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쁜 교회 만들기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2002-06-05 |
성경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교회들이 신랑을 맞는 신부처럼 들림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엡 5:25)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7-8) 마태복음 24장에서 세상 끝날늬 징조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께서는 그 다음에 나오는 25장에서 신랑의 오심을 준비하는 열처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의 신부될 교회들이 어떻게 단장하고 기다려야 하느냐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필자는 갑자스럽게 들이닥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스스로의 교만으로 쌓아 올리던 문학의 바벨탑을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사용하던 글 쓰는 재능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쓰기로 작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한글들만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비록 세상 문단에서 내 이름은 잊혀져버렸지만 성도들 간에서 갑자기 나는 유명해지기 시작하였고 여러 교회들이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교회에 와서 신앙의 체험과 간증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이야기를 글쓰는 시간을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나마 주일 오후가 되면 부르는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간증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도 소홀히 했다가는 니느웨에 가라는 명령을 어겨서 야단을 맞은 요나처럼 될까봐 시간이 하락하는 안 오라는 교회마다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교파나 교단을 가리지 않고 여러 교회마다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교파나 교단을 가리지 않고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교회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회들이 교파나 교단에 관계없이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처럼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것 같은 예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어떤 교회는 밝고 싱싱하고 예쁘고 아름다운데 어떤 교회는 어둡고 무기력하고 찌들고 쭈그러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도 요한이 분류하여 기록한 일곱교회 중에서도 대조적인 두교회 즉 빌라델비아교회와 사데교회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빌라델비아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7-8)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랑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는데 혼인날을 준비하고 있는 신부가 하나는 비록 작더라도 예쁘게 단장하였고 하나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다고 선고를 받은 것이다. 내가 만났던 교회들도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바로 그렇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신랑께서 오시는 날 문제가 있으리라고 보이는 교회는 대개 그 주보의 인쇄가 화려하고 예산도 넉넉하나 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교회였다. 그런 교회일수록 목사님께서 직접 나를 초청하지 않는 교회였다. 그런 교회일수록 목사님께서 직접 나를 초청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성도들 중의 누군가 내글을 읽어본 사람이 소속된 조직의 회장에게 이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자고 건의하고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서 나를 부르게 되는 경우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기는 가지만 예상했던대로 그 교회의 분위기는 썰렁하게 마련이다. 우선 내 글을 읽어본 사람들이 별로 없기는 썰렁하게 마련이다. 우선 내글을 읽어 본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만나서 인사를 해도 화제가 없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내가 작가라는 것보다는 대우중공업의 임원이라는 데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 회사는 무엇을 만드는 회사냐고 묻든가 요즘 경기가 어떠냐고 묻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내 글이 무슨 대단한 것이어서 꼭 읽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한 교회의 성도들 앞에서 마이크를 내 줄 정도로 중요한 일을 맡기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혹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닌지 잘 알아보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시간이나 두시간 강단을 맡기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교회일수록 목사님 방에 보이지 않는다. 고급가구와 에어컨과 난방기구들이 들어차 있고 최신형 컴퓨터와 팩시밀리를 비롯한 여러가지 사무기기들 구비되어 있는데 서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별도의 서재가 있기는 하겠지만 서가가 목회의 현장에 있지 않다는 것도 목사님과 성도들간에 정보의 시차가 있다는 것을 짐 작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목사님뿐만이 아니라 장로님과 성도들이 모두 영적인 정보에 밝다. 그들은 요즘 성도들 간에 어떤 책이 많이 읽히고 있으며 어떤 이단들이 횡행하고 있으며 교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환하게 알고 있다. 목사님의 사무실은 완전히 책으로 뒤덮혀 있는데 장식으로 꽂아 둔 전집류가 아니라 일일이 읽고나서 꽂아둔 최신간의 책들이다. 대개 목사 목사님께서 직접 내게 전화를 걸어서 간증이나 특강을 요청해 오는 교회들의 경우에 그런 교회가 많은데 뜻밖에도 그 현장감으로 가득찬 서가에서 나는 자신이 쓴 책도 여러권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격하게 마련이다. 목사님이 공부를 많이 하고 정보에 밝으면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대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교회는 모두 바쁘고 활기에 넘쳐 있다. 그런 교회들일수록 젊은이들이 많아서 찬양이 넘쳐 흐르고 예배와 교제와 봉사가 모두 다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가본 교회 중에 주일 예배에 참석한 인원이 70명 남짓한 작은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 교회에 들어서면서 그 인상이 어찌나 예뻐보이던지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주보를 들여다 보았다. 비록 인쇄한 모양은 다른 큰 교회들보다 못했지만 주보를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작은 교회는 해외에 파송한 세명의 선교살를 돕고 있었으며 세군데의 농촌교회를 지원하는 중이었고 소녀가장 세명과 결연을 맺어서 모든 교우들이 힘이 합하여 돌보아 주고 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부릊었다. 「신랑을 위하여 예쁘게 단자한 신부가 여기 있구나!」 <김성일의 "성경대로 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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