 셋이 모이면 하나가 된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삼위일체의 신앙을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메시야적 구원관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왜 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서 정착했으면서도 그 땅을 영원히 거할 땅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같은 나그네 정신으로 '구원'을 기다리며 살았던 것일까?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寓居)하여 동일한 유업을 약속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成)을 바랐음이니라" (히 11:9-10). 즉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 까지는 땅 위의 어떤 곳도 안식할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나그네로 살았다. "또 땅에서도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또 다른 성을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약속으로 받았던 가나안 따은 장자권을 뒤엎었던 바벨론과 가나안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땅이었다. 그 '잃어버린 땅'의 회복은 바로 진정한 장자권자인 '메시야'가 와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히 7:2-1).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늘 그들이 받은 약속의 땅을 영원히 거할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의 시인들은 늘 어디론가 '떠나겠다'고 노래해 왔다. 나두야 간다 자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꺼냐 나두야 간다...... (박용철 '떠나가는 배') 이런 '나그네 정신'과 '구원'에 대한 소망이 '메시야' 신앙으로 이어졌고 세상에 오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그의 아들이라고 표현할 때 하나님은 본래 한분이시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세분으로 활동하신다는 삼위일체의 신앙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했던 우리 선조들의 고대사회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생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 중의 하나인 '회남자(淮南子)'는 이 동방에 있는 장자의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동방에 군자(君子)의 나라가 있으니 동방의 목덕이 어진고로 군자의 나라가 있다 하느리라....."(회남자) <김성일 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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