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는 나를 인(印)같이 마음에 품고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2-06-28 |
예수···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와 결별하면서부터 나는 예수와도 작별을 고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프리드리히 니체를 따라 교회를 나서면서나는 예수를 향하여 말했다. 『당신은 나같은 천한 인생에게 너무나 고상하신 분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노하느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고 몰아 붙이시는 당신의 결벽증을 나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 혼자서 많이 고상하게 사십시오. 나는 내 식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욕하며 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제발 내게 눈을 빼버리라느니 오른손을 찍어 내버리라느니 하는 끔찍한 말씀일랑은 마십시오』 나는 나를 규제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쟝 폴 사르트르의 「자유(自由)에의 길」이 곧 나의 길이었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거나 묶어둘 수 없었다. 나는 내 식대로 살고 내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룟 유다의 성실한 태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선생을 혁명 지도자로 내세우려다가 오히려 선생만 죽게하고 혁명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는 선생을 고발하여 그를 궁지로 몰았던 행위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긱 위해서 스스로 목을 매었던 것이다. 책임지는 자유···, 그것은 니체의 웅혼한 운명애(運命愛)의 의지였고 사르트르가 외친 사상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는 초라한 때 배자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위암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을때 나는 아내에게 임한 모든 수난이 바로 「나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암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분석해보아도 그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암의 원인이 반복적으로 가해진 충격과 스트레스의 결과라고 볼 때 아내에게 반복적 긴장을 가한 것은 바로 주위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스스로 자유를 행사해 온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위암의 선고를 받은 아내를 위하여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룟 유다처럼 목을 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참담한 꼬락서니가 되어서 수치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강력하게 나를 선동했던 나체나 사르트르도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그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내가 다시 만난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거침없이 내버렸던 바로 그 예수란 사나이였다. 그는 뼈아픈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 나에게 변함없이 그 순결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나와 함께 울고 있었다. 그는 나와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 니체도 사르트르도 다 도망쳐버린 그 때에 예수는 아직도 십자가 위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광야를 헤매며 찾고 있었던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 십자가 위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바로 내가 찾아서 헤매고 있던 그 소망이었고 이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 나타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미리부터 예수의 모형이 되고 있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그리고 모세, 여호수아, 다윗, 엘리사 그 모든 믿음의 영웅들이 비록 실패도 많았지만 그 인생의 일부분을 예수의 모형으로 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오랫동안 메시야를 열망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끈질긴 소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성경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여기서부터 성경을 읽는 내 시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느 소설을 읽거나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그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하기 시작하면 마침내 그 주인공에 자기를 이입시키게 되고 마치 자기가 그 주인공처럼 생각하고 흥분하고 감격하고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까지 성경에 대한 내 상식적인 개념은 그저 삼국지처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책 정도였고 아니면 기껏해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서라거나 또는 <명심보감>처럼 유익한 교훈들을 많이 적어놓은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그 성경의 주인공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성경의 주인공이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는데 그가 곧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 1:2)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었다.(창 1:3). 그것을 알고서야 비로소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예수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아벨의 제사(창 4:4)가 예수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도 알고 되었고 라멕이 죽인 소년(창 4:23)도 예수의 모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와 축복했던 살렘의 제사장 멜기세덱(창 14:18)도 예수의 모형이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아들(창 15:4) 이삭도 예수의 모형이었다. 이삭은 예수처럼 자기를 불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던 것이다.(창 22:6). 성경은 그렇게 처음부터 예수의 행진이었다. 예수는 그토록 온천하 모든 백성의 소망이요, 꿈이요, 구원이었던 것이다. 예수가 성경의 주인공임을 알아차린 때부터 성경을 읽어가는 나의 눈은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인공의 이야기였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예수, 그는 바로 늘 엄격해 보이기만 했던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자신의 진심이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어느 날 교회에서 만난 한 교우가 나를 보고 이�게 말했다. 『믿음이 대단하시군요』 『네? 무슨 말씀이죠?』 저는 교우들이 들고 있는 성경의 위치를 보고 그 신앙의 정도를 짐작합니다. 처음 믿는 사람은 성경을 빗자루 잡듯이 손끝에 잡는데 조금 지나면 손목이 꺾여져서 성경을 손바닥으로 들지요. 그렇게 성경의 위치가 조금씩 올라가다가 결국은 가슴에까지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얼른 내가 들고 있던 성경의 위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성경을 여대생들이 책을 껴안듯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내 심장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빙그레 웃었다. 내가 성경을 꼭 끌어안고 있었던 것은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가 어느새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어느새 나의 사랑이었던 연인이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圖章)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아 8:6) <김성일님의 "성경대로 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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