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개척자들의 발자취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3-05-26 |
아우들과의 갈등과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 유랑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동쪽을 향해서 떠난 셈의 후예들은 우랄 산맥을 넘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셈의 장자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서 다시 대장정에 나섰을 때 '셈의 장막에 거하라'던 노아의 명령을 준행하려고 작정한 야벳의 일부 후예들이 그들을 따라나섰고 또 처음부터 따라온 구스 가문의 일부도 여전히 그들의 대열에 참가했다.이 거대한 이동의 발자취는 여러 가지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언어의 분포이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시베리아와 몽고를 지나 만주에 도착하고 한반도를 지나 일본에까지 이어지는 셈의 대장정이 광범위한 우랄 알타이 어군의 분포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어와 알타이 언어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사람은 핀란드의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드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한국어에 관한 관견(1928)'과 알타이 어학개설(1952)'에서 한국어가 튀르크어와 몽골어 그리고 만주 퉁구스어 간에 친근관계에 있다고 발표하였고 '한국어의 어원연구(1949)'는 아직까지도 한국어 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역시 알타이어 학자인 포페는 1950년 이 논문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와의 친근성은 의심할 바 없다." 알타이 제어란 만주 퉁구스어와 몽골어 그리고 튀르크어 등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터어키 공화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터어키어도 이 튀르크어에 포함되는 방언인 것이다. 이는 바로 한국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모스크바와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지나 만주땅으로 도착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준다.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인 김방한 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어의 계통(1983)'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어의 계통 연구는 알타이 제어에 관한 깊은 지식이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은 한국어와 전반적으로 비교할 만한 대상 언어가 일본어를 제외한다면 알타이 제어밖에는 없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알타이 어족설에 몇가지 혼란을 가져오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어의 어휘들이 다양한 곳에서 혼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어의 어휘 가운데 영어 희랍어 힌두어 등의 어휘가 다수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온 '멀고 먼 힌드쿠시(1991)'의 저자 김병호 박사는 특히 한국의 수사가 야벳계의 아리안어와 관계가 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한국어의 '하나, 둘, 셋'은 영어에서 '원, 투, 쓰리' 그리스어에서는 '에나, 디오, 트리아' 다리어로는 '약, 두, 세' 이탈리아어는 '우노, 두에, 트레'등으로 되어 많은 유사점을 보이는 터어키어의 '베르, 아키, 오취'나 몽골어의 '니키, 하여르, 오롭'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한국어의 많은 어휘들이 야벳의 언어에서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휘의 혼입만으로 한 언어가 그 상대의 언어에서 왔다는 것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근대적 어휘는 유감스럽지만 대부분 일본에서 온 것이다. 가장 먼저 문호를 개방했던 일본이 먼저 신문화에 적합한 새로운 어휘들을 만들었고 그것이 한국과 중국으로 역수입되었기 대문이다. 즉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국가, 학교, 철학, 과학, 회사······등 한자 어휘의 거의 8할 이상이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한국에 그런 어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한국사람은 일본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어의 계통을 찾아갈 때에는 그 문장의 구조와 형태와 음운에서 먼저 고찰을 해야하고 어휘와 어원의 문제는 사실상 지엽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어휘 가운데 역사상으로 가장 아리안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국에 기독교의 복음을 들고 상륙했던 AD 48년과 북쪽으로 들어온 불교가 고구려의 공인을 받았던 AD372년이었다. 본래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겼던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하는데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또 가야문화연구소의 김도윤 소장은 '허황옥'이 들고온 성 도마교회의 복음이 먼저 가야에 전래되어 가야와 신라도 모두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수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밝힌 바 있다. 기독교 국가가 된 신라에서 외래종교인 불교는 좀처럼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으나 불승 이찬돈의 설득에 넘어간 법흥왕이 그 재위 14년(AD527)에 대신들의 반대를 꺾고 비로소 불교를 공인했던 것이다. 불교로 돌아선 법흥왕은 그것을 공인한지 5년 후인 AD 532년에 기독교 국가였던 가야국을 전복시켰고 그 후로는 불교의 세력이 한반도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셈계의 알타이어에 속해 있던 한국어는 야벳의 언어권이었던 중국어와 인도어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고 한국어에는 중국어와 인도어의 어휘들이 다시 혼입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어 가운데는 셈계의 어휘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언어학자 서정범 교수는 그의 저서 '우리말의 뿌리(1989)'에서 남자를 의미하는 '아들'과 여자를 의미하는 '아내' '아낙네'를 그 예로 들었다. 즉 '아들'은 일본어에서 '오토코(남자)' 튀르크에서 '아담(사람)' 위굴어에서는 '아듬(사람)' 그리고 아이누어에서는 '우타르(사람)' 등의 흔적으로 남아 있으며 '아내'는 일본어의 '온나(여자)' '아네(누이)' 우즈벡의 '오나(어머니)' 그리고 튀르크어에서는 '아나(어머니)' 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인 흔적들 뿐 아니라 그 신앙의 뿔리를 찾아보면 더 확실한 민족이동의 경로를 찾아낼 수가 있다. 니므롯의 인본주의 혁명에 찬성할 수 없어서 메소포타미아를 떠났던 것이므로 우랄 알타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그들이 본래 했던대로 유일신 하나님을 섬겼고 성경의 창조론을 그대로 믿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1~3)" 이 창세기가 기록된 중동지방과는 반대쪽에 떨어져 있는 한국의 고대 창조설화도 성경의 창세기를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한 신으로 가장 높은 으뜸자리에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고 전 세계를 주관하고 수없이 많은 사물을 만드시니······"(규원사화) "하늘과 땅은 혼돈하여 아직 나누어지지 않았고 귀신도 매우 슬퍼하고 해와 달과 별들도 잡것에 싸여 질서가 없었다. 바다도 흐리고 깊은 많은 생물들의 자취를 찾을 길 없었고 우주는 단지 암흑의 큰 덩어리일 뿐이었다······"(규원사화)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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