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제목 : 언제가는 돌아가리

은바리라이프 2008. 5. 26. 00:52
제목 : 언제가는 돌아가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2003-05-15
아라랏··· 터어키의 동북방 아르메니아 지방에 솟아 있는 해발 5.165미터의 이 산은 바로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7월 곧 그 달 17일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강하여 10월 곧 그 달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창 8:4~5)
그러므로 아라랏 산은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이 방주에서 나와 새로운 세계사를 시작했던 장소이다. 즉 아라랏 산은 바로 홍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던 셈의 장자들에게 있어서 아라랏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셈의 장자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는 늘 산 위에서 드렸기 때문에 홍수 이후의 시대에는 아라랏이 바로 그들의 성산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셈족의 언어에는 아라랏과 유사한 발음의 어휘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아라' '아리' '아르'등의 어간이 들어간 말들이 셈족속의 어느 언어에나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도 히브리어의 '아라'가 '나그네'를 의미한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아라랏 산'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의 고향이었고 인류 최대의 작별 즉 '대분단'이 있었던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형제들이 서로 헤어질 때 누구보다도 가장 가슴 아파야했던 것은 바로 '장자'들이었다. 셈의 장자들은 바로 그들이 장자의 책임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대분단의 책임자로서 깊은 한을 되새기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라랏 산에서 작별해야 했던 모든 족속의 슬픔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 개인들마다 또 얼마나 큰 슬픔이 있었을 것인가. 당시의 인류는 모두 모여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집안끼리 즉 셈과 함과 야벳 또는 그 아랫대의 족속들 곧 셈의 다섯 형제와 함의 네형제 그리고 야벳의 일곱 형제의 족속들이 서로 뒤섞어서 혼인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도 많은 자녀들이 태어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족장 회의에서 어떤 족속은 아라랏 산 북쪽으로 떠나가고 어떤 족속은 남는다고 발표를 했을 것이니 그 때문에 일어난 혼란이 얼마나 켰을 것인가? 결국 사람들은 가족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느 한 족속을 택해야 했고 그 결정에 따라서 수많은 형제들이 서로 이별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아라랏 산의 계곡은 서로 헤저져야 하는 부부와 자식 그리고 형과 아우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을 것이며 집안이 달랐기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 연인들의 흐느낌이 고개 마루를 뒤덮었을 것이다. 어쩌자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이토록 가슴 아픈 작별을 겪도록 슬픔의 드라마를 계획하셨던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징계 속에 사실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의도가 거기 숨어 있었다는 것을 살펴왔다. 그렇다면 이 커다란 작별의 드라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 중의 하나는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거론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이 세상에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히 4:3)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는데(요 3:16) 세상과 벗이 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사탄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은 바로 사람의 영안을 멀게 하고 정욕이 눈을 밝게 하여(창 3:7) 사람의 눈으로 하여금 세상을 보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을 따라 나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를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며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이렇게 해서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다가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목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하여 작별의 드라마를 연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갖지않도록 유도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않은 나그네처럼 살았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름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이러한 나그네의 정신이 가장 많이 계승되어 온 민족이 바로 한국 민족이었다. 같은 셈의 후예이고 우랄 알타이 어족이지만 바로 옆의 나라인 일본 사람들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바로 섬의 끝까지 옮겨간 사람들이어서 '떠남'의 미학을 모른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라하찌부'로 몰리는 것이다. 즉 마음의 관습을 어겨서 온 마을 사람드로부터 따돌림 받는 사람을 '무라하찌부'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을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신문을 보면 하루가 멀다고 단신부임 때문에 자살했다는 사람들의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대기업의 사원으로 지방근무 발령을 받았으나 집안 사정때문에 혼자서 부임해야 하는 사람들이 집을 떠나게 된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마을'이라는 이름의 '세상'에 매여서 죽음을 택하는 셈이다.
한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한국 사람들은 일찌감치 그런 일에 익숙해 있다.
오랫동안 지방이나 외지에 혼자 나가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고 이미 수십년 전에 고향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예 해외로 이민을 가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리랑의 노래로 한국 사람들에게 작별의 훈련을 시켜서 그들을 전세계에 보내 놓으셨던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큰 사업을 계획하고 계신다. 이 세상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셨던 수많은 작별의 체험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에덴에서 우리를 내보내셨던 하나님의 그 아리고 쓰라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밀양아리랑에 나오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이 '아리고 쓰린'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언젠가 우리는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그 아프셨던 마음을 이제 우리가 모두 알았으니 그분의 아픔을 위로해 드리기 위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다 마친 다음에 우리는 모두 그분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순례자 이 세상에서 언젠가 지벵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김성일님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