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에 흐르는 저주, 그 뿌리를 뽑아라! - 신앙길라잡이
몇 년 전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이 서점가를 강타한 적이 있다. 그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 따위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주장에 대한 찬반 논쟁은 여러 신학잡지나 신앙잡지를 통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존 F. 케네디 가문의 비극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존 F. 케네디 가문을 잠깐 살펴보면, 먼저 존 F.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46세의 나이에 암살당했고, 그의 아버지 로버트 케네디는 42세에 목숨을 잃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맏형인 조세프 케네디 주니어는 2차 대전 중 29세 때 비행기 추락사했고, 여동생 캐슬린도 1948년 비행기 사고로 28세 에 사망했으며, 막내 동생 테드 케네디는 비행기 사고로 허리를 다쳤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 마이클 케네디는 1998년 1월 2일에 콜로라도 주(州) 애스핀의 스키장에서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마이클 케네디의 아버지 로버트 케네디는 1968년 6월에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 선거운동 중 캘리포니아에서 암살당했다. 1998년에 있었던 마이클 케네디의 사망은 케네디 가(家)로는 여섯 번째 요절이다.
그 외에 마이클의 형 데이비드 케네디는 1984년 마약 과다 복용으로 숨졌으며, 케네디 대통령 자신은 암살되기 전에 에디슨병을 포함하여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암살되기 3개월 전에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이 이틀 만에 숨지는 아픔을 겪었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요절 및 비극적 사건이 케네디 가(家)에 계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케네디 가(家)의 이야기는 케네디 가문에만 국한되는 특수한 예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알 수 없는 일들이, 특히 비극적인 일들이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보고 듣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어떤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 해답은 영적인 데 있다. 우리가 그 해답을 찾으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영혼과 육체를 지닌 인간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먼저 인간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집합체인 가정, 그리고 일정한 혈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가정들의 집합체인 가계(家系)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그 코에 생기를 부어 아담 곧 생령이 되게 하셨다(창 2:7). 이때부터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류는 영혼과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육체를 위해서는 식물을 주셨고(창 1:29),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를 위해서는 식물을 먹고,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산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가 된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 17) 하셨다.
즉 모든 것을 먹으라 하심으로써 육체가 모든 식물을 먹고 살게 하셨지만, 먹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영에 옴으로써 이때로부터 영은 그 계명에 의해 살게 된 것이다. 아담은 이 계명을 지키면 살고, 이 계명을 어기면 그 영이 죽는 것이다.
이는 마귀가 예수를 시험할 때 예수께서 마귀를 향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신 8:3)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지니고 있기에 식물로만 사는 자가 아니고 식물과 진리로 사는 존재다.
죄를 책임지는 영혼
인간의 육체는 시한적이나 영혼은 항구적이다. 육체는 항구적인 영혼을 담는 시한적인 그릇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시한적인 육체가 죄를 지어도 그 책임은 영혼이 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아담의 영은 이 계명을 지키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순간 하나님의 경고대로 아담은 죽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나서도 아담은 자녀를 낳으며 930세를 살았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순간 육체가 아닌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죄는 육체가 지고 책임은 영혼이 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영혼이 진다 해서 죽을 때까지 육체에는 아무런 재앙도 닥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 그 즉시 육체가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방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저주를 받았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아담은 열심히 땀을 흘려 수고해야 겨우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7~19).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 가운데 빠졌으며(롬 5:12), 일평생 죽기를 무서워하여 마귀에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음란과 불의, 거짓, 탐욕, 시기 등 갖가지 죄악들이 세상에 들어왔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그의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만을 행하게 되었으며, 그 영적인 죄악으로 말미암은 저주가 육체와 환경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서론에서 예를 든 케네디 가(家)의 비극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으로까지 연결된다.
죄와 저주를
모두 담당하신 예수
멸망할 수밖에 없던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되었으니, 인류가 살 길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 그는 오셔서 친히 고난을 받으사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담당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이 헐렸고(히 10:19, 20, 마 28:50, 51),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 예수께서 창에 찔리고 채찍에 맞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이 깨끗함을 받았다. 즉 예수의 고난받으심과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으며, 모든 저주에서 자유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죄 사함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육체의 저주에서도 자유한 신분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딛 2:14)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행 10:38)
성도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 있는 신분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에게는 저주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자기 병은 없다. 만약 성도가 병들어 있다면 그 병은 자기 병이 아니라 남의 병이다. 즉 귀신이 가지고 들어온 병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면 그 병은 떠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권세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저주의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
그렇다면 케네디 가(家)의 비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는 바로 적용의 문제다. 모든 인류와 마찬가지로 케네디 가(家)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막힌 담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의 공로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께서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인정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저주가 아니라 그 가계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로 인해 생긴 것이다.
어떤 이는 예수 믿는 신자에게는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한다(벧전 5:8). 마귀의 공격 대상에서 믿는 자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한번 쫓겨 나간 귀신도 두루 다니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하면 자기가 나온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마 12:43∼45).
그러므로 성도가 깨어 있지 않으면 귀신이 그 틈을 타고 들어와 우리의 환경과 육체를 파괴하는 일을 한다. 성도가 늘 깨어 있어 근신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축복은 천 대에, 저주는
삼사 대에 이른다
성경에는 아주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다. 우리는 간혹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자기만 책임지면 될 뿐, 자기 가족이나 자손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축복과 저주의 문제에 있어서 아비와 자손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한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신 28:58, 59)
“주는 은혜를 천만 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 32:18)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시 103:17, 잠 20:7)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오직 복과 생명만 베푸시는 분으로 오해하는데, 하나님은 복과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저주와 사망, 그리고 유혹도 함께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나 결코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여 복을 택하면 복을 베푸시고, 저주나 유혹을 택하면 그대로 역사하신다.
구약 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다수의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르고자 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거짓말하는 영(천사)이 임하여 아합 왕을 꾀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게 한 경우가 있다(왕상 22:19).
또한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 왕이 하나님을 떠나 그 말씀에 순종치 않자,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고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신이 심하게 임했던 경우(삼상 16:14)도 있다. 그들이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최후가 비참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과 생명이 아닌 저주와 유혹을 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자손들에게는 ‘거짓말’하는 못된 습성이 있었고, 다윗과 그 자손들은 ‘음란’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다윗 가계의 음란의 문제는 살인이라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져 유혹을 택한 결과가 얼마나 큰 화를 가져오는지를 실감케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도 깨어 있지 않으면 미혹하는 영에 의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자손이 살기 위하여 복과 생명을 택하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복과 생명을 택하면 우리 자신과 자손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망과 저주와 유혹을 택하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도 그 저주와 사망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행위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까지도 그 결과가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가정을 만들자
경우에 따라 자신이 그 가정에서 또는 더 나아가 그 가계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일 수도 있고, 조상 때로부터 예수를 믿어온 경우일 수도 있다. 조상 대대로 예수를 믿지 않았던 가계에 태어난 사람은 그만큼 영적인 환경이 좋지 못하다. 예수를 믿게 되더라도 신앙생활은 그만큼 많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자기 대에서 반드시 영적인 저주를 끊어야 한다.
자기 후손에게는 조상 때로부터 내려온 영적인 저주를 물려주지 않도록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당신이 살기 위해 복과 생명을 택한다면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은 천대에 이르도록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믿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도 성경의 많은 예를 거울삼아 자신의 믿음을 잘 보존해야 한다. 아무리 아비가 하나님을 잘 섬겼다 해도 자기 본인이 믿음에서 떠나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자손들에게까지 저주가 임하게 된다.
예수께서 새롭게 산 길을 열어 놓았으므로(히 10:20), 우리는 조상을 탓할 수도 없으며 탓해서도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조상의 영적인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의 영적인 환경을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환경으로 개척해 가는 영적인 조상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내 자손들 가운데는 불신자가 나와서는 안 되며, 대충대충 신앙생활하는 자가 나와서도 안 된다.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영적인 원수들이 공격할 수 있는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온 가족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권능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 이름’을 힘입어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를 위해 간구하며 모든 환경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글·김창주 기자
몇 년 전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이 서점가를 강타한 적이 있다. 그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 따위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주장에 대한 찬반 논쟁은 여러 신학잡지나 신앙잡지를 통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존 F. 케네디 가문의 비극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존 F. 케네디 가문을 잠깐 살펴보면, 먼저 존 F.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46세의 나이에 암살당했고, 그의 아버지 로버트 케네디는 42세에 목숨을 잃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맏형인 조세프 케네디 주니어는 2차 대전 중 29세 때 비행기 추락사했고, 여동생 캐슬린도 1948년 비행기 사고로 28세 에 사망했으며, 막내 동생 테드 케네디는 비행기 사고로 허리를 다쳤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 마이클 케네디는 1998년 1월 2일에 콜로라도 주(州) 애스핀의 스키장에서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마이클 케네디의 아버지 로버트 케네디는 1968년 6월에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 선거운동 중 캘리포니아에서 암살당했다. 1998년에 있었던 마이클 케네디의 사망은 케네디 가(家)로는 여섯 번째 요절이다.
그 외에 마이클의 형 데이비드 케네디는 1984년 마약 과다 복용으로 숨졌으며, 케네디 대통령 자신은 암살되기 전에 에디슨병을 포함하여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암살되기 3개월 전에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이 이틀 만에 숨지는 아픔을 겪었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요절 및 비극적 사건이 케네디 가(家)에 계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케네디 가(家)의 이야기는 케네디 가문에만 국한되는 특수한 예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알 수 없는 일들이, 특히 비극적인 일들이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보고 듣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어떤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 해답은 영적인 데 있다. 우리가 그 해답을 찾으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영혼과 육체를 지닌 인간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먼저 인간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집합체인 가정, 그리고 일정한 혈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가정들의 집합체인 가계(家系)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그 코에 생기를 부어 아담 곧 생령이 되게 하셨다(창 2:7). 이때부터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류는 영혼과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육체를 위해서는 식물을 주셨고(창 1:29),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를 위해서는 식물을 먹고,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산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가 된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 17) 하셨다.
즉 모든 것을 먹으라 하심으로써 육체가 모든 식물을 먹고 살게 하셨지만, 먹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영에 옴으로써 이때로부터 영은 그 계명에 의해 살게 된 것이다. 아담은 이 계명을 지키면 살고, 이 계명을 어기면 그 영이 죽는 것이다.
이는 마귀가 예수를 시험할 때 예수께서 마귀를 향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신 8:3)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지니고 있기에 식물로만 사는 자가 아니고 식물과 진리로 사는 존재다.
죄를 책임지는 영혼
인간의 육체는 시한적이나 영혼은 항구적이다. 육체는 항구적인 영혼을 담는 시한적인 그릇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시한적인 육체가 죄를 지어도 그 책임은 영혼이 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아담의 영은 이 계명을 지키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순간 하나님의 경고대로 아담은 죽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나서도 아담은 자녀를 낳으며 930세를 살았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순간 육체가 아닌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죄는 육체가 지고 책임은 영혼이 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영혼이 진다 해서 죽을 때까지 육체에는 아무런 재앙도 닥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 그 즉시 육체가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방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저주를 받았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아담은 열심히 땀을 흘려 수고해야 겨우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7~19).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 가운데 빠졌으며(롬 5:12), 일평생 죽기를 무서워하여 마귀에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음란과 불의, 거짓, 탐욕, 시기 등 갖가지 죄악들이 세상에 들어왔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그의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만을 행하게 되었으며, 그 영적인 죄악으로 말미암은 저주가 육체와 환경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서론에서 예를 든 케네디 가(家)의 비극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으로까지 연결된다.
죄와 저주를
모두 담당하신 예수
멸망할 수밖에 없던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되었으니, 인류가 살 길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 그는 오셔서 친히 고난을 받으사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담당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이 헐렸고(히 10:19, 20, 마 28:50, 51),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 예수께서 창에 찔리고 채찍에 맞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이 깨끗함을 받았다. 즉 예수의 고난받으심과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으며, 모든 저주에서 자유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죄 사함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육체의 저주에서도 자유한 신분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딛 2:14)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행 10:38)
성도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 있는 신분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에게는 저주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자기 병은 없다. 만약 성도가 병들어 있다면 그 병은 자기 병이 아니라 남의 병이다. 즉 귀신이 가지고 들어온 병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면 그 병은 떠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권세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저주의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
그렇다면 케네디 가(家)의 비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는 바로 적용의 문제다. 모든 인류와 마찬가지로 케네디 가(家)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막힌 담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의 공로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께서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인정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저주가 아니라 그 가계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로 인해 생긴 것이다.
어떤 이는 예수 믿는 신자에게는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한다(벧전 5:8). 마귀의 공격 대상에서 믿는 자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한번 쫓겨 나간 귀신도 두루 다니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하면 자기가 나온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마 12:43∼45).
그러므로 성도가 깨어 있지 않으면 귀신이 그 틈을 타고 들어와 우리의 환경과 육체를 파괴하는 일을 한다. 성도가 늘 깨어 있어 근신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축복은 천 대에, 저주는
삼사 대에 이른다
성경에는 아주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다. 우리는 간혹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자기만 책임지면 될 뿐, 자기 가족이나 자손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축복과 저주의 문제에 있어서 아비와 자손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한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신 28:58, 59)
“주는 은혜를 천만 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 32:18)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시 103:17, 잠 20:7)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오직 복과 생명만 베푸시는 분으로 오해하는데, 하나님은 복과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저주와 사망, 그리고 유혹도 함께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나 결코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여 복을 택하면 복을 베푸시고, 저주나 유혹을 택하면 그대로 역사하신다.
구약 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다수의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르고자 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거짓말하는 영(천사)이 임하여 아합 왕을 꾀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게 한 경우가 있다(왕상 22:19).
또한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 왕이 하나님을 떠나 그 말씀에 순종치 않자,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고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신이 심하게 임했던 경우(삼상 16:14)도 있다. 그들이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최후가 비참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과 생명이 아닌 저주와 유혹을 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자손들에게는 ‘거짓말’하는 못된 습성이 있었고, 다윗과 그 자손들은 ‘음란’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다윗 가계의 음란의 문제는 살인이라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져 유혹을 택한 결과가 얼마나 큰 화를 가져오는지를 실감케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도 깨어 있지 않으면 미혹하는 영에 의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자손이 살기 위하여 복과 생명을 택하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복과 생명을 택하면 우리 자신과 자손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망과 저주와 유혹을 택하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도 그 저주와 사망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행위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까지도 그 결과가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가정을 만들자
경우에 따라 자신이 그 가정에서 또는 더 나아가 그 가계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일 수도 있고, 조상 때로부터 예수를 믿어온 경우일 수도 있다. 조상 대대로 예수를 믿지 않았던 가계에 태어난 사람은 그만큼 영적인 환경이 좋지 못하다. 예수를 믿게 되더라도 신앙생활은 그만큼 많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자기 대에서 반드시 영적인 저주를 끊어야 한다.
자기 후손에게는 조상 때로부터 내려온 영적인 저주를 물려주지 않도록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당신이 살기 위해 복과 생명을 택한다면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은 천대에 이르도록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믿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도 성경의 많은 예를 거울삼아 자신의 믿음을 잘 보존해야 한다. 아무리 아비가 하나님을 잘 섬겼다 해도 자기 본인이 믿음에서 떠나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자손들에게까지 저주가 임하게 된다.
예수께서 새롭게 산 길을 열어 놓았으므로(히 10:20), 우리는 조상을 탓할 수도 없으며 탓해서도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조상의 영적인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의 영적인 환경을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환경으로 개척해 가는 영적인 조상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내 자손들 가운데는 불신자가 나와서는 안 되며, 대충대충 신앙생활하는 자가 나와서도 안 된다.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영적인 원수들이 공격할 수 있는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온 가족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권능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 이름’을 힘입어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를 위해 간구하며 모든 환경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글·김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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