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브라만의 꿈과 현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3-06-10 |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를 세워놓고 살아간다. 그러나 살다보면 목표가 흔들리는 수도 있고 그 목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과감하게 궤도수정을 하는 수도 있다.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의 목표를 세웠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그 방향을 하나님 쪽으로 대전환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의롭고 정당한 목표를 세워놓고도 그것을 향해서 전진하다가 그 험난함에 지치고 고초를 견디기 힘들어서 도중하차를 하는 경우에는 어디로 가서 무슨 노력을 하던 실패만을 거듭하는 수가 있다. 셈의 장막을 따라서 동방으로 향해 가다가 도중에 갈라져 나갔던 일부 야벳과 구스의 형제들이 바로 그런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서 방향을 돌렸던 그들은 중앙 아시아 남부의 늪지대를 방황하다가 그들 중의 구스 족속은 천산산맥과 힌두쿠쉬산맥 사이의 협곡을 지나 타림분지로 들어섰고 야벳 족속은 그대로 힌두쿠쉬산맥을 넘어서 인더스강 유역의 비옥한 평원으로 진입했다. 그래서 힌두쿠쉬산맥의 이름은 힌두와 구스가 작별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야벳 족속이 힌두쿠쉬산맥을 넘어서 인더스가 유역으로 진입했을 때 그 땅은 이미 그들이 기대했던 '우스'. 즉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다. 이미 그 지역에는 '드라비다족'이 먼저와서 '인더스문명'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드라비다족은 어떤 민족이었던가. 야벳의 경건한 형제들이 러시아 평원을 돌아서 우랄산맥을 넘었다가 춥고 배고픔에 견디지 못하여 다시 남하하느라고 먼 길을 돌아오는 동안 이미 인더스강 유역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페르샤만을 끼고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쓰고 있던 드라비다어는 지금도 인도의 남부에서 인도 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그 언어의 구조는 한국어 일본어 등과 같은 교착어이다. 한국어의 어원을 찾아서 흥미있는 추적을 했던 '멀고 먼 힌두쿠'의 저자 김병호 박사는 이 드라비다어에 '나(I)'와 '너(you)'라는 단어가 있으며 같은 드라비다의 어군에 속하는 싱할리어에서 '엄마'와 '아뻐지'라는 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저서를 쓰고 있다 이 드라비다족은 그 언어의 구조로 보아 틀림없이 셈에 속하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생활관습은 모두가 비셈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가족제도는 완전히 모권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종교는 바벨론이나 가나안처럼 복잡한 신들의 계보를 가진 모신중심의 종교였다. 힌두교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신들의 계보라든가 소를 섬기는 신앙이라든가 흔하게 발견되는 나체의 여신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도의 음란한 문화가 모두 이 드라비다족의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또 이들은 구운 벽돌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신전과 창고와 목욕탕 등을 건축하고 모헨조다로나 하라빠 같은 거대한 도시문명을 건설하였다. 셈계 민족 가운데서 당시에 이러한 기술과 저력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면 우리는 오직 한 민족을 꼽을 수밖에 없다. 즉 셈의 장자로서 천하를 강포와 탄압으로 지배했던 수메르 민족밖에는 없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였던 이 수메르는 바벨론과 가나안이 들여보낸 '이난나' 여신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배반했으며 앗수르와 아카드의 공격을 받아서 동족으로 밀려가다가 페르샤만 입구의 라가스에서 멸망했다. 바로 이 타락한 수메르의 유민들이 페르샤만의 북쪽 해안을 끼고 도주하다가 인더스강 유역으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한때 기스와 우룩 같은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던 수메르의 유민들은 인더스강 유역에 들어가서도 거대한 인더스 문명을 건설했으나 바벨론과 가나안으로부터 받아들였던 여신숭배의 음란한 풍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다시 그들의 화근이 되었다. 드라비다족의 유적 가운데는 힌두교의 신화에 나오는 음란과 파괴의 여신인 '칼리'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바로 가나안 족속이 크레타섬에서 만들었던 '카르'여신의 변형이었다. 인더스 문명을 건설했던 드라비다족의사회는 모계중심 사회의 특징인 사치와 향락 그리고 여신 숭배에서 비롯되는 음란한 풍습으로 인하여 점점 퇴폐한 사회가 되어갔다.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잠 7:25-26) 드라비다족의 인더스 문명이 사치와 향락의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에 러시아 평원을 거쳐서 먼 길을 돌아온 야벳의 집단이 힌두쿠쉬산맥을 넘어서 인더스강 유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아리안족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샤의 고어에서 모두 '좋은 가문'이라는 뜻이었다. "아리안족은 대체적으로 폴란드에서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커다란 늪지대에서 원래 살았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카스피해 유역과 남 러시아 늪지대에서 살았던 이들이 목초지를 찾아 유럽 소아시아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퍼져나갔다."(조길태 '인도사' 40p) 중앙 아시아에 거주하던 아리아안족이 인더스강 유역으로 넘어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BC 2000년경부터이다. 그들은 처음에 침략자가 아니라 가축과 가재도구를 가지고 평화적 이주민의 형태로 들어왔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신앙과 생활습관이 드라비다족과 갈등을 일으켰다. 아리안족은 비록 야벳의 혈통이었으나 장자의 장막을 따라서 아라랏산을 넘어갔던 경건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는 오히려 셈의 전통을 따라서 가주장적인 문화였고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셈계의 유일신 신앙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서 보는 것과 같은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으며 여성들은 부정을 탄다고 하여 제사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아리안족에서는 남자에게만 재산 상속권이 있었고 특히 장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며 철저하게 일부일처제를 지켰고 간통과 도둑질을 한 죄는 반드시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처음에 유목민으로 들어왔으나 인더스강 유역에 정착하여 차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먼저 와 있던 드라비다족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드라비다족의 농사기술이 우수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도구들과 상품들을 그들로부터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거래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경건한 아리안의 백성들이 드라비다족과 상거래를 하면서 그들의 사치스럽고 퇴폐적인 음란한 문화에 물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래 가책을 받는자의 신앙이 더 극단적으로 되는 법이다. 셈의 장막을 따라가다가 도중하차를 하여 자책에 빠져 있던 아리안족은 사방에서 음란한 드라비다족의 문화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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