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칼럼·논문·서적/기독칼럼

재림 대망자의 취할 태도

은바리라이프 2008. 6. 3. 18:47

재림 대망자의 취할 태도
마가복음 13:33

 

 글 이준수
 평역  손동식 | 총회 교육국 간사

 

구세주 예수의 재강림에 대하여서는 주(요 14:3)께서와 천사(행 1:11)와 성신(살전 4:16)과 성도들(히 9:28, 10:37)이 명확히 증거한 바 신약성경에서만 삼백십 여구에 기록되었으니 신자로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할 때에 신중히 주의하여 큰 소망을 삼을 것은 구세주 예수의 재강림이다. 사도들은 전부 구세주의 재강림으로써 무상(無上)의 최고 소망을 삼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재림에 대한 신앙이 초대교회 전체를 일관하는 굳센 신앙의 특징이며 핵심이었다.

우리가 만일 재림이 없는 줄로 생각하면 어찌 진리를 알고 가진 자라 할 것인가. 재림이 없는 줄로 아는 자가 혹 있는 것은 신구약성경에 대한 연구가 불철저한 까닭이며 또는 그릇된 인도자의 교훈을 따른 까닭이다. 재림의 소망이 아니면 신도의 열심을 격발치 못할 것이며, 신도의 선행을 면려치 못할 것이며, 교인의 신심을 견고히 하지 못할 것이며, 신자의 비애를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즉 주의 재림을 의논하는 자 중에 두 파가 있으니 하나는 천년전파요, 또 하나는 천년후파이다. 전자는 일천년 태평시대 이전에 주께서 재림하신다 하여 사도의 교훈을 보존하고 경성하여 기도하여 성결한 마음으로 전도에 진력하는 자요, 후자는 일천년 태평시대 이후에 주께서 재림하신다 하여 미리 깨어 주의 재림만 간절히 기다릴 뿐이지 무용(無用)의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이다. 이 시대의 교회를 고찰컨대,주의 재림을 알고자 아니하는 자가 많이 있음으로써 신앙의 권능과 서로 사랑의 열성과 소망의 영원한 것이 부실한 교회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

독자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논설이 가한 줄로 인정하느뇨. 고대 사도들과 신자들은 일천년 태평시대 이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줄로 밝히 알고 자기들의 확신 있는 소망을 삼았다. 타인을 열심히 교훈하며 권면하더니 중간에 거짓 교사가 생겨 일천년후설을 주창함에 여러 교인들은 이 말이 옳은 줄로 알고 순종하는 동시에 행위도 덕스럽지 못하여지고 이전의 열심과 애정도 식어짐에 주 안에 있는 뜻있는 성도들의 염려와 근심이 없지 않더니, 다행 중 다행으로 19세기 중간에 성경을 연구하는 유명한 선생들이 다시 사도들의 교훈을 정통적으로 계승하여 일천년전설을 유력하게 주창함으로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부흥의 기세가 교회에 점차로 나타났으니 진실로 주께 영광을 돌릴 일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주의 재림을 믿기 이전에는 성경 보는 데 영성이 없더니, 주의 재림을 믿은 후에는 새 성경, 새 뜻을 깨달았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구세주의 재림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위태한 일은 재림의 연월일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말씀에 대한 큰 위반이다. 성경에는 영의 아버지만 아신다(마 24:36)고 하였는데 어떻게 부족한 인생이 그날을 결정할 수 있으랴. (그날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여실히 폭로하는 것이며 손실을 초래하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1840년부터 1844년까지 5년 동안 재림운동이 대단히 맹렬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주께서 1844년 10월 22일에 재림하실 줄로 생각하고 기다리다가 그날에 재림하지 않음에 소망이 수포에 돌아감으로 낙심할 뿐 아니라 배도한 자도 적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한 재림을 신앙하는 이들에게 위험한 일은 너무 열광적 태도에 편중함이다. 그 실례를 들라면 고대 데살로니가교회의 일부 신자가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하였다 함으로 현실생활에 대하여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여 영적 근신의 삶이 빈약하고 노동을 하지 아니 하려 하고 식량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어 바울 선생은 그러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그런즉 우리는 재림의 연월일시를 짧고 짧은 지식으로 결정해서도 아니되며 또는 너무 열광적 태도로 편중해서도 아니되며, 단지 느긋함(牛步的)으로 하늘을 보아도 부끄럽지 않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제 진인사(盡人事)란 무엇인가?

조심할 것!

글자모양으로 보아 사월삼점(斜月三點)인 유교의 ‘심’(心)은 불교에서는 반약(般若; 분별이나 망상을 떠나 깨달음과 참 모습을 환히 아는 지혜)이라고 하는데 이 마음은 무형(無形), 무성(無聲), 무취(無臭)한 것으로 우리의 언행을 좌지우지하는 중추기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한서(漢書)에는 “心不在焉 食餌不知其未 視而不見 廳而不聞”(마음이 없으면 밥을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며 눈으로 보지 못하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이라 하였다. 이 마음을 조정하면 신앙은 단순하고 소망은 견고하고 사랑은 농후하고 인격은 고상하여질 것이요, 이 마음을 방임하면 신앙은 산란하고 소망은 박약하고 사랑은 냉각되는 동시에 인격은 심한 파산을 당하는 것이다. 조심하지 않다가 실수하는 일이 진실로 비일비재하다. 옛날 개성 박연폭포에서 박연이란 선생이 떨어져 즉사한 것이나 수년 전 통천 총석정에 서 있던 취객이 직사한 것은 조심하지 아니한 연고요, 삼각산 백운대나 금강산 세존봉에 무사히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은 조심한 연고이다. 이 세속에 감염되지 않고 겨울봉우리의 수고송(秀孤松)같이 절개 있게 생활하다가 재림의 주를 반가이 영접하려면 오직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경성할 것!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요긴한 교훈이다. 그런고로 본절에도, 34절에도, 35절에도 거듭해서 말한 것이다. 마치 출가하는 철없는 딸에게 하는 어머니의 부탁과 같은 말씀이다. 주의 재림은 언제인지 모르니까 항상 경성하고 있어야 될 것이 당연하니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해주에 있던 청년이 졸음이 하도 많아 늘 경성하지 못하고 졸았는데 어떤 때에는 타고 가는 자전거에서 졸다가 도로변 전주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몇 해 전 어느 겨울밤에 평양 어떤 상점에 노인 여러 명이 모여 놀다가 밤은 깊고 배는 출출하니 평양 명물인 냉면을 사먹게 되었는데, 그때에 깊이 잠든 소년 점원을 깨워 냉면 한 그릇을 주문한즉 그 점원은 잠을 깨지 못하고 국수 그릇을 가지고 외출하여 쏟아버리는지라, 그 연고를 물은즉 요강인 줄 알고 그리 하였다고 함에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한다. 깨지 못한 사람의 일이란 것은 대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자.

기도할 것!

기도를 싫어하는 신자는 참된 기독인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 생활 속에 주님이 계신 것이다. 참된 기도의 생활은 자신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주님이 살아 계셔서 자신은 죽고 내 속에 주님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분망할 때에나 곤란할 때에나 우선 기도해야 한다. 자기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도 먼저 기도해야 한다.

어느 때에 감리교회 제2세 총리사 김종우 목사의 외삼촌댁에 불이 났다. 그 주인은 온 가족을 불러놓고 “주여, 우리 집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진화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기도하는 시간은 1분도 안되었다. 마음을 진정하고 덤비지 않고 물을 풍덩 퍼다가 불을 다 꺼 버렸다. 사람은 어려운 때나 두려운 때나 기도가 필요하다. 주님의 생활은 기도하고 일하시고 기도하시고 일하는 생활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에도 자꾸 썩어가는 것을 우선 기도하고 일어나라고 하셨다. 오천 명이 배가 고프다고 어른과 아이들이 법석을 떨 때에도 “여기에 떡이 있다 하시고 어서 속히 먹어라” 하시지 않고 다 앉히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떡을 떼어 주시었다. 주님의 생활은 기도의 생활이었다. 성결한 생활로 인해 주님의 은사가 나타난 것이다. 세상은 기도의 결핍으로 인하여 죽어가는 것이다. 기도가 없음으로 세상 사람들은 참 생명 안에서 끊어지고 마음대로 행한다. 이는 포도나무에서 찍어버린 가지와 같은 것이다. 기도 없이 하루 이틀을 꽤 살 것 같으나 참 생명선이 없이 몇 순간이나 그 생을 연장하랴. 기도가 없을 때에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간다. 유명한 신학자 뿔사이스는 말하기를 가장 큰 죄는 기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옥스퍼드 그룹운동에서는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첫째로 하나님과 나를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그 분리는 기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심하고 깨어서 기도함으로 재림과 주를 영접할 준비를 온전히 하자.

-------------------------------

* 이 글은 활천 1939년 4월호 23-26쪽에 실렸던 글을 현대어로 바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