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 [Pelagius]
354경 브리튼(?)~418 이후 팔레스타인(?).영국의 수사·신학자.
펠라기우스주의로 알려진 그의 이단적 신학체계는 영혼이 구원받는 데 있어
인간의 노력이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380년경 로마에 간 펠라기우스는 사제는 아니었지만 영적인 지도자로서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적 게으름에 대한 비난으로 작용했다.
펠라기우스는 로마의 그리스도교도들의 도덕 수준에 크게 실망했다.
한 주교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에서 인용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그는
신의 은총 교리에 관한 로마의 도덕적 태만을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금욕을 위한 기도에서 하느님에게
하느님의 뜻대로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구했다.
펠라기우스는 이 가르침이 모든 도덕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이유에서 그것을 공격했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그때 가장 절친한 협력자인
법률가 켈레스티우스를 알게 되었다.
410년 로마가 비시고트족 족장인 알라리크에게 함락된 뒤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적의에 찬 비난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의 교리, 특히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한 도덕적 본성을 갖고 있고,
영적 향상을 위해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데 대해
인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비난하는 몇 권의 저서를 발행했다.
412년경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을 향해 떠났다.
415년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고소를 당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깨끗이 하여 비난을 피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더 심한 공격과 라틴어역 성서학자 히에로니무스(제롬)에 대응하여
그는 〈자유의지에 관하여 De libero arbitrio〉(416)를 썼는데,
이 글은 아프리카의 2개 공의회가 그의 가르침을 단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1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그 단죄를 승인하고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파문했다.
인노켄티우스의 후계자인 조시무스는
처음에는 펠라기우스의 〈신앙에 대한 짧은 진술 Libellusfidei〉에 근거해
그를 무죄로 선언했지만,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새로 조사하여
펠라기우스를 단죄하는 공의회의 9개 교령을 승인했다.
그 후 펠라기우스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354경 브리튼(?)~418 이후 팔레스타인(?).영국의 수사·신학자.
펠라기우스주의로 알려진 그의 이단적 신학체계는 영혼이 구원받는 데 있어
인간의 노력이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380년경 로마에 간 펠라기우스는 사제는 아니었지만 영적인 지도자로서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적 게으름에 대한 비난으로 작용했다.
펠라기우스는 로마의 그리스도교도들의 도덕 수준에 크게 실망했다.
한 주교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에서 인용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그는
신의 은총 교리에 관한 로마의 도덕적 태만을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금욕을 위한 기도에서 하느님에게
하느님의 뜻대로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구했다.
펠라기우스는 이 가르침이 모든 도덕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이유에서 그것을 공격했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그때 가장 절친한 협력자인
법률가 켈레스티우스를 알게 되었다.
410년 로마가 비시고트족 족장인 알라리크에게 함락된 뒤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적의에 찬 비난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의 교리, 특히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한 도덕적 본성을 갖고 있고,
영적 향상을 위해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데 대해
인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비난하는 몇 권의 저서를 발행했다.
412년경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을 향해 떠났다.
415년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고소를 당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깨끗이 하여 비난을 피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더 심한 공격과 라틴어역 성서학자 히에로니무스(제롬)에 대응하여
그는 〈자유의지에 관하여 De libero arbitrio〉(416)를 썼는데,
이 글은 아프리카의 2개 공의회가 그의 가르침을 단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1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그 단죄를 승인하고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파문했다.
인노켄티우스의 후계자인 조시무스는
처음에는 펠라기우스의 〈신앙에 대한 짧은 진술 Libellusfidei〉에 근거해
그를 무죄로 선언했지만,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새로 조사하여
펠라기우스를 단죄하는 공의회의 9개 교령을 승인했다.
그 후 펠라기우스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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